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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대마도는 우리 땅, 역사적 근거 있다.
  • 이근봉/천지개벽TV
  • 등록 2021-09-02 07:2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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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는 우리 땅일까? 아니면 일본 땅일까? 하고 의문이 생길 때 가 많지만 사실상 대마도는 몇 세기 동안이나 일본의 영토로 여겨져 왔다. 그것은 대마도가 한국 땅 이라는 인식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다.

대마도는 현재 일본의 영토라고 하지만 우리나라와 더 가까운 섬이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대마도는 지리적으로 낚시하기에 매우 적합한 조건과 주위에 작은 섬들이 매우 많아 수자원이 풍부하고 양식하기에 적합한 섬이다.

일본인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대마도를 ‘한국 부산시 대마도구(區)’라고 말하면서 자신들을 사실상 한국인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사실 대마도는 독도와 마찬가지로 한국 땅이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우리 땅이란 인식이 있었다. 아울러 만주와 함께 우리가 돌려받아야 할 땅이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그 땅을 무력 강점했지만 결사 항전한 (대마도)의병이 이를 격퇴했고 의병 전적비가 대마도 도처에 서 있다. 1870년대에 대마도를 불법적으로 삼킨 일본은 포츠담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반환해야 된다.

대마도는 일본어만 통하는 일본 지배하의 땅이 되었다. 그러나 대마도는 분명 우리 땅이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해주는 사실이다. 일본이 독도문제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제시하는 역사적 근거와 비교해 볼 때 우리의 ‘대마도 영유권’주장은 훨씬 시기적 연원도 깊고 자료도 풍부하다.

한.일 간의 역사를 볼 때 우리는 반드시 ‘공세(攻勢)적인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대마도 영유권 ’문제를 확대시켜 나갈 중장기적인 전략을 수립, 실행하여 현재의 독도와 같은 외교적인 문제로 만들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지금부터라도 대마도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와 전 국민적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이다.

대마도는 지리적으로 부산에서 49.5km, 일본 후쿠오카에서 134km 떨어져 있어 우리나라에서 더 가깝다. 시계가 트인 날이면 부산 태종대에서도 대마도를 볼 수 있으며, 부산의 새벽 닭 우는 소리가 대마도에서 들릴 정도로 지척이다. 현재는 4만 3천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대마도는 섬이라기보다는 바다에 떠 있는 산이라고 표현 할 정도로 섬 전체가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활주로를 만들 만한 평지에 산을 깎아서 비행장을 만들었고 그나마 활주로가 짧아서 후쿠오카에서 소형 프로펠러비행기가 승객을 실어 나르는 조그마한 섬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재 대마도 두 개의 섬이 통하고 있는데 그 터널 수만 해도 100여개가 넘어 지금도 대마도는 농사를 지을 땅이 없어서 계곡사이와 일부 해안지대에서만 농사가 가능한데 그 면적도 전체 3%에 불과하다. 이렇게 별 쓸모없는 땅이지만 이승만 대통령께서 이대로 방치해서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1949년 1월7일 대통령 첫 연두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이 날 이승만 대통령은 한·일 국교재개를 언급하면서 대마도 문제를 꺼냈다.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 하라는 미국요구에 맞서기 위한 방법으로 대마도 카드를 뽑아둔 것이다.

이대통령의 발언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한지 사흘 뒤인 8월18일 성명에서 “대마도”는 우리 땅이니 일본은 속히 반환하라고 했다. 일본이 항의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외무부를 거쳐 그 해 9월 “대마도”속령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한국은 일본이 대마도에 대한 모든 권리, 호칭, 청구를 분명히 포기하고 그 것을 한국에 돌려줄 것을 요청한다.(In view of this fact the Republic ofj Korea request that Japan specifically renounce all right, title and claim to the Island of Tsushima and return it to the Republic of Korea)”고 밝혔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마도의 영유권의 주장은 강력했고 기회만 있으면 대마도를 반환 받기 위해서 노력을 했다고 생각된다.

탐라도는 상대적으로 독립을 누리다 고려에 복속됐다. 반면 대마도는 상대적 독립을 유지했지만 그러나 조선의 관직을 얻고 생필품을 얻기 위한 교역을 꾸준히 요청했다. 대마도를 다루는 고려와 조선은 원칙 이였던 것이다.

왜구의 침략이 계속되지 세종 원년(1419년)상왕 태종은 대마도 정벌을 결심한다. 그 때 교유문(敎諭文)의 서두가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태종은 정벌이 끝난 후에도 대마도 도주에게 교유문에서 그는 다시 한 번 대마도가 우리 땅이었음을 명확하게 밝힌다.

물론 대마도가 제주도나 거제도 같은 우리 땅은 아니다. 이승만대통령은 대마도가 우리에게 조공을 바치는 땅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태종7대 때 대마도가 일본 땅도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15세기 초 태종 이방원의 대마도 인식과 20세기 종반 이승만 대통령의 인식은 같다고 본다.

이후 조선은 대마도에 대해 소극적 태도로 일관했다. 그저 왜구의 근거지 역할만 해 주지 않으면 좋다는 정도였다. 임진왜란이 대마도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양다리를 걸쳤던 대마도주는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일본화를 지향했고 임란 직후인 17세기 초 일본의 막번 체제에 편입됐다. 조선 전기 때만해도 조선의 신하임을 당당히 밝혔던 대마도 도주가 일본으로 넘어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지적대로 1870년대 완전히 일본화 됐다. 지금 대마도는 일본이 실효 지배하고 있다. 그 근거는 우리가 독도를 실효 지배하는 것보다 훨씬 약하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것에 비하면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는 주장이 훨씬 설득력 있고 근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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