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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기의 공연산책5] 영화인 전운식 田運植 을 생각하며
  • 박정기 본지 자문위원
  • 등록 2019-06-23 23:35:00
  • 수정 2020-09-10 11: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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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운식(田運植 1940~2010)의 9주기가 되었다.


전운식(田運植 1940~2010)의 9주기가 되었다. 


하남시 검단산에서 낙상사한지 벌써 9년이 되었다. 필자가 1960년대 후반 서울대학교 연극연출을 하던 무렵, 연극음악을 도맡아 넣어주던 김수길(金秀吉, 1940~)의 소개로 알게 되었고, 영화 조감독을 한다며, 영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주로 했고, 연극 이야기도 나눴다. 영화배우 송재호(1939~)와 제일기획에 근무하던 박훈삼(1941~)과 죽마고우라며, 부산에서 피란시절을 함께 보냈다고 했다. 성공회 주교 이대용, 영화감독 김원두, 교사 곽재창, 시나리오 작가 백결과 김일부, 영화배우 하명중, 영화감독 한옥희, 다큐멘터리 감독 김천봉, TV드라마 연출가 전세권, 방송인 김벌래, 소설가 김병총, 김원일, 송영, 조세희, 조해일, 호영송, 극작가 조성현과 전진호 그리고 이반, 서예가 안동해, 공연기획자 장석은, 그리고 김길마와 김희원 등과 각별한 사이라고 했다. 



당시 극작가 故 이반(1939~2019)이 편집장으로 있던 흥사단 새 생명 지에 영화평을 쓰고 있노라고 했다. 기억력이 출중한 편으로 영화제목을 누가 이야기하면, 감독에서부터 출연배우들의 이름을 줄줄이 읊어대는 살아있는 영화사전 같은 인물이었고, 필자가 연출한 10여 편의 서울대학교 연극과  극단 탈을 비롯한 실내극 야외극 연출작품도 빼놓지 않고 모두 관람을 하고, 독일 문화원, 불란서 문화원에서 상영하는 영화는 물론 영화관마다 다니며 영화를 관람하고, 포스터나 프로그램을 반드시 수집해 수천 장을 보관한 수집광이었다. 


전운식은 주말마다 등산을 해, 필자 역시 전운식과 산행을 한 적이 많았고, 곰이라는 축구팀을 조직해, 가끔 다른 팀과 시합을 할 때면, 필자에게 번번이 심판을 맡겼다. 전운식은 생활력이나 경제력이 없어 평생 단벌신사 노릇을 했고, 머리는 짧게 깎았기에 기른 모습을 거의 볼 수가 없었고, 50대에야 비로소 장가를 들어 아들과 딸을 남겼다. 친구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꾀뚫어 알고 지냈어도 자신의 일은 철저하게 감췄고, 전화번호까지도 숨기고 지낸 기벽이 있었다. 


사후에 밝혀진 이야기지만 ‘여의도에는 대한민국이 없다’라는 영화를 감독하기로 하고, 촬영에 들어가기 일주일 전에 검단산에서 낙상해 머리를 다쳐 죽었으니, 영화감독 전운식으로 불리기는 했어도 한편의 영화도 만들지 못한 운명의 사나이가 되었다. 



필자가 방송을 접고 절에 들어가 10년 가까이 지낼 때 절까지 찾아와 함께 지내기도 했고, 부처 앞에 드리는 절도 스님 네 못지않게 정중했는데, 후에 알고 보니 교회신자였다니 놀라운 일이다. 


전운식은 출중한 기억력과 함께 인물도 어느 영화배우 못지않은 미남이었고, 그의 영화감상평은 전문영화평론가의 수준을 능가하는 실력이었다.
 
전운식을 위한 친지들이 마련한 기념 사업회에서 ‘어느 영화중독자의 이야기’라는 전운식 관련 책자를 발간했다. 영화인 전운식을 생각하는 모임에서 펴낸 이 책은 평안북도 선천 출생으로 여덟 살에 월남해, 평생 2만여 편의 영화를 보며, 걸어 다니는 영화 사전으로 불린 전운식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스크린 안이 아닌 스크린 밖에서 치열한 삶을 살다간 그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다. 출판을 축하하고 저승에서라도 전운식이 바라던 영화를 제작 감독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경력

황해도 금천생, 서울고 서울대미대, 서울대학교 총동문회 이사, 극작가/연출가/평론가, 한국희곡뮤지컬창작워크숍 대표, 한국문인협회 희곡분과 위원, 전 서초연극협회 회장, 본지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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