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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야기 2] 기쁨이 넘치고 빛나는 궁 ‘경희궁’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1-05-16 19:53:48
  • 수정 2023-12-21 16: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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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화문(興化門)/흥화문은 경희궁의 정문으로, 원래 경희궁으로 들어가는 문은 5개로, 정문인 흥화문 외에도 동쪽에는 흥원문, 서쪽에 숭의문, 남쪽에 개양문, 북쪽에는 무덕문이 있었다. 창건 당시 경희궁은 창경궁의 제도를 따라서 규모를 작게 해 정문도 단층으로 세웠다. 경희궁 근처 얕은 고개를 ‘야주개’라 했다. 이는 흥화문의 현판 글씨가 명필이라 밤에도 빛나 그 광채가 고개까지 훤하게 비추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사진-이승준 기자

[이승준 기자] 경희궁(慶熙宮)은 광해군 때인 1617년에 짓기 시작해 1620년에 완성했다. 처음에는 경덕궁(慶德宮)이라 불렀지만 언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발음이 같아 경희궁으로 바뀌었다. 또한 도성 서쪽에 있어 서궐(西闕)이라고 하는데, 이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동궐(東闕)이라고 불렀던 것과 대비되는 별칭이다.

경희궁의 대지의 형세를 반영한 특이한 형태의 궁궐이다. 광해군은 빨리 짓기 위해 대지의 경계를 정하고 공사를 시작한 탓에 땅의 모양이 동서로 길고, 건물도 외전과 내전이 좌우로 배치됐다. 

경희궁과 금천교/경희궁은 조선 후기 왕들이 임시로 거쳐했던 이궁(離宮)으로, 1617년(광해군 9)에 창건해 1620년(광해 12)에 완공했다. 처음에는 경덕궁(慶德宮)이라 했으나, 1760년(영조 36)에 경희궁으로 고쳐 불렀고, 도성의 서쪽에 있다하여 서궐(西闕)이라고도 했다. 경희궁에는 숙종, 영조 임금이 오랫동안 머물렀다. 특히 영조는 경희궁에 대한 글과 글씨를 많이 남겼고, 이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금천교는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興化門) 안에 흐르던 금천(禁川)에 놓여 있던 다리로 1618년 (광해군 10)에 경희궁을 조성하면서 설치했다. 금천교는 홍예교로 두 개의 아치로 구성돼 있다. 난간의 돌짐승이나 홍예 사이에 새겨진 도깨비 얼굴은 대궐 바깥의 나쁜기운이 궁궐 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상징적인 역할을 한다. 금천교는 일제강점기 때 이곳에 경성중학교가 설립되면서 땅에 묻혔으나 서울역사박물관 건립과 함께 발견된 옛 석조물을 바탕으로 2001년에 복원됐다. 사진은 서울역사박물관 앞에 있다. /사진[이승준 기자 

# 경희궁 사람들

‘서궐도안’에서 볼 수 있는 전각과 문은 약 190여 개이며, 정문인 홍화문은 남향이 아니라 종로와 마주 보는 동쪽을 향하고 있다.

경희궁은 인제강점기에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건물 대부분이 헐렸고, 면적도 절반 정도로 줄어들어 궁궐의 모습과 위상을 잃었다. 현재는 경희궁지 발굴을 거쳐 정전인 승정전과 자정전, 태령전 세 전각이 복원돼 있다.

경희궁에서 살았던 왕은 인조에서 철종까지 10명에 이른다. 그 가운데 가장 오래 머물렀던 숙종은 이곳에서 태어나고 이 곳에서 승하했다. 1625년 경현당에서 행해진 소현세자 관례를 시작으로 경종과 정조가 이곳에서 즉위했고, 숙종과 헌종의 가례가 치러졌고, 숙종을 비롯해 영조와 숭조 등이 이곳에서 승하했다. 숙종부터 정조 즉위까지 경희궁은 최전성기였고, 왕을 비롯해 왕비와 후궁 등이 생활한 일상공간이었다. 인현왕후, 희빈 장씨, 혜경궁 홍씨도 경회궁에서 살았던 대표적인 왕족이다.

사진/이승준 기자

# 경희궁지(사적 제271호)

이 곳은 조선 시대의 5대 궁궐 가운데 하나인 경희궁 터다. 경희궁은 광해군 때 창건돼 고종에 이르기까지 조선 후기의 중요한 궁궐이었다. 창건 당시에는 한때 경희궁으로 부른 것으로 부른 것으로도 보이지만 줄곧 경덕궁이라 했고, 영조 이후에 경희궁으로 명명됐다. 또 경복궁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동궐이라 불렀다. 이 말과 짝을 이뤄 경희궁을 서궐이라고도 했다.원래 경희궁에는 정전인 숭정전과 편전인 자정전 외에도, 수많은 전각들이 지형에 맞게 배치돼 있었다. 1820년대 무렵에 제작됐다고 추정하는 ‘서궐도안’을 보면 그 규모와 구성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전각들을 대부분경복궁으로 옮겨서 재사용했고,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로 소유가 넘어가 경성중학교와 관사 등이 세워지면서 궁궐로서의 위상이 훼손됐다. 또한 궁궐 영역도 많이 축소됐으나, 지속적인 발굴조사와 연구를 통해 숭정전 일곽과 몇몇 전각들을 복원해 현재가 이르고 있다.

# 흥화문(興化門)

흥화문은 현재의 지금의 구세군회관 빌딩 자리에서 동쪽인 종로를 향하게 지었으나, 일제강점기 들어 1915년에 도로가 확장됨에 따라 흥화문은 원래 위치에서 약간 뒤로 옮겨지면서 문의 방향도 도로와 나란하게 남향으로 바귀었다. 1932년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찰인 박문사(博文寺)로 옮겨 정문으로 사용했다. 광복 이후 박문사 터에 차례로 들어선 영빈관과 신라호텔의 정문으로 쓰다가, 1988년 옛 개양문이 있던 자리로 옮기면서 궁궐 정문으로서의 역사성을 되살리고자 했다./사진-이승준 기자

흥화문은 경희궁의 정문으로, 원래 경희궁으로 들어가는 문은 5개로, 정문인 흥화문 외에도 동쪽에는 흥원문, 서쪽에 숭의문, 남쪽에 개양문, 북쪽에는 무덕문이 있었다. 창건 당시 경희궁은 창경궁의 제도를 따라서 규모를 작게 해 정문도 단층으로 세웠다.

경희궁 근처 얕은 고개를 ‘야주개’라 했다. 이는 흥화문의 현판 글씨가 명필이라 밤에도 빛나 그 광채가 고개까지 훤하게 비추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흥화문은 현재의 지금의 구세군회관 빌딩 자리에서 동쪽인 종로를 향하게 지었으나, 일제강점기 들어 1915년에 도로가 확장됨에 따라 흥화문은 원래 위치에서 약간 뒤로 옮겨지면서 문의 방향도 도로와 나란하게 남향으로 바귀었다. 1932년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찰인 박문사(博文寺)로 옮겨 정문으로 사용했다. 광복 이후 박문사 터에 차례로 들어선 영빈관과 신라호텔의 정문으로 쓰다가, 1988년 옛 개양문이 있던 자리로 옮기면서 궁궐 정문으로서의 역사성을 되살리고자 했다.

# 숭정전(崇政殿)

숭정전(崇政殿)/경희궁의 정전(正殿)으로, 경희궁 창건 공사 초기인 1618년(9광해군 10)경에 건립됐다. 국왕이 신하들과 조회(朝會), 사신 접대 등 공식 행사가 행해졌던 곳이다

경희궁의 정전(正殿)으로, 경희궁 창건 공사 초기인 1618년(9광해군 10)경에 건립됐다. 국왕이 신하들과 조회(朝會), 사신 접대 등 공식 행사가 행해졌던 곳이다. 특히 경종, 정조, 헌정 세 임금의 즉위식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됐다. 

사진/이승준 기자 

그러나 일제가 경희궁을 훼손하면서 1926년 승정전 건물을 인본인 사찰에 팔았는데, 현재는 동국대학교 정각원(正覺院)으로 남아 있다. 현 위치의 숭정전은 복원한 건물이다.

# 자정전(資政殿)

자정문/사진-이승준 기자

경희궁의 편전(便殿)으로, 1617-20년(광해군 9-12) 사이에 건립됐다. 국왕이 신하들과 회의를 하거나 경연을 여는 등 공무를 수행하던 곳이다. 숙종이 승하했을 때 빈전(殯殿)으로 사용됐고, 선왕의 어진(御眞)이나 위패를 임시로 보관하기도 했다. 

자정전/경희궁의 편전(便殿)으로, 1617-20년(광해군 9-12) 사이에 건립됐다. 국왕이 신하들과 회의를 하거나 경연을 여는 등 공무를 수행하던 곳이다. 숙종이 승하했을 때 빈전(殯殿)으로 사용됐고, 선왕의 어진(御眞)이나 위패를 임시로 보관하기도 했다. 사진-이승준 기자

일제가 헐어냈던 것을 서울시에서 발굴해 확인한 자리에 ‘서궐도안’에 따라 현재의 건물을 복원했다.

# 태령전(泰寧殿)

태령전(泰寧殿)/영조의 어진(御眞:초상화)를 보관하던 곳으로, 본래 특별한 용도가 정해져 있지 않았던 건물이다. 그러나 1744년(영조 20) 영조 어진이 완성되자 태령정을 중수해 그곳에 보관했다. 일제에 의해 흔적도 없이 파괴됐지만, 2000년 ‘서궐도안’에 따라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로 복원했다. 현판은 석봉 한호의 글씨를 집자해 만들었다./사진-이승준 기자 

영조의 어진(御眞:초상화)를 보관하던 곳으로, 본래 특별한 용도가 정해져 있지 않았던 건물이다. 그러나 1744년(영조 20) 영조 어진이 완성되자 태령전을 중수해 그곳에 보관했다. 

태령전에 보관중인 영조의 어진/사진-이승준 기자 

일제에 의해 흔적도 없이 파괴됐지만, 2000년 ‘서궐도안’에 따라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로 복원했다. 현판은 석봉 한호의 글씨를 집자해 만들었다.

# 서암(瑞巖)

서암(瑞巖)/태령전 뒤에 있는 기이한 모양의 바위로, 암천(巖泉)으로 불리는 바위 속의 샘이 있어 예로부터 경희궁의 명물이었다./사진-이승준 기자 

태령전 뒤에 있는 기이한 모양의 바위로, 암천(巖泉)으로 불리는 바위 속의 샘이 있어 예로부터 경희궁의 명물이었다. 본래 왕암(王巖)이라고 불리었다. 

서암/유백색의 석회질 대리암에 새겨진 숙종대왕 어필. 새겨진 내용은 "광해가 왕암이라는 말을 듣고 여기에 궁을 세웠는데 인조대왕이 반정하셨고 계사년 이후로는 이 궁에 임어 하였다. 숙종무자년49(1708년)에 이르러 이름을 서암으로 고치고 어필로 서암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사방석에 새기고 오른쪽 곁에는 새기기를 속칭이 왕암인데 바로 상서로움을 징험한다라고 하였는데 역시 어필이었다"고 기록돼 있다./사진 출처-서울역사박물관 

그 이름 때문에 광해군이 그 곳에 경희궁을 짓게 됐다는 설도 있다. 1708년(숙종 34)숙종 때 이름을 서암으로 바꾸고 숙종이 직접 ‘瑞巖.이라고 새겨 두게 했다. 현재 서암에 새겨 사방석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암천(巖泉)으로 불리는 바위 속의 샘이 예로부터 경희궁의 명물이다/사진-이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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