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서울시 구석 구석 19] 조선 중기의 시조작가이자 문신 '윤선도'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1-05-11 16:57:53
  • 수정 2024-03-14 05:34:46

기사수정

대학로 마로니아 공원내 윤선도의 시비/사진-박광준 기자

[박광준 기자] 조선 중기의 시조작가이자 문신. 서울 출생.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을 지낸 유심(惟深)의 아들이고,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유기(惟幾)의 양자이다. 8세 때 큰아버지에게 입양돼, 해남으로 내려가 살았다. 당시 금서(禁書)였던 '소학(小學)'을 보고 감명을 받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18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20세에 승보시(陞補試)에 1등 했고 향시와 진사시에 연이어 합격했다.


1616년(광해군 8) 성균관유생으로 이이첨(李爾瞻).박승종(朴承宗).유희분(柳希奮) 등 당시 집권세력의 죄상을 격렬하게 규탄하는 '병진소(丙辰疏)'를 올려, 이로 인해 이이첨 일파의 모함을 받아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됐다. 그곳에서 '견회요(遣懷謠)' 5수와 '우후요(兩後謠)' 1수 등 시조 6수를 지었다. 1년 뒤 경상남도 기장으로 유배지를 옳겼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이이첨 일파가 처형된 뒤 풀려나 의금부도사로 제수됐으나 3개월 만에 사직하고 해남으로 내려갔다. 그 뒤 찰방 등에 임명됐으나 모두 사양했다. 1628년(인조 6) 별시문과 초시에 장원으로 합격해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의 사부(師傅)가 됐고, 사부는 관직을 겸할 수 없음에도 특명으로 공조좌랑.형조정랑.한성부서윤 등을 5년간이나 역임했다. 163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예조정랑.사헌부지평 등을 지냈다. 그러나 1634년 강석기(姜碩期)의 모함으로 성산현감(星山縣監)으로 좌천된 뒤, 다음해 파직됐다.


조선 중기의 문신 윤선도의 문집. 1791년(정조 15) 전라감사 서유린이 왕의 명을 받고 간행하였다/출처-장서각도서그 뒤 해남에서 지내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항복하고 적과 화의했다는 소식에 접하자, 이를 욕되게 생각하고 제주도로 가던 중 보길도(甫吉島)의 수려한 경치에 이끌려 그곳에 정착하게 됐다. 정착한 그 일대를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고 격자봉(格紫峰) 아래 집을 지어 낙서재(樂書齋)라 했다. 그는 조상이 물려준 막대한 재산으로 십이정각(十二亭閣).세연정(洗然亭).회수당(回水堂).석실(石室) 등을 지어놓고 마음껏 풍류를 즐겼다. 하지만 난이 평정된 뒤 서울에 돌아와서도 왕에게 문안드리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1638년 다시 경상북도 영덕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이로부터 10년 동안 정치와는 관계없이 보길도의 부용동과 새로 발견한 금쇄동(金鎖洞)의 산수자연 속에서 한가한 생활을 즐겼다.


고산선생시비기/부산 기장군 일광면 삼성 마을에 있는 고산선생시비기의 모습이다. 반듯한 사각형의 돌에 흰 글씨로 빽빽하게 적혀 있다./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이때 금쇄동을 배경으로 '산중신곡(山中新曲)' '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 '고금영(古今詠)' '증반금(贈伴琴)' 등을 지었다. 그 뒤 1651년(효종 2)에는 정신적 안정 속에서 보길도를 배경으로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지었다. 다음해 효종의 부름을 받아 예조참의가 됐으나 서인의 모략으로 사직하고 경기도 양주 땅 고산(孤山)에 은거했다. 마지막 작품인 '몽천요(夢天謠)'는 이곳에서 지은 것이다. 1657년, 71세에 다시 벼슬길에 올라 동부승지에 이르렀으나 서인 송시열(宋時烈)일파와 맞서다가 삭탈관직됐다. 이 무렵 '시무팔조소(時務八條疏)'와 '논원두표소(論元斗杓疏)'를 올려 왕권의 확립을 강력히 주장했다. 1659년 효종이 죽자 예론문제(禮論間題)로 서인파와 맞서다가 패해 삼수에 유배됐다가, 1667년 풀려나 부용동에서 살다가 그곳 낙서재에서 85세로 죽었다.


윤선도 종가 문적 중 산중신곡 오우가/조선 중기의 문서 윤선도(尹善道)의 수적과 관계문서. 보물 제482호.정치적으로 열세에 있던 남인가문에 태어나서 집권세력인 서인 일파에 강력하게 맞서 왕권강화를 주장하다가, 20여년의 유배생활과 19년의 은거생활을 했다. 그러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 화려한 은거생활을 누릴 수 있었고, 그의 탁월한 문학적 역량은 이러한 생활 속에서 표출됐다. 그는 자연을 문학의 제재로 채택한 시조작가 가운데 가장 탁월한 역량을 나타낸 것으로 평가된다. 그 특징은 자연을 제재로 하되 그것을 사회의 공통적 언어관습과 결부시켜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개성적 판단에 의한 어떤 관념을 표상키 위해 그것을 임의로 선택하기도 한 데에 있다.


보길도 윤선도 원림 부용동 정원/전라남도 완도군 보길면 부황리에 있는 윤선도 관련유적. 명승 제34호. 1637년(인조 15) 2월 윤선도가 51세 때 입구에 세연정과 연못을 축조하였는데, 물과 바위와 소나무, 대나무 등을 이용한 조원공간이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또, 대부분의 경우 자연은 엄격히 유교적인 윤리세계와 관련을 맺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자연과 직립적인 대결을 보인다든가 생활 현장으로서의 생동하는 자연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자연이 주는 시련이나 고통을 전혀 체험하지 못하고 유족한 삶만을 누렸기 때문이다. 정철(鄭澈).박인로(朴仁老)와 함께 조선시대 삼대가인(三大歌人)으로 불린다. 이들과는 달리 가사(歌辭)는 없고 단가와 시조만 75수나 창작한 점이 특이하다. 문집 '고산선생유고(孤山先生遺稿)'에 한시문(漢詩文)이 실려 있고, 별집(別集)에도 한시문과 35수의 시조, 40수의 단가(어부사시사)가 실려 있다. 또, 친필로 된 가첩(歌帖)으로 '산중신곡' '금쇄동집고(金鎖洞集古)' 2책이 전한다./자료출처-네이버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궁궐이야기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