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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37] 사이토 마코토 신임총독 부임 행렬에 폭탄 던진 강우규...'강우규 터'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1-06-07 10:56:10
  • 수정 2024-03-14 05:5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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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앞에 있는 강우규 의사 동상/사진-박광준 기자

[박광준 기자] 강우규(강우규)의사께서 1919년 9월2일 사이또 신임 일본 총독 일행에게 폭탄을 던져 항일의거를 일으킨 곳(당시 남대문역)이다. 일제의 사형선고로 1920년 11월 29일 순국했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고 몇 개월이 지난 후에 강우규 의사가 사이토 마코토 신임 총독에게 폭탄을 던졌다. 강우규 의사는 1885년 함경남도 홍원(덕천) 출신으로,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멸망한 후 가솔을 이끌고 북간도로 건너가, 한인촌을 건설하고 학교를 세우는 등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3.1독립운동 직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노인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의 일익을 담당했다.


신임 총독이 부임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강 의사는 러시아로부터 영국제 폭탄을 구입하고, 1919년 6월 11일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 8월 4일 서울에 도착했다. 그리고 9월 2일에 거사했다. 의거 당일 강 의사는 폭탄을 명주수건에 싸서 허리춤에 차고, 두루마기 차림에 파나마 모자, 가죽신, 양산, 수건등을 갖추고 환영나온 군중틈에 섞여 있었다. 


강우규 동상 앞에 적혀있는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강우규 의사가 순국 직전에 남긴 유시/사진-박광준 기자

당시 나이가 64세였던 강 의사는 의심을 받지 않고 군중틈에 있을 수 있었다. 강 의사는 신임 사이토 총독이 역에서 나와 막 차에 오르려는 순간 폭탄 세례를 퍼부었다. 6~7m 떨어진 거리였다. 노령인 그의 일격은 자동차까지 도착하지 못한 채 폭발해 버렸다. 그리고 폭탄의 위력도 강하지 못했다. 사이토는 무사했으나 경비하고 있던 일본인과 그 앞잡이 3명이 죽고, 34명이 부상을 당했다. 


거사 뒤 현장에서 유유히 빠져나와서 오태영(吳泰泳)의 소개로 장익규(張翊奎).임승화(林昇華) 등의 집을 숨어다니다가, 9월 17일 일제의 앞잡이 김태석(金泰錫)에게 붙잡혔다.


1920년 3월 경성지방법원 1회공판 당시 최자남.허형.오태영 등이 공범으로 피수됐고, 그는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했다.


강우규 의사상에 새겨진 의사의 약사/사진-박광준 기자

순국 직전 “단두대 위에도 봄바람은 있는데, 몸은 있어도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라는 사세시(辭世詩)를 남겼다.


유해는 광복 뒤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감옥공동묘지로부터 서울 우이동으로 이장했다가, 다시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치됐다.


1962년 3월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3.1운동 직후 사이토 일본 총독에게 폭탄을 던졌던 강우규 의사는 일본 경찰의 취조를 받으면서도 당당하게 독립연설을 했다.


강우규 동상/사진-박광준 기자아사히 신문이 공개한 조선총독부 관리들 증언록에는 강 의사를 직접 취조했던 당시 경기도 경찰부장 지바 료의 증언이 있다. 지바 료는 ‘당시 경찰은 명예를 걸고 사건을 수사했다’ 고 말하면서도 ‘그가 밉다는 감정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는 역시 우국지사였다’ 고 증언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사건 15일 뒤 연행돼 온 강 의사는 취조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탁자를 두드리면서 독립 연설을 시작했다. 강 의사는 연설 중 ‘물을 줄 수 없느냐’고 해서 물을 받아 마신 뒤, 다시 탁자를 두드리며 약 1시간 동안 연설을 계속했다고 한다. 


지바 료는 "폭탄범이 현장에서 당당히 돌아가는 모습을 본 급사가 급히 신고하였다. 급사는 당시 조선인이었던 순사에게 범인도 조선인이다라고 했지만 그 순사는 못들은 체 하고는 나가 버렸다"면서 사건 당시 한국계 순사들의 분위기를 전하기도 했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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