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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환의 한국기행 10] 세상사 잊고 홀로 자연을 즐기다 -독락당 계정(獨樂堂 溪亭)
  • 박성환
  • 등록 2021-05-10 11:49:57
  • 수정 2024-03-23 00: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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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정


500년 고가의 품격, 한옥의 멋스러움은

자연과 어울려질 때 그 멋은 배가 된다.

탁월한 공간감의 자연미 

‘계정’을 만나러간다.

 

옥산정사 솟을삼문


별당


세심(洗心)마을, 

경주 양동마을의 지척에 자리한 산수 좋은 마을이다. 마음을 씻어내는 마을의 이름처럼, 마을길에 들어서면 물소리, 바람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나무는 숲이 되고 산이 된다.


마을은 성리학의 태두, 회재 이언적 선생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한옥 고가의 정갈함과 수수함이 그대로 선생의 모습을 닮은 마을이자 선생을 배향하는 옥산서원이 자리한 그곳, 그 자리에 독락당이 있다.

 

옥산정사 경청재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


경북 경주 양동마을 ‘서백당(書百堂)’에서 태어난 선생은 10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위었다. 하여 스승이자 외삼촌 ‘우재 손중돈(愚齋 孫仲墩, 1463~1529)’에게서 공부하였는데, 손중돈은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 1431~1492)’의 문하에서 공부한 성리학자로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 ‘포은 정몽주(包隱 鄭夢周, 1338~1392)’등의 학통을 이어받게 된다.


1513년(중종7)에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문과 급제하여 경주 주학교관(州學敎官)이 되었다. 


그러던 1517년(중종12), 이른바 ‘무극태극논쟁(無極太極論爭)’이 벌어졌다. 조선시대 성리학 철학 논쟁의 시작점 이라할 수 있는 논쟁으로, 영남의 성리학자인 손숙동과 조한보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이었는데, 젊은 성리 학자였던 선생은 선배였던 두 학자를 모두 비판하며 ‘이(理)가 기(氣)보다 우선한다.’는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훗날 퇴계 이황으로 이어지는 영남학파의 성리학의 태두가 되었고, 젊은 학자의 명성은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된다.


1518년(중종13)에 할아버지의 3년 상과 이듬해 ‘기묘사화(己卯士禍)’를 계기로 낙향하였으나, 왕의 거듭된 부름으로 1521년(중종16년)에 다시 조정에 나갔고, 왕명으로 이름을 ‘언적(彦迪)’으로 개명하였다. 


이 후 세자시강원의 설서가 되었으며, 세자시강원문학이 되어 이호(李岵=훗날 인종仁宗)의 스승이 되었으며, 성균관사성을 맡는 등의 관직생활을 했다. 


그러나 선생은 효심이 지극하여 조정에 나가서도 수시로 모친 봉양을 위해 ‘인동현감(仁同縣監)’, ‘밀양부사(密陽府使)’등의 외직을 자청하기도 한다.

 

그러던 1531년(중종26),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으로 있을 때, 


‘김안로(金安老, 1481~1537)’의 등용을 반대하며 그와 갈등을 빚었다. 자신의 측근들을 이용하는 행태와 정적에 대하여 가족은 물론 친족과 종친까지 무자비한 축출과 죽임으로 공포정치를 했으며, 그 외에도 많은 옥사를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더하여 동궁(=훗날 인종)을 보호한다는 명분아래 있으니 중종 역시 그를 부담스러워 하고 있었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다. 그러나 김안로의 아들 ‘김희(金禧, ? 1531)’가 중종의 큰딸인 ‘효혜공주(孝惠公主, 1511~1531)’와 혼인하며 외척의 실권을 잡고 있었기에, 결국 그로 인하여 탄핵을 받았으나 세자의 스승인지라 사사와 유배를 피하고 파직만 당하게 된다. 훗날 김안로는 권력을 통한 국정문란의 원흉이라 하여 ‘정유삼흉(丁酉三凶)’으로 불린다.

 


파직된 선생은 경주로 낙향하였으나, 자신 때문에 가족과 가문에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양동마을로 향하던 길을 멈추고, 세심마을 자옥산에 올라 별채 서실인 독락당을 짓고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이 후 조정에 들고 나기를 반복하다가 1537년(중종)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를 폐하려다가 실패하여 대신들의 공격을 받은 김안로가 왕명으로 사사되자 회재선생은 복권되어 조정에 나갔다. 그러나 아직도 조정은 외척들의 득세였다. 1545년(명종원년) 을사사화가 일어나고 이에 대한 심문과 판결을 하게 되면서 자신도 관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러나 외척들이 어디 고이 넘어가겠는가, 1547년(명종2)에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도 연루되어 귀양을 가게 된다. 그러나 귀양지에서 수많은 저술과 학문을 연구하다가 1553년(명종8) 11월, 향년 63세의 일기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옥산정사 독락당

옥산정사 편액은 퇴계이황의 글씨이며, 독락당 현판은 아계 이산해의 글씨다.


이후 퇴계 이황이 선생의 행장(行狀)을 지었고, 선생의 자료와 저술들을 재간행하기도 했다. 1568년(선조1)에 영의정 의정부에 추증 되었고, 종묘의 명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선조가 즉위하면서 ‘문원(文元)’의 시호를 받았다. 1573년 세심마을에 건립된 ‘옥산서원(玉山書院)’에 주향되고, 1610년(광해2)엔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었다.

 

그런 선생이 낙향하여 머물던 곳, 조정에서 쫓겨난 판이니 가문에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양동마을로 가기 전, 세심마을의 안쪽 깊숙한 곳에 짐을 풀었다.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하며,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운둔의 생활, 안에는 다시 자연과 동화되는 공간을 만들어 냈다. 


양지암과 계정


솟을삼문을 지나 별채가 우측에 서고 맞은편 너른 마당에 일자형으로 ‘경청재(敬淸齋)’가 선다. 


1601년(선조34년) 회재선생의 손자 형제가 세운 건물이다. 


이 때 ‘화의문약설(和義門略說)’을 작성하였는데, “계정과 독락당은 우리의 선조고(先祖考) 회재선생의 별서이자 우리 부모님의 혈성이 가득한 곳으로, 당우와 담장을 수호하기 위해 우리 형제가 약간의 토지를 출현하니, 후손들 가운데 궁색하다하여 토지에 대해 다투는 일이 있다면 불효로서 논단할 것이다.”라며 효를 강조하였으니, 청백리 선생의 후손다운 면모를 보인다.

 

계정 현판은 한석봉의 글씨다.


경청재를 지나면 ‘독락당(獨樂堂)’, 일명 ‘옥산정사(玉山精舍)’다.

회재 선생이 1532년(중종27)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사랑채다.


맹자의 ‘진심장구 상(盡心章句 上)’의 “고지현사하독부연(古之賢士何獨不然=옛 어진선비가 어찌 홀로‘獨’ 그렇지 않겠는가) 낙기도이망인지세(樂其道而忘人之勢=자신의 도를 즐겼고‘樂’ 권세를 잊었다.)”에서 따와 자신의 서재 이름을 지었다. 


처음에는 3칸의 띳집을 지었으나, 

정혜사 주지의 주선으로 띳집을 헐고 계정과 양진암, 그리고 독락당을 지었다고 한다. “세속을 잊고 자신의 도를 즐긴다.”라는 독락의 의미를 두며 자시 조정으로 복귀할 때까지 이곳에 머물며 학문과 제자 교육에 힘썼던 곳이다.


1516년(중종11)에 지어진 안채의 부속 건물로, 

옥산정사 편액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글씨이며, 독락당 현판은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 1539~1609)’의 글씨다. 


낯은 단위에 세워진 정면4칸, 측면2칸의 단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정면1칸, 측면2칸의 온돌방을 서편에 두고 나머지는 모두 우물마루를 깔아 사랑대청으로 썼다. 오량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초익공(初翼工)의 공포(栱包)로 꾸몄다. 뼈대가 노출시킨 연등천장이며, 옆으로 이어지는 담장에 띠살 창을 달아 대청에 앉으면 자개천을 바라볼 수 있도록 했다.

 


‘계정(溪亭)’

독락당을 돌아가면 약쑥 밭을 지나고, 이내 길손이 찾는 ‘양진암(養真菴)’ 경내다. 


이곳에 독락당에서 가장 멋진 조망을 보여주는 건물로 물가의 정자, ‘계정(溪亭)’이 있다.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둔 비경이다. 


‘독락당 계정’을 만나고서야 회재 선생의 자연과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이 훤히 보인다. 계정을 둘러보고 나면 건물과 자연의 만남이 이토록 잘 맞아 아름다움의 최고점을 이루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안쪽에서 보면 외벌대의 기단위에 놓은 ㄱ자의 평면으로, 양진암과 계정이다. 회재선생의 부친이 기거하시던 양진암이 서고, 한 칸의 온돌방을 이어 ‘인지헌(仁智軒)’이라 했고, 두 칸의 대청마루 ‘계정’이 이어진다. 


양진암 현판은 퇴계 이황의 친필이며, 계정의 현판은 ‘석봉 한호(石峯 韓濩, 1543~1605)’의 글씨다.


계곡을 뒷면으로 둔 의도적인 건물의 방향과 위치다. 


석축에 문만 달렸다면 정문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독락당의 담과 이어지는 자연스러움을 그대로 이어놓았다. 갑작스런 나무의 결이지만 처음부터 계획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아마도 회재선생이 외부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고립된 은둔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으로 해석 되지만, 실제 대청에 서면 자개천 계곡물이 흐르는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자개천에서 바라보는 계정의 멋은 또 다르다. 벽이 없으나 집과 자연을 명확하게 구분지어 놓았다. 축대를 쌓아 기둥을 대어 누마루와 같은 모습, 당당한 품격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공간의 아래 석축에는 아궁이까지 놓았다. 


계정을 올려놓은 그 자리를 선생은 ‘관어대(觀魚臺)’라 하였다. 물고기가 노는 모습을 바라본다는 곳이다.

 


살아생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 되었고, 

본격적인 성리학을 연구하고 피력한 최초의 학자였다. 사후에는 동방오현, 또는 동방육현, 동국18현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업적을 쌓은 학자이자 선비이기 이전에, 자연과 동화되어 살아가고 싶은 한 사람이었다. 관직의 틀에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던 강직함과 함께 유유자적, 운둔의 삶을 애절하게 그리워했던 노장이기도 하다. 


홀로 늙어 쉬어가는, 그 마저도 즐기고 싶은 선생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옥산정사, 독락정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계정이다.

 


글, 사진 자유여행가 박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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