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궁궐이야기 6] 현재의 '경복궁'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1-07-13 10:40:53
  • 수정 2024-03-23 01:34:50

기사수정


광화문(光化門)/사진-이승준 기자

경복궁 안에서 바라본 광화문/사진-이승준 기자

전편에 이어,


[이승준 기자] 경복궁의 정문. 1395년(태조 4년) 처음 지어질 때는 사정문(四正門)이라 했다가 1425년(세종 7년) 광화문으로 개칭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그대로 방치됐다가 1864년(고종 1년) 중건했으나,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짓기 위해 1927년 건춘문 북쪽으로 이건한 후 6.25 전쟁을 거치면서 문루가 소실됐다. 이후 복원 공사에 들어가 1968년 12월 11일 준공했지만 원자리에서 조금 벗어나 있고 철근 콘크리트 구조라는 한계 때문에 2006년부터 다시 이전·복원 공사에 착수해 2010년 8월 15일 준공했다.


해태상/사진-이승준 기자

광화문 양옆에서 남쪽을 바라보면서 앉아 있는 석물 한 쌍은 흔히 해태라 불리는 해치상(獬豸像)이다. 해치는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석공 이세욱의 솜씨로 탄생한 것으로, 원래 놓였던 자리는 광화문 앞 80~90m 지점, 당시의 사헌부 앞, 오늘날의 정부종합청사 정문 근처와 길 건너 맞은편이었다.


1923년 10월, 총독부 건물의 외형이 갖춰지면서 해치상은 어느날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1925년에야 사라진 해치상이 총독부 청사 서편 담장 밑에 방치된 것으로 확인됐다. 해치상은 총독부 건물 완공 후 다시 청사 앞으로 옮겨졌고 해방 후 광화문이 복원되면서 지금의 자리에 앉아 있게 됐다.


건춘문(建春門)


경복궁의 동문.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가 있고, 왕족.외척.상궁들이 출입하던 문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흥선대원군이 중건하면서 1865년(고종 2년) 12월 25일 상량했다. 여담으로 봄(春)과 동쪽(東)은 예로부터 세자를 뜻하는 말이었다. 건춘문 근처에 동궁전이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영추문(迎秋門)


경복궁의 서문. 연추문(延秋門)이라고도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가 있고, 일반 관원들이 출입하던 문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흥선대원군이 중건하면서 1865년(고종 2년) 10월 25일 상량했다. 1926년 4월 27일 궁성 주변에 부설된 전차의 진동으로 인해 무너졌다가 1975년 원 자리에서 40m 내려간 남쪽에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됐다. 2018년 12월 6일에 43년 만에 개방했다.


신무문(神武門)


경복궁의 북문. 태조가 창건할 때는 없었으나 1443년(세종 15년) 궁성의 사대문을 맞추기 위해 건설했다. 다만 풍수지리적인 문제 때문에 자주 닫혀 있었다. 조선 시대에는 신무문 바깥으로 경복궁의 후원과 연결됐지만 청와대가 들어선 다음부터는 경호 문제로 비공개됐다가 2007년 9월 29일 건청궁 복원 공사 완료에 맞춰 45년 만에 민간인에게 개방했다.


동십자각(東十字閣)/사진-이승준 기자

궁성을 수비하는 망루로서는 경복궁에 현존하는 유일한 전각. 7단으로 이뤄진 장대석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이 세워져 있다. 1867년(고종 4년) 지어졌으나 1924년 도로를 확장할 때 궁장을 헐면서 길 한복판에 섬처럼 놓이게 됐다. 광화문과 남쪽 궁장을 복원하면서 일제 때 헐려나간 궁장을 동십자각과 연결하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교통 문제 때문인지 실현되지는 않았다. 참고로 서쪽 맞은편에 있던 서십자각은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지을 때 철거되었는데, 이쪽은 복원하지 않고 남쪽 궁장을 서쪽 궁장과 맞바로 연결해버렸다.


흥례문(興禮門)/사진-이승준 기자

광화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펼쳐져 있는데, 이곳에는 1995년까지 일제의 조선총독부 건물이 있었는데, 해방 이후 정부종합청사와 국립중앙박물관의 용도로 쓰이다가 광복 50주년을 기념해 1996년에 철거됐다. 그 자리에 일제에 의해 헐려나갔던 흥례문(興禮門)과 행각을 비롯한 영제교(永濟橋), 유화문(維和門), 기별청(奇別廳)이 1996년부터 2001년 10월에 걸쳐 복원됐다.


1996년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된 후 그 자리에 사라진 지 85년 만에 제 모습을 찾아 다시 지어진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건물이다. 건립 초기에는 홍례문(弘禮門)으로 불렸으나 고종 때 재건하면서 흥례문(興禮門)으로 바뀌었다.


마당 북쪽 정면으로 보이는 건물이 흥례문과 행각이다. 흥례문은 외전인 근정전으로 들어가는 첫번째 문이다. 경복궁 창건 당시 지어졌던 건물로, 임진왜란 이전 시기에 제작된 '경복궁전도'에 주변 행각 없이 문만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아 흥례문 일곽의 행각은 고종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사라진 지 85년 만에 제 모습을 찾은 흥례문은 이익공 겹처마에 우진각 지붕을 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건물이다.


영제교/사진-이승준 기자흥례문을 지나면 바로 영제교가 눈에 들어온다. 궁궐 안에서 법전(法殿)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물길이 흐른다. 이것은 풍수사상에서 말하는 배산임수(背山臨水) 조건을 갖추기 위해 명당수(明堂水)가 되는 금천(禁川)을 파는 데서 비롯됐다. 여기에 놓이는 다리를 금천교(禁川橋)라 이른다. 


영제교는 바로 경복궁의 금천교이다. 태종 11년(1411) 무렵 창건돼 세종 8년(1426) 영제교라 명명된 이 다리는 1926년 일제에 의해 수정전 앞뜰로 옮겨졌다가 1974년 이후 다시 근정전 동쪽으로 옮겨졌었다. 2001년 10월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영제교 좌우 사방에는 네 마리의 서수(瑞獸)가 놓여 있다/사진-이승준 기자영제교 좌우 사방에는 네 마리의 서수(瑞獸)가 놓여 있다. 이들은 벽사(辟邪)의 능력을 지녔다는 이른바 천록(天鹿)으로, 이들 상상의 짐승은 물길을 따라 들어올지도 모를 사악한 기운을 물리쳐 법전의 신성함을 유지한다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영제교를 건너면 왼쪽에 있는 유화문/사진-이승준 기자

영제교를 건너면 왼쪽으로 유화문이 있다. 유화문은 궁궐 안에 있던 각급 관청, 곧 궐내각사로 통하는 문이었다. 궐내각사에는 춘추관(春秋館), 승정원(承政院),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교서관(校書館), 승문원(承文院) 등 학문을 통해 국왕을 보좌하는 정치 행정업무를 담당했던 기관과, 왕과 왕실의 생활을 보필하는 내반원(內班院), 상서원(尙瑞院), 사도시(司導寺), 상의원(尙衣院), 내의원(內醫院), 사옹원(司饔院), 전설사(典設司), 그리고 천문과 시각을 관측하는 기관들이나 경비 업무를 맡아보던 군무관서 등이 역할과 업무에 맡게 빼곡히 자리잡고 있었다. 


궐내각사 영역은 일제에 의해 모두 헐려나가고 지금은 공터로 남아 있다.


근정문(勤政門)/사진-이승준 기자

경복궁의 법전인 근정전(勤政殿)은 동서가 짧고 남북이 긴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다. 사방의 회랑 중간에는 문이 하나씩 있어서 정전으로 향하는 통로 구실을 한다. 남쪽의 근정문(勤政門) 북쪽의 사정문(思政門) 동쪽의 융문루(隆文樓) 서쪽의 융무루(隆武樓)가 바로 이들이다. 그중 근정문은 근정전의 정면 남쪽에 위치한 법전의 주 출입문으로 근정전의 정문이 된다. 1395년 경복궁이 창건될 때 함께 세워졌으나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것을 고종 4년(1867)에 중건했다.


근정문은 근정전과 함께 왕위 즉위식을 비롯한 왕실의 행사가 치러지던 곳으로, 왕이 승하하면 왕세자는 근정문에서 즉위식을 하고 근정전의 옥좌에 오르곤 했다. 근정문에서 즉위식을 치른 역대 국왕으로는 단종(1452), 성종(1469), 명종(1545)이 있으나, 나라를 잃고 조선총독부 건물이 들어서면서부터 근정문은 즉위식은 고사하고 문으로서의 기능조차 상실한 채 오늘에 이르다 근래에 복원됐다. 


근정전 전경/사진-이승준 기자근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 중층 우진각지붕을 한 다포식 건물이다. 궁궐의 법전 정문 가운데 유일한 2층 누문으로, 화강암으로 기단을 낮게 꾸미고 여기에 세 벌의 계단을 설치했다. 


근정문과 근정전 영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동서와 남북으로 각각 대칭을 이루면서 사방으로 둘려 있는 행각이다. 행각은 통로 기능이 주된 역할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칸을 막아 공간으로도 활용됐다. 법전인 근정전을 사방으로 돌려 막아 그 안쪽에 이른바 ‘조정’(朝廷)을 이룸과 동시에 열린 공간을 적절한 크기로 분절, 차단함으로써 건축적인 완결성을 높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행각이다. 


동행각의 열주/사진-이승준 기자 

근정문을 중앙에 둔 남쪽 행각은 동서로 각각 15칸씩이다. 사정문을 중앙에 둔 북쪽 행각은 동서로 각각 17칸씩이다. 반면 남행각과 북행각 양 끝에서 남북 방향으로 연결되는 동행각과 서행각은 44칸씩이다. 동서 행각의 남쪽 끝에서 17칸째와 18칸째에 외부로 돌출된 융문루와 융무루가 덧붙어 있고, 또 남행각에는 근정문 좌우로 일화문(日華門)과 월화문(月華門)이 잇대어져 있다. 


행각의 건축 양식은 익공식으로 기둥 위에 간결하게 초익공을 짰고, 도리가 다섯 줄 잇대어진 5량가 건물에 천장은 서까래가 드러난 연등천장이다. 벽체는 북행각을 제외하고는 바깥쪽으로만 있고 내부는 개방돼 있다.


사진/이승준 기자 

근정문으로 들어서면 넓은 조정과 당당한 기품에 점잖은 위엄이 서린 근정전이 눈앞에 펼쳐진다. 조정 중앙에는 삼도(三道)가 있어 근정전까지 이어지는데, 가운데 넓고 높은 길이 어도(御道)이고 동쪽이 문관이 이용하는 길, 서쪽이 무관의 길이다. 삼도를 중심으로 양옆으로는 관원의 품계를 나타내는 품계석(品階石)이 줄지어 있다. 


동쪽이 동반(東班) 곧 문반의 자리이고, 서쪽이 서반(西班) 즉 무반의 자리이다. 넓은 조정 바닥에는 평평하지만 표면을 다듬지 않은 거친 돌이 깔려 있다. 박석(薄石)이라고 하는 이 돌들의 모양과 매무새는 궁 안에 쓰인 어떠한 석재보다 자연스럽다. 조정의 박석은 북쪽의 근엄하고 화려한 근정전이나 흐트러짐 없는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주위 회랑과 대비되면서 엄격하기 그지없는 근정전 영역에 부드러운 인간적 정서를 부여하고 있다.


근정전/사진-이승준 기자

넓은 조정 한가운데 이중의 기단(월대) 위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경복궁의 으뜸 전각으로,

조정을 지나면 근정전의 위용을 받쳐주고 있는 이중기단, 곧 웅장한 화강석 월대(月臺)를 볼 수 있다. 근정전의 월대는 상월대와 하월대로 이루졌다. 월대마다 난간을 두르고 그 엄지기둥(문로주)에 화강석으로 돌짐승을 조각했다. 


월대 위에는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세 발 가진 솥, 곧 정(鼎)이 좌우에 놓였고 서쪽 계단 옆으로는 화재에 대비하기 위해 무쇠솥처럼 생긴 드므를 놓았다. 드므에 물을 담아놓으면 화마(火魔)가 물에 비친 제 모습에 놀라 도망간다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다.



경복궁의 으뜸 전각 근정전은 태조 3년(1394)에 창건됐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고종 4년(1867)에 재건됐다. 조선조 최후의 대작으로 국보 제223호이다. 2층 구조의 지붕에 정면 5칸 측면 5칸의 목조건물로 공포는 다포계 양식이고 도리가 11줄 걸리는 11량가이다. 


법전은 한 왕조의 상징이다. 근정전의 외부는 2층으로 되어 있으나 내부는 전체가 한 공간으로 트여 있는 통층구조로, 내부구조는 높은 천장과 그 높이를 지탱하고 있는 굵은 기둥들에 의해 장엄하게 느껴진다. 북쪽 중심에 놓여 있는 용상(龍床)과 그 위를 정교한 조각으로 장식한 보개(寶蓋)5), 용상 뒤로 섬세하게 조각된 삼면의 목조 병풍, 왕권의 무궁한 번영을 기원하고 칭송하는 의미를 지닌 일월오악병(日月五岳屛)은 여전히 왕실의 위용을 간직하고 있다.


서쪽 계단 옆으로는 화재에 대비하기 위해 무쇠솥처럼 생긴 드므를 놓았다. 드므에 물을 담아놓으면 화마(火魔)가 물에 비친 제 모습에 놀라 도망간다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다./사진-이승준 기자 

높고 깊은 천장 중앙에는 천변만화(千變萬化)의 능력자인 제왕을 상징하는 두 마리의 용이 구름 사이에서 금방이라도 하늘로 오를 듯 생동감 있게 조각돼 있다. 일반적으로 제왕을 상징하는 용은 발톱이 다섯 개인 오조룡(五爪龍)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근정전에는 황제에게만 사용되던 칠조룡(七爪龍)이 조각돼 있다. 


밖에서 보면 2층이나 안은 전체가 한 공간으로 트여 있다. 천장 중앙에 황제를 상징하는 칠조룡 두 마리가 조각돼 있다.


정문.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건물로 1867년(고종 4년) 중건됐고 일곽의 행각과 함께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12호로 지정됐다. 조선 초기의 임금들은 여기에서 즉위식을 거행한 다음 근정전의 옥좌에 앉아 문무백관의 하례를 받았다.


근정전 내부/사진-이승준 기자

근정전 내부/사진-이승준 기자

경복궁의 정전으로, 국가적인 대례를 거행하던 장소이다. 다포식 건축으로는 현존하는 것 중 국내 최대 규모이고, 2단의 석축기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5칸의 2층 전각으로 구성돼 있는데, 천장에 있는 금박 입힌 2마리의 목조 용 조각의 발톱이 7개인 것이 특징이다. 1395년(태조 4년) 건설됐다가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867년(고종 4년) 중건했다.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지을 때도 철거당하지 않았고 1985년 1월 8일 국보 제223호로 지정됐다.


사정문/시진-이승준 기자

측면에서 바라본 사정전(思政殿)/사진-이승준 기자 

앙부일구/사진-이승준 기자 사정전은 왕의 신하들과 함께 정사를 돌보는 편전으로 사용하던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내부의 바닥이 마루였기 때문에 주로 여름에 사용했다. 1395년(태조 4년) 지어진 뒤 1553년(명종 8년) 화재로 소실됐다가 중건했지만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모두 전소됐고, 이후 1867년(고종 4년) 중건돼 지금까지 남아 있다. 전각의 사방이 벽 없이 창과 문으로만 된 점이 특징이며, 내부의 어좌 위에는 운룡도가 있다.


만춘전(萬春殿)/사진-이승준 기자 

만춘전(萬春殿)은 사정전의 동쪽에 자리한 정면 6칸, 측면 4칸의 부속 전각이다. 온돌이 시설돼 있어서 주로 봄에 사용했다. 그 때문에 궁궐의 온돌 시설을 살펴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곳이었다. 전각이 세워진 뒤 불탔다 중건되는 과정은 사정전과 동일하나 만춘전은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돼어 주춧돌만 남은 적이 있었다. 1988년 원 자리에 건물이 복원됐다.


천추전(千秋殿)/사진-이승준 기자  천추전(千秋殿)은 서쪽에 자리한 정면 6칸, 측면 4칸의 부속 전각이다. 만춘전과 마찬가지로 내부에 온돌이 시설돼 있어서 주로 가을과 겨울에 사용했다. 1452년(문종 2년) 5월 14일 문종이 37세를 일기로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수정전(修政殿)/사진-이승준 기자 

장영실의 자격루를 세웠던 장소/사진-이승준 기자


수정전(修政殿)은 근정전 서쪽에 자리한 전각이다. 월대 위에 있는 정면 10칸, 측면 4칸으로 된 꽤 큰 건물로, 궁궐에 부속된 관청이 밀집한 궐내각사 권역의 중심이었다. 세종 때는 집현전이 있던 곳이었으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1867년(고종 4년) 중건했고, 고종 때는 군국 기무처와 내각이 이곳에 있었다. 주변에 있던 2백여 칸의 다른 궐내각사 건물들은 일제강점기 때 모두 철거돼 현재는 수정전만 남아있다. 2차 복원 정비 사업의 2단계가 진행될 2013년~2018년에 주변 건물들을 복원할 예정이다. 허나 최신 위성 사진으로봐도 복원은 커녕 별진척도가 없어보인다.


강녕전(康寧殿)/사진-이승준 기자 

강녕전(康寧殿)은 임금의 침전으로 사용한 정면 11칸, 측면 5칸의 전각으로 건물 앞에는 월대가 시설돼 있고, 주변에는 강녕전의 소침인 연생전.경성전.연길당.응지당이 있다. 강녕전진찬도(康寧殿進饌圖)에는 강녕전과 4채의 소침이 회랑을 통해 서로 이어진 것으로 나오지만 현재는 연결돼 있지 않다. 다만 소침의 툇마루 등을 통해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1395년(태조 4년)에 세워질 때 정도전이 명명한 전각 중 하나이고, 1553년(명종 8년) 화재로 불탔다가 1년 뒤에 중건했지만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돼 터만 남았다가 흥선대원군이 다시 중건했다. 고종 때 중건된 강녕전은 1917년 11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희정당을 복구하기 위해 1920년 창덕궁으로 이건했고, 지금의 건물은 1995년에 복원했다.


연생전(延生殿)/사진-이승준 기자 

연생전(延生殿)은 강녕전(康寧殿)의 침소 중 하나로 정면 7칸, 측면 4칸이고 1395년(태조 4년) 경복궁 창건 때 제후 3침의 제도에 따라 강녕전 오른쪽에 동소침으로 지어졌고, 서쪽에 있는 서소침인 경성전과 마주보고 있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새로이 연길당을 지어 회랑을 통해 강녕전과 연결돼 있었으나 지금은 분리돼 있다. 1917년 11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복구를 위한 자재로 활용키 위해 철거됐다가 1995년 복원했다.


경성전(慶成殿)/사진-이승준 기자 

경성전(慶成殿)은 강녕전(康寧殿)의 소침 중 하나로 정면 7칸, 측면 4칸이고 1395년(태조 4년) 경복궁 창건 때 제후 3침의 제도에 따라 강녕전 왼쪽 서소침으로 지어졌고, 동쪽에 있는 동소침인 연생전과 마주보고 있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새로이 응지당을 지어 회랑을 통해 강녕전과 연결돼 있었으나 지금은 분리돼 있다. 1917년 11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복구를 위한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됐다가 1995년 복원했다.


연길당(延吉堂)/사진-이승준 기자 

연길당(延吉堂)은 흥선대원군이 새로 영건한 강녕전의 소침 중 하나로, 강녕전 오른쪽에 있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전각이다. 과거에는 강녕전과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분리되어 있다. 1917년 11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복구를 위한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복원했다.


응지당(膺祉堂)과 어정/사진-이승준 기자 

응지당(膺祉堂)은 흥선대원군이 새로 영건한 강녕전의 소침 중 하나로, 강녕전 왼쪽에 있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전각이다. 과거에는 강녕전과 회랑으로 연결돼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분리돼있다. 1917년 11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복구를 위한 자재로 활용키 위해 철거됐다가 1995년 복원했다.


교태전(交泰殿)/사진-이승준 기자 교태전(交泰殿)은 정면 9칸의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 뒤쪽에 있는 왕비의 침전.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지붕에 용마루가 없다. 부속 전각으로 동쪽에는 원길헌(元吉軒), 서쪽에는 함홍각(含弘閣), 동북쪽에는 아미산을 바라볼 수 있는 누마루인 건순각(健順閣)이 있다. 고종 때 중건된 교태전은 1917년 11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대조전을 복구키 위해 1920년 창덕궁으로 이건했고, 지금의 건물은 1995년에 복원했다.


아미산(峨嵋山)/사진-이승준 기자

장안문과 아미산/사진-이승준 기자 

낙하담,/사진-이승준 기자  

함월지/사진-이승준 기자 

아미산(峨嵋山)은 경회루의 연못을 팔 때 나온 흙을 쌓아 만든 인공산으로 교태전의 뒷편에 있다. 백두대간과 한북정맥을 경복궁까지 이어서 교태전에서 낳는 왕세자와 대군들에게 백두산의 기를 주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3단의 화계(花階)로 된 출입구에는 2.6m 높이의 육각형 벽돌 굴뚝 4개가 있는데, 교태전의 온돌방에서 나오는 연기를 배출키 위해 만들었고, 각 굴뚝의 여섯 벽면에는 다양한 길상문으로 아름답게 꾸며 그 예술적 조형미와 가치를 높게 평가받아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11호로 지정됐다. 선장문 안쪽의 실제 아미산 영역은 출입불가이고 입구 계단인 아미산 굴뚝 주변도 올라갈 수 없다.


흠경각(欽敬閣)/사진-이승준 기자 

흠경각(欽敬閣)은 교태전 서쪽의 남쪽에는 흠경각(欽慶閣)이, 북쪽에는 함원전(含元殿)이 자리 잡고 행랑을 서쪽에 두어 둘러싸고 있다. 흠경각은 본래 세종 때 짓고 그 속에 옥루(玉漏)를 설치했던 전각이었으나, '북궐도형'에 보이는 흠경각은 고종 25년(1888) 5월 19일에 상량문 제술관 등이 지명된 것으로 보아, 이때 중건되면서 옥루를 설치하지 않은 내전각(內殿閣)의 하나로 한 것이라 보인다. 정면 6간 측면 4간으로 중앙에 청, 좌우에 방을 두고 퇴와 협실들로 둘러싸고 있다.


함원전(咸元殿)/사진-이승준 기자
함원전(咸元殿)의 우물/사진-이승준 기자

함원전(咸元殿)은 교태전 서쪽에 자리한 정면 6칸, 측면 4칸의 전각. 세종대왕이 내불당(內佛堂)을 설치해 불사를 거행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1888년(고종 25년) 중건했지만 일제강점기인 1917년 11월 10일 창덕궁의 내전 일곽이 화재로 전소되자 여기에 들어갈 자재로 활용키기 위해 철거됐다가 1995년 복원했다.


소주방(燒廚房)


동궁의 북측과 자경전의 남측 사이에 있고, 궁궐 내 음식물을 보관.조리.제공하는 식생활 공간으로, 수라상을 비롯해 왕실 잔칫상 등을 만드는 궁중 요리원이다. 대전(大殿)의 음식을 만들던 곳이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상궁들이 음식을 하던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1395년 경복궁 창건 이후 궐내 제반 시설을 정비하면서 건립됐고,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고종 2년(1865년) 경복궁 재건 시 다시 지어졌다. 일제 강점기인 1915년 조선 물산 공진회가 개최되면서 여러 전각들과 함께 헐려 없어졌다. 2015년 2월 16일 복원했다. 2015년 5월 8일부터 10일까지 개방, 궁중 음식을 시연하는 행사를 열었다. 2018년 현재, 궁중 다과와 전통차를 판매하는 찻집으로 개수돼 운영 중에 있다. 굳이 차를 마시지 않더라도, 경복궁 내에서 별도의 허가 없이 실내에 들어 가 볼 수 있는 유일한 전각이라는 점에서도 경복궁을 방문한다면 한 번쯤 들러 볼 만하다.


자경전(慈慶殿)


원래 이 자리에는 자미당(紫薇堂)이 있었으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됐고, 1867년(고종 4년)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헌종의 어머니이자 고종의 양어머니인 대왕대비 조씨를 위해 지었지만 1873년(고종 10년) 화재로 소실돼 1888년(고종 25년) 중건했다. 동쪽 정면은 정면 10칸, 측면 4칸의 자경전이고, 여기에 정면 1칸, 측면 2칸의 청연루(淸燕樓)와 정면 6칸, 측면 2칸의 협경당(協慶堂)이 맞닿아 있고, 서쪽 뒤쪽으로 정면 2칸, 측면 6칸의 방실이 연결돼 있다. 경복궁에 현존하는 유일한 조선시대부터 남아있는 연침 건물이며,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09호로 지정됐다.


자경전 꽃담


자경전 서쪽에 있는 담장으로 황토색 전돌과 흰 삼화토를 사용해 만든 벽면에 각종 길상문자와 길상도안, 기하학적 문양을 장식했다. 서울특별시가 '서울 10대 대표색'을 선정하면서 이 꽃담의 색깔을 '꽃담황토색'으로 명명해 포함시켰다. 서울 시내의 택시 중 꽃담황토색으로 도색된 차량이 종종 보이는데, 도입 초기에는 X색 같다며 거부감이 많았지만 지금은 친근해진 모양이다.


자경전 십장생 굴뚝


자경전 내부의 온돌방과 연결된 여러 개의 굴뚝을 하나로 모아 만든 굴뚝이다. 전돌을 쌓아 만든 담장 벽면의 중앙에는 장수를 의미하는 소나무.거북.사슴.불로초 등의 십장생과 그 밖의 각종 길상을 상징하는 동물들을 배치해 자경전의 주인인 대왕대비 조씨의 만수무강을 기원했다. 미학적 가치가 뛰어나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10호로 지정됐다. 자경전과 합쳐서 지정된 게 아니라 굴뚝만 독립적으로 지정된 것이다.


흥복전(興福殿)


1867년(고종 4년)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처음 지어졌고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창의궁의 함일재를 옮겨 지었다고 전한다. 침전 건물이었으나 사신 접견 및 임금이 학문을 연마하는 경연과 양로연 장소로도 사용됐다. 대왕대비 조씨가 1890년 이 곳에서 승하했다.아관파천 이후 제 기능을 상실했다가 1917년 소실된 창덕궁 침전 권역을 재건할 때 옮겨져 사라지고 해당 자리에는 일본식 정원이 들어섰다. 2015년 복원 공사를 시작했는데, 시공업체가 복원 기준을 어기고 벽체와 지붕에 시멘트 20포대 분량을 섞은 재료를 쓴 사실이 드러나 2018년 4월부터 석 달 간 재공사를 시행해 2019년 복원을 완료했고 단청은 2020년대 초에 칠할 예정이다. 내부에는 현대식 화장실과 냉난방, 전기 시설 등을 최초로 갖춰 다양한 용도로 활용토록 했다.


동정문


경복궁 주차장에서 동궁 영역으로 출입하는 문으로, 본래 한국 최초의 극장인 원각사의 정문이다. 이후 국립 국악원 정문으로 이용됐고, 영추문의 대용으로 사용됐다. 1975년 영추문을 콘크리트로 재건하면서 현자리에 자리하게 됐다. 문화재청에서는 이를 원각사의 정문으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정문이라는 이름도 동쪽에 있는 출입문이라면서 임의로 부르던 명칭이고, 건물 내역에 대한 관련 표지판조차 없다. 따라서 원 자리인 원각사 터로 이전 복원하겠다는 얘기는 나오지도 않는 상황. 원각사 터는 종로구 신문로1가 57번지에 자리한 대우 건설 빌딩 일대이다. 과거 모습 사진에 나오는 흰색 근대식 건물은 1939년에 건청궁 터에 건립한 구 총독부 미술관 건물이다. 해방 후에는 경복궁 미술관, 전승공예관 등의 전시시설로 활용하다가 건청궁을 복원키 위해 1998년 철거했다.


자선당(資善堂)


1427년(세종 9년) 세자의 생활 공간으로 지어진 정면 7칸, 측면 4칸의 동궁(東宮)으로 세자였던 문종이 단종을 얻고 아내 현덕왕후 권씨를 잃은 곳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고종 때 중건돼 순종이 세자로서는 마지막으로 이곳에서 지냈다. 아관파천 이후 주인을 잃었고 1914년 오쿠라 기하치로가 일본으로 뜯어간 뒤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불타 기단만 남은 채 방치된 유구가 1995년 한국으로 반환됐다. 원래는 반환된 유구를 복원에 사용하려 했지만 훼손이 심각해 건청궁 뒤쪽에 갖다놓았는데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1999년 복원한 자선당도 원래의 모습과 차이가 있다. 여담으로 이 자선당 건물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현대식 난방용 보일러를 개발하는 데 연관이 있다.


비현각(丕顯閣)


1427년(세종 9년) 세자의 공부방 겸 집무실로 지어진 정면 6칸, 측면 2칸의 전각이다. 자선당의 오른쪽에 자리해 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고종 때 중건됐지만 일제강점기인 1917년 11월 10일 창덕궁의 내전 일곽이 화재로 전소되자 여기에 들어갈 자재로 활용키 위해 철거됐다가 1999년 복원했다.


함화당(咸和堂)과 집경당(緝敬堂)


교태전 아미산의 북쪽에는 흥복전(興福殿), 광원당(廣元堂), 다경각(多慶閣), 함화당, 집경당, 영훈당(永熏堂) 등의 여러 전각들이 늘어서 있었으나 함화당과 집경당을 제외하고 모두 사라졌던 것을 2006년 함화당과 집경당을 연결하는 복도각과 주변의 행각만 복원해 2009년 1월 24일 일반에 개방했다. 1890년(고종 27년)에 지은 함화당과 집경당은 고종이 외국 공사를 접견하던 곳이자 궁중의 서화를 수장하던 공간이었다.


경회루(慶會樓)


1395년(태조 년4) 경복궁 창건 때 연못을 파고 누각을 세웠으나 지대가 습해 건물이 기울자 1412년(태종 12년) 연못을 대규모로 준설해 동서 128m, 남북 113m의 방지(方池)를 조성하고 경회루를 세웠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전에는 누각을 지탱하는 돌기둥에 용 조각을 새겼다고 하지만 1867년(고종 4년) 중건할 때는 무늬 없는 통돌로 바뀌었다. 지금의 경회루는 정면 7칸(34.4m), 측면 5칸(28,5m)으로 현존하는 한국의 목조 건축 중 규모가 가장 크고, 1985년 1월 8일 국보 제224호로 지정됐다. 10000원권 지폐 구권의 뒷면 도안이기도 했다.


하향정은 경회루 뒤에 있는 작은 정자인데, 원래는 경복궁에 없던 건물이다. 이승만이 집권 시절 낚시와 휴식을 위해 만든 건물이다. 철거 논란이 있다.


태원전(泰元殿)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새로 지은 전각으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했다. 남쪽에는 건숙문(建肅門)과 경안문(景安門)이 있고, 영사재(永思齋)가 태원전 오른쪽에 있고 그 남쪽에는 고종이 집무실로 사용했던 공묵재(恭默齋)가 있다. 태원전 서북쪽에는 간의당(簡儀堂)이 있고, 동서 양쪽에는 각각 세답방(洗踏房)이 있고, 주변에는 행각이 둘러져 있다. 명성황후 민씨의 빈전이 설치됐던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때 이곳의 모든 건물들이 헐렸다가 2005년 복원됐다.


장안당(長安堂)


건청궁은 1873년(고종 10년) 경복궁 중건이 끝난 뒤 고종이 흥선대원군 모르게 궁궐의 내밀한 북쪽에 국고가 아닌 사비로 지은 '궁 안의 궁'이다. 실제로 1873년부터 고종이 친정을 시작했기 때문에, 건청궁 건설은 아버지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정치적 행보라는 해석이 있다. 장안당은 고종이 머물던 처소로 민가의 사랑채 역할을 하던 장소였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이후 버려졌다가 1909년(융희 3년) 철거되었고, 2007년 복원됐다.


곤녕합(坤寧閤)


명성황후 민씨가 머물던 처소로 민가의 안채 역할을 하던 장소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 경복궁에 난입한 일본인에게 명성 황후 민씨가 시해된 장소이고며, 시신은 곤녕합 옥호루(玉壺樓)에 잠시 안치했다가 곧 건청궁 뒷쪽 녹산(鹿山)에서 불태워졌다. 이곳 역시 아관파천 이후 버려졌다가 1909년(융희 3년) 철거됐고, 2007년 복원됐다.


집옥재(集玉齋)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 동쪽에 있는 전각으로 왼쪽은 팔우정(八隅亭), 오른쪽은 협길당(協吉堂)과 연결돼 있다. 원래는 창덕궁에 있었으나 1888년(고종 25년) 고종이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이어하면서 건물을 이건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국풍 벽돌 건물로 지어졌다. 고종은 이곳을 서재, 어진 봉안처, 외국 사절 접견소 등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이 주둔하는 바람에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됐다가 1996년에 수도 경비 사령부 30경비단이 부대 이전을 함으로써 이후 복원 작업을 실시해 2006년에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향원정(香遠亭)


건청궁 남쪽 연못의 섬에 있는 2층의 누각. 원래는 건청궁의 후원 역할을 하는 장소였기에 건너가기 편하도록 건청궁에서 향원정을 향해 다리가 놓여 있었으나 지금은 자리가 바뀌어 향원지 남쪽에서 향원정으로 향하게 놓여져 있다. 현재는 창덕궁 부용정과 함께 국전 출품작의 단골 소재이기도 했다. 2017년 5월부터 전면 해체 보수 공사가 이뤄지고 있다. 헐거워진 목재 접합부, 토사가 쓸려내려가 약해진 지반 지지력를 강화하고 다리를 원래 자리인 북쪽으로 옮긴다고 한다. 1887년 3월 6일 우리나라 최초의 전등이 경복궁에 설치됐을때 발전기 냉각수를 확보키 위해 향원정에 발전기가 설치됐던 역사가 있다./서울의 5대궁궐 <끝>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궁궐이야기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