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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야기 1] 서울, 궁궐로 빛나다 '창경궁'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1-05-15 23:04:39
  • 수정 2023-12-21 16: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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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사진-이승준 기자

[이승준 기자] 서울은 아름답고 활기찬 도시이다. 짧은 기간 동안 큰 성장을 이룬 최첨단 도시아면서도, 전통과 현대가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궁궐은 서울에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전통 문화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잘 보전된 문화유산이다.

600여 년 전에 개국한 조선 왕조는 서울을 수도로 정했다. 서울은 수려한 산에 둘러사여 있고 강과 하천이 흘러 사람이 생활하기에 관리하면서, 한반도의 중심에 자리 잡아 한 나라의 수도로서 적합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서울을 수도로 정한 뒤에는 곧바로 궁궐을 짓고 종묘와 사직을 세웠고, 도성과 성문 등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필요한 시설들을 마련했다. 서울은 이로부터 오늘날까지 600년이 넘게 우리나라의 중심도시가 되고 있다.

서울 도심에는 넓은 도로의 고층 빌딩이 가득하지만 백여 년 전만 해도 서울은 왕과 왕실 가족이 거처하는 궁궐을 중심으로 나라의 모든 활동이 이뤄지는 전통 도시였다. 최고의 인재와 물산이 궁궐과 왕실이 있는 서울로 모여 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서울에는 품격 있는 왕실 문화가 발달했다.

명정문/사진-이승준 기자

궁궐은 나라 경영의 중추가 되는 소중한 장소이다. 서울에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등 조선시대의 다섯 궁궐이 있다. 궁궐은 아니지만 왕실의 사당인 종묘도 조선 왕조의 정신적 근간으로서 궁궐 못지않게 중요시됐다. 이들 궁궐과 종묘는 한 나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소이기에, 당내 최고와 규모와 기술로 지어졌다. 창덕궁과 종묘는 전세계가 주목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조선 왕조는 예의와 도덕을 숭상하면서 이로써 나라의 질서를 바로잡고자 했고, 검소함을 소중하게 여겼다. 이러한 기본 정신은 궁궐 건축에도 잘 드러나 있다.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위엄이 있고 절제된 아름다움은 경복궁을 비롯한 여러 궁궐에서 만날 수 있는 미덕이다.

창경궁의 금천을 옥천이라 부른다. 이 옥천에 놓은 다리가 옥천교이다. 나쁜 기운이 궁궐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옥천교 무지개 사이에는 도깨비 얼굴을 새겼다.사진/이승준 기자 

궁궐은 우리 역사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 사건이 일어난 역사적 장소이자 왕과 왕실 사람들이 생활하면서 희로애락을 담아낸 삶의 공간이다. 궁궐이 전하는 역사, 인물, 건축, 자연 등 숱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 선조들이 오랜 역사와 삶 속에서 터득해낸 지혜와 슬기로움이 담겨있다.

언제 어느 때 찾아도 자연의 아름다움과 깊은 역사 전통의 향기를 전해주는 서울의 궁궐. 서울의 궁궐은 우리가 살아온, 또 오래도록 살아갈 터전 서울을 가장 서울답게 하는 자랑이요, 힘이다.

# 왕이 이야기 듣는 ‘창경궁’

창경궁은 경복궁, 창덕궁에 이어 세 번째로 지어진 조선시대 궁궐로, 조선 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경복궁을 법궁으로, 창덕궁은 보조 궁궐로 사용하는 양궐 체제를 이어왔다. 그러나 역대 왕들은 경복궁보다는 창덕궁에 거처하는 것을 더 좋아했고, 왕실 가족이 늘어나면서 차츰 창덕궁의 생활 공간도 비좁아졌다. 이에 성종이 왕실의 웃어른인 세조 비 정희왕후, 예종 비 안순왕후, 덕종 비 소혜왕후 등 세 분의 대비가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창덕궁 이웃에 마련한 궁궐이 창경궁이다.

숭문당/숭문당은 명정전의 후전에 해당하는 건물로, 임금이 싱화들과 경연을 열어 정사와 학문을 토론하던 곳으로 1830년 다시세웠다. 앞쪽에 설치한 누각형 툇마루로 출입했고, 영조 임금의 친필 현판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사진-이승준 기자

창경궁은 왕이 정사를 돌보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생활 공간을 넓힐 목적으로 세워졌고, 또한 애초 궁궐로서 계획된 것이 아니라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살았던 수강궁에 몇몇 전각을 보태어 세운 궁궐이다. 따라서 경복궁이나 창덕궁과 비교할 때 그 규모나 배치 등에 다른 점이 많다.

우선 창경궁은 전각의 수가 많지 않고 규모가 아담하다. 공간의 구조와 배치도 경복궁처럼 평지에 일직선의 축을 이루도록 구획된 것이 아니라 창덕궁처럼 높고 낮은 자세를 거스르지 않고 언덕과 평지를 따라가면서 터를 잡아 필요한 전각을 지었기에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이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은 자경전도 언덕에 지어졌다.

함인정/함인정은 명정전의 후전에 해당하는 건물로, 함인정은 문무 과거에 급제한 신하들을 접견하던 곳으로, 1833년에 다시 세웠다. '세상이 임금의 어짊과 의로움에 흠뻑 젓는다'는 건물 이름의 뜻을 상징하듯, 사방이 터진 개방형 건물이다./사진-이승준 기자

창경궁의 또 다른 독특함은 조선시대 다른 궁궐과 주요 전각들이 남향으로 지어진 것과 달리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점이다. 창경궁의 경우 정문인 홍화문과 정전인 명정전은 동쪽을 향하고, 관청 건물인 궐내각사와 내전의 주요 전각들은 남쪽을 향해 있다. 남.서.북쪽이 구릉이고, 동쪽이 평지인 지세라서 이를 거스르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왕실 가족의 생활 공간으로 발전해온 궁궐이기에 내전이 외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넓은 것도 창경궁의 특색이다. 따라서 창경궁에는 왕들의 지극한 효심과 사랑, 왕과 세자의 애증, 왕비와 후궁의 갈등 등 왕실 가족 사이에 일어난 이야기도 풍부하게 전해온다. 

문정전/문정전은 임금이 신하들과 회의를 열고, 국가정책의 의견을 나누던 창경궁의 편전(딥무실)으로, 동향인 명정전과 달리 남향 건물이다. 편전이면서도 왕실의 혼전(죽은 사람들의 이름 등을 적은 신주를 모시는 곳)으로도 자주 쓰였다. 아버지 영조의 손에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비극도 문정전이 혼전으로 쓰이던 것과 관련이 있다. 문정전 일원은 일제 강점기 때 훼손됐고, 1986년에 건물을 다시 세웠으나, 서쪽에 있던 담장과 화계 정원은 아직 다시 짓지 못하고 있다. /사진-이승준 기자

세간에 널리 알려진 장희빈과 인현왕후,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도 사건이 일어난 현장인 창경궁에서 들으면 더 생생하게 들린다.

창덕궁과 함께 ‘동궐’로 불렸던 창경궁은 서쪽으로 창덕궁과 맞닿아 있고, 남쪽으로는 낮은 언덕을 지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와 이어져 본래 한 영역을 이뤘다.

# 왕과 신하와 백성이 교감하는 ‘외전’

창경궁은 왕실의 웃어른을 편안히 모시기 위한 궁궐로 지었기 때문에 정치 공간인 외전보다는생활 공간인 내전이 더 넓고 발달했다. 창경궁의 외전은 다른 궁궐과 달리 동쪽을 바라보고 있고, 규모도 아담하고, 조정에 이르는 문의 수도 적다.

명정전/사진-이승준 기자

명정전은 임진왜란 후 광해군이 창경궁을 중건할 때 지은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단층 지붕에 아담한 규모이지만, 궁궐의 정전가운데에서는 가장 오래됐다. 명정전 주위에는 왕이 일상 업무를 보았던 문정전, 독서하거나 국사를 논하던 숭문당이 자리 잡고 있다. 창경궁 외전이 전체적으로 동향한 것과 달리 문정전은 남향하고 있다.

왕의 혼례는 중요한 국가 행사 중 하나였다. 정전인 명정전에서는 66세의 영조가 15세의 정숭왕후를 맞는 가례식이 치러지기도 했다. 영조와 정순왕후의 가례식은 ‘영조정숭왕후가례도감의궤’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영춘헌과 집복현/ 이 일대는 생활 공간이 밀집된 영역이었다. 집복현은 후궁의 생활공간이었다. 현재 집복현은 마치 영춘헌의 서쪽 행각처럼 붙어 있으나 원래는 두 집으로 분리돼 있었다. 1834년에 다시 세우면서 지금까지 바뀐 것으로 보인다. 사도세자와 순조가 집복현에서 탄생했다. 정조는 영춘헌에서 독서를 즐겼고 이 곳에서 돌아가셨다. 이 건물의 동쪽에 궁녀들의 생활공간으로 추정되는 건물들이 많았으나, 지금은 빈터이다./사진-이승준 기자

모든 궁궐 마당에는 시냇물이 흐른다. 법전이 있는 궁궐의 안쪽과 외부의 공간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고, 궁궐 뒤의 산과 짝을 이뤄 좋은 운을 불러들이는 길지가 되라고 궁궐 앞쪽에 일부러 낸 물길이다. 이를 ‘금천’이라 부른다. 창경궁의 금천은 옥천이라 부르는데, 이 옥천에 놓은 다리가 옥천교이다. 나쁜 기운이 궁궐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옥천교 무지개 사이에는 도깨비 얼굴을 새겼다. 앵두나무, 자두나무, 살구나무 등이 활짝 피는 옥천교 주변의 봄 풍광이 매우 화사하다.

조선시대에 왕이 백성을 만나는 일은 흔치 않았다. 그러나 창경궁 홍화문 앞에서는 달랐다. 홍화문 앞에서 영조는 균역법에 대하 찬반여부를 백성에게 직접 물었고, 효심 깊으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해 백성에게 손수 쌀을 나눠 주면서 기쁨을 함께 했다.

# 왕실 여성의 친숙한 공간 ‘내전’

통명전과 양화당/통명전(보물 818호)은 1834년에 다시 세운 일상 생활공간인 내전의 중심 건물답게 넓은 월대를 쌓고지붕 가운데 용마루가 없다. 가운데 세칸은 대청마루를 두고 양 옆에 온돌방을 두어 왕과 왕비의 침실로 썼다. 서쪽 마당에는 동그람 샘과 네모난 연못이 있고, 그 사이의 물길을 돌로 공들여 만든 정원이 있다. 1834년에 다시 지은 양화당은 대비의 침전이지만,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던 인조 임금이 돌아와 거처하기도 했다. 옆에 보이는 건물이 양화당이다./사진-이승준 기자

창경궁은 성종의 효심으로 탄생한 궁궐이다. 성종은 세조의 맏아들은 의경세자의 둘째아들로 작은아버지인 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당시 13세로 나이가 어려성년이 될 때까지 할머니인 세조 비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창경궁은 왕실의 웃어른으로 할머니인 세조 비 정희왕후, 어머니인 덕종 비 소혜왕후, 작은어머니인 예종 비 안순왕후 등 세 분 대비를 모시게 된 성종이 이들을 위해 마련한 궁궐이다.

왕비의 침전인 통명전은 내전의 중심 공간으로 규모가 크다. 전각 옆에 돌난간을 두른 네모난 연지와 둥근 샘이 있고, 뒤뜰에는 꽃계단이 마련돼 주변 장관이 아름답다. 희빈 장씨가 통명전 일대에 흉물을 묻어 숙종 비 인현왕후를 저주했다가 사약을 받은 이야기가 유명하다.

경춘전/경춘전은 대비의 일상 생활공간인 침전이다. 경춘전은 1834년에 다시 세웠고, 원래는 각기 행각을 두른 독립된 영역을 가졌었다. 경춘전은 산실청(왕비와 세자빈의 출산을 위해 임시로 설치한 관청)으로도 쓰여 정조와 헌종이 이 곳에서 탄생했다. 정조는 본인의 탄생을 기념해 내부에 '誕生殿(탄생전)'이라고 친히 쓴 현판을 걸었다. 건물 내부에 있는 경춘전 현판은 순조 임금의 솜씨이다./사진-이승준 기자

통명전을 중심으로 한 내전 영역에는 대비, 세자빈, 후궁들의 처소로 쓰인 여러 전각이 모여 있다. 경춘전은 정조와 헌종이 태어난 곳이고,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정조는 후궁 수빈 박씨 사이에서 아들 순조를 낳았고, 순조가 태어난 집복현에서 순조의 돌잔치를 열었다. 특히 집복헌은 순조의 탄생, 돌잔치, 관례, 책례 등이 모두 이뤄져, 순조와 그 인연이 매우 깊다. 창경궁 내전은 이처럼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왕실의 희로애락이 깃든 이야기를 풍부히 전해준다.

# 도시 새의 보금자리 ‘춘당지’

춘당지/사진-이승준 기자

창경궁은 창덕궁과 별개의 공간이 아니었으므로 창덕궁의 후원을 함께 이용했다.

본래 춘당지는 활을 쏘고 과거를 보던 춘당대(창덕궁) 앞 너른 터에 자리했던 작은 연못(지금의 소춘당지)이다. 지금의 춘당지에는 백성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왕이 직접 농사를 지었던 ‘내농포’라는 논이 있었다. 일제가 이를 파헤쳐서 큰 연못으로 만들었고, 1983년 이후에 전통 양식의 연못으로 새롭게 조성한 곳이 오늘날의 춘당지이다. 춘당지는 서울 도심에 흔치 않은 넓은 연못으로, 주변의 숲도 울창해 많은 새의 보금자리가 되고 있다. 천연기념물인 원앙도 춘당지 주변에서 볼 수 있다.

사진-이승준 기자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건너편의 함춘원에 있던 수은묘(사도세자의 사당)를 경모궁으로 고쳐짓고, 경모궁이 잘 보이는 궁궐 내 언덕에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자경전을 지었다.

통명전 뒤쪽이 자경전 터이다. 정조는 경모궁을 수시로 참배했고, 경모궁으로 이동할 때 번거롭지 않도록 홍화문 북쪽에 담장을 헐고 월근문을 냈다. 눈길을 끌지 않는 문이지만 조선 후기 ‘문예 부흥’과 혁신 정치를 이끈 정조의 깊은 내면, 효심으로 생겨난 궁궐 공간이다.

# 근대문화유산으로 만나는 ‘대온실’

대온실/대온실은 1909년에 완공해 식물원으로 공개된 건물로, 목조로 된 가느다란 뼈대로 뾰족아치와 창틀을 만들고 유리를 끼웠다. 전체적인 모습은 당시 서양에서 유행했던 수정궁류의 근대 건물을 연상싴키지만, 지붕 용마루에 조선왕실의 문양인 오얏골을 반복해 장식했다. 대온실 앞에는 르네상스풍의 분수와 미로식 정원도 함께 조성했다./사진-이승준 기자

창경궁 대온실은 1909년 건축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로, 건축의 뼈대는 목재와 철재로 이뤄져 있고, 외피는 온통 유리로 덮여 있다. 당시 새로운 건축 재료였던 철과 유리로 지은 대온실의 외관은 대부분이 고풍스러운 목조 전각인 궁궐 안에서 예나 지금이나 매우 이색적이다.

이제는 1907년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겨온 것과 대를 맞춰 창경궁이 전각들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었고, 1919년 일반에 개방했다.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이었지만, 그 목적이 궁궐의 권위를 격하시켰다.

대온실은 일제의 불순한 의도 아래 훼손된 창경궁의 일면을 보여주는 건축물이지만, 건축된 지 이미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그 자체가 역사적 가치와 건축적 의미를 지닌 근대의 문화유산으로 새롭게 자리매김되고 있다. 창경원 대온실은 근대문화유산의 의미를 가진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팔각칠층석탑/팔각칠층석탑은 기단부는 4각형 받침돌과8면에 안상을 새긴 2단 고임돌과 8면에 안상과 꽃은 새긴 연화대좌로 구성했다. 7층의 탑신부는 기와지붕건물 모양이고 1층은 연화좌 위에 높고 볼록한 몸돌을 얹었다. 꼭대기에는 흰 돌로 만든 보주 장식을 올렸다. 1층 몸돌에 새겨진 '성화(成化) 6년'이란 글씨를 근거로 1470년(조선 성종1)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사진-이승준 기자 
관천대/관천대는 1688년 축조된 창경궁 관천대(보물 851호)는 대 위에 소간의를 설치해 전체를 관측했던 시설이다. 계단과 난간만으로 구성된 건축물로 간결하고 힘찬 조형미가 느껴진다. 일제 강점기에 다른 곳으로 옮겨졌던 것을 창경궁 정비 사업 때 제자리로 옮겨왔다. 이보다 조금 북쪽으로 보루각터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던 자격루를 두었다/사진-이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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