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서울시 구석 구석 17] 실력 양성 운동과 애국 계몽 운동에 앞장선 독립운동가 '안창호'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1-05-11 16:05:06
  • 수정 2024-03-14 05:33:09

기사수정

사진-박광준 기자

[박광준 기자]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에 활약했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다. 호는 ‘도산’이다. 민족의 실력을 기르기 위한 교육 활동과 우리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에 앞장섰고, 신민회와 대성 학교, 흥사단 등을 세웠다.


안창호는 평생 동안 나라의 독립과 교육을 위해 살았던 인물이다. 자주독립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 민족의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 믿었다. 이에 따라 대성 학교, 흥사단 등을 세우고 교육 활동에 힘썼다. 또한 독립운동에 앞장서 신민회와 대한민국 임시 정부 등에서도 활약했다.


1919년 10월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원을 설립했을 때의 모습. 앞쪽 가운데 앉은 사람이 바로 안창호이다./사진출처-네이버

1878년에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난 안창호는 일찍이 신학문과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나라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민족의 실력 양성이 중요함을 깨달았다. 이후 독립 협회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경기도와 황해도, 평안도 등지에서 열린 만민 공동회에 참여해 민족의 계몽과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연설했다. 그는 뛰어난 말솜씨로 대중들의 호응을 이끌어 냈다. 그의 연설을 듣고 감동한 이승훈이 후에 오산 학교를 설립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대한 제국 정부에 의해 독립 협회가 강제로 해산당한 뒤, 안창호는 교육 운동을 하려면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미국에서도 교포들의 계몽을 위해 힘쓰면서 한인 민족 운동 단체를 만들어 활동했다. 그러다 1905년에 일제가 을사조약을 맺어 외교권을 빼앗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동료들과 함께 항일 운동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국내로 돌아온 안창호는 신채호 등과 함께 신민회를 만들어 독립운동을 하는 한편, 대성 학교를 세워 교육 운동을 벌였다. 또한 최남선, 김좌진 등과 함께 청년 학우회를 만든 뒤 민족 지도자들을 길러 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일제의 핍박이 더욱 강해지자 그는 중국과 러시아를 거쳐 미국으로 간 뒤 민족 운동 단체인 흥사단을 만들었다.


사진/박광준 기자미국에서 3.1 운동 소식을 들은 안창호는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갔다. 그는 독립운동을 위한 국내외 연락 조직인 연통제를 만들고,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 세력들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노력했다. 중국과 미국을 오가면서 활동하던 그는 1932년 윤봉길의 의거가 일어났던 날에 일본 경찰에게 붙잡혔고, 감옥살이를 하면서 얻은 병이 악화돼 1938년에 세상을 떠났다.


안창호의 사상은 민족 개조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개조란 더욱 좋아지게 하거나 잘못된 것을 고친다는 뜻이다. 그는 자주독립을 이루려면 민족의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에 따라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참됨에 힘쓴다는 뜻의 무실, 신의와 믿음을 뜻하는 충의, 불의에 맞서는 용기를 뜻하는 용감, 실천의 중요성을 뜻하는 역행 등 안창호의 사상을 담은 단체인 흥사단은 지금까지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자료출처-네이버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궁궐이야기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