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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21] 서해 어물의 집결지 '칠패시장'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1-05-16 18:38:50
  • 수정 2024-03-14 05:3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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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천교 앞에 설치된 칠패시장터/사진-이승준 기자

[이승준 기자] 18세기 전반, 칠패시장은 시전 상인들이 점포를 갖고 있는 종루를 위협할 정도로 엄청난 자본력을 보유하게 되면서, 그 자본력으로 매점매석을 통해 큰 이익을 얻었다. 칠패시장이 있던 곳은 오늘날의 봉래동 일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칠패시장은 남대문과 서소문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평소에도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다. 또 하나 이 위치의 강점은 지방에서 물길을 통해 물자가 운송되는 지점인 용산과 마포와 가까운 곳이으로, 지방에서 올라오는 어물의 반입이 용이했다.

또한 직접 누원점이나 동작진 등에 사람을 파견해 남쪽과 북쪽에서 어물을 갖고 오는 상인들을 끌어들여 모두 매점한 다음 각지로 판매하는 도매상 역할을 했다. 당시 회현동, 죽전동, 주자동, 어청동, 어의동, 이현, 명문 등지에 칠패시장에서 확보한 어물이 산처럼 쌓였다고 전한다.

칠패시장은 이렇게 매점매석을 통한 도소매로 거래량도 점점 시전을 능가했고, 서울 누원점이나 송파점 등을 외곽 시장으로 삼을 정도로 성장했다. 시전 상인들의 종루, 이현시장과 함께 서울의 3대 시장으로 꼽힐 정도ㄹ고 성장했다.

칠패시장에서 주로 취급한 품목은 어물이었으나, 이후 18세기 이후 시장의 규모가 확대되면서 어물뿐만 아니라 미곡과 포목 등 다양한 물품을 집산해서 판매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은 역시 어물전이었다.

염천교 앞에 설치된 칠패시장터/사진-이승준 기자

칠패시장의 성장과 시전의 쇠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갑오개혁으로 인한 금난전권의 폐지였다. 일정한 지역에서 독점권을 갖고 있던 시전은 그 권리를 잃으면서 급속도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1892년 비단을 취급하는 입전은 80만 냥의 손해를 입었고, 면주전은 20만 냥의 손해를 입는 등 쇠락했다. 결국 시전 상인들은 스스로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1898년에 황국중앙총상회를 설립했다.

구한말에 칠패시장은 종로와 남대문로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곳에는 임시로 지은 가게 건물과 상점들이 빼곡했다. 정부는 교통과 위생의 문제를 들어 사람들의 통행이 많은 남대문로를 정비키로 결정했다.

남대문 좌우에 펼쳐져 있는 시장은 인근의 선혜청으로 이전하는 계획을 수리하고, 선혜청의 곳간과 마당을 장터로 내놓았다. 선혜청은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생긴 관청으로 대동미와 대동포 등의 출납을 관장하던 관청이었다.

정부는 훗날 마땅한 장터가 생길 때까지 한시적으로 선혜청으로 장터로 제공키로 하고 2,198원을 건설비로 제공했다. 선혜청의 장터가 바로 오늘날의 남대문시장이다. 한시적 장터로 삼았던 곳이 그대로 굳어져버린 것이다.

시장의 이전이 예상보다 공사비를 초과하자 400원을 추가해 장터를 정비했다. 또한 남대문로의 정비에 걸림돌이 되는 가옥들은 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가를 주고 구입했다. 장터가 마련되자 남대문로에 있던 노점과 임시 가건물을 모두 철거했다.

자료사진

정부가 당시 어려운 형편에도 이렇게 비용을 지불하면서 장터 이전을 계획했던 것은 상업의 발전을 통해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려는 개혁파들의 의지 때문이었다.

정확한 것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시전과 함께 칠패시장도 함께 선혜청으로 이전했을 가능성이 높다. 칠패시장이 있던 바로 뒤편에 경인선이 부설됐다. 결국 시장 이전은 경인선 부설을 위해서인 측면도 있었다.

선혜청으로 이전한 남대문시장은 초기에는 크게 활성화되지 못했다. 그것은 남대문로에 여전히 노점이 있어 어물전과 과일과 같은 물품을 판매했기 때문이다. 사람들도 선혜청 내로 들어가기보다는 길에서 물건을 구입했다. 이 때문에 선혜청 내의 상인들은 불만이 많았고 1900년에 선혜청 내의 상인들은 정부에서 정해진 것보다 많은 액수를 세금으로 걷는다고 호소했다.

선혜청 내의 시장은 당시 남문 내 장시, 남문안장, 또는 지역의 이름을 따서 신창안장이라고 불렸다. 아마 이 무렵부터 남대문시장이라는 이름이 생겼을 것으로 보인다. 남대문시장은 서서히 호황을 누리기 시작했고, 1911년 동대문시장과 함께 서울 최고의 시장으로 꼽혔다.

남대문시장의 번영에 짙은 그늘이 드리운 것은 일본이었다. 임오군란 이후 일본 상인들이 조금씩 들어와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또한 갑신정변 이후 일본공사관이 남산 산기슭에 자리를 잡으면서 일본인들의 주거지가 형성됐고, 자연스럽게 그들을 상대로 하는 점포가 생겨났다.

자료사진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점포는 남산동을 중심으로 진고개 일대로 퍼져나갔다. 1887년 수십 개의 상점이 문을 열었다. 이들은 석유와 방적사, 권련, 과자 등을 판매했고, 사금과 홍삼 등을 한국에서 구입해서 일본으로 수출했다.

호시탐탐 한국 시장으로 진입을 노리던 일본 상인들은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노골적으로 남대문 쪽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고구레(木暮直次郞)라는 일본 상인이 남대문로에 처음으로 잡화점을 개설했다. 이것이 신호탄이 돼 일본 상인들의 공습이 본격화됐다.

일본 상인들의 특징은 자본력이 뒷받침됐고, 또한 일본 정부의 정책적인 금융 지원과 자본력을 토대로 서울의 상권을 장악하려는 의도도 내재돼 있었다.

일본의 경제 침탈이 본격화된 것은 러일전쟁이 끝난 뒤였다. 일본은 1905년 1월에 경성역 앞에 수산시장을 건립해 영업을 개시했고, 1908년 5월에는 히노마루시장이 회현동에 건립됐다. 1909년 3월에는 용산수산주식회사가 세워져 생선과 어물을 전문적으로 판매했다.

이들은 모두 남대문시장과 가까운 곳이었고, 많이 거래됐던 것은 어물이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일제가 서울의 대표 시장인 남대문시장을 쇠퇴시켜 서울의 상권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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