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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2] 한국 최고의 고건축물 '병산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1-09-15 22:49:08
  • 수정 2022-08-01 04:3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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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서원은 조선시대 중엽인 16세기에 들어와서 유림과 문중에서 국가를 이끌어갈 인재를 양성하고 학문을 연구하기 위해 설립한 사립교육기관이고, 나아가 위대한 업적과 학문적으로 성취를 이룬 선조의 유덕을 가리기 위해 사당을 지어 위판을 모시고 매년 향사를 받드는 곳이다. 


따라서 서원은 이러한 목적을 수행키위해 선현에게 향사를 받드는 사당인 제향공간, 학문을 강론하는 강당과 유생들이 공부하기 위해 머무는 동재와 서재로 구성된 강학공간, 심신을 수양하고 호연지기를 기를 수 있는 누각으로 이뤄진 유식공간 등으로 이뤄져 있다. 




그 외에도 문집이나 서책을 펴내는 장판각, 제사에게 필요한 제기를 보관하고 준비하는 전사청, 서원을 관리하고 유생들의 식사준비 등 생활 전반을 뒷받침해주는 고직사 등의 부속건물을 갖추고 있다. 


서원을 설립하는 장소는 풍부지리설에 따라 좋은 위치를 선택했는데, 대부분의 서원은 앞이 낮고 뒤가 높은 구릉지에 많이 설립됐다. 공간 배치는 남쪽에서부터 정문.강당.사당을 일직선상에 두고그 양쪽에 동재와 서재를 배치했다. 사당에는 따로 담장을 쌓고 내삼문을 만들어 제향공간으로서의 신성성을 확보하고 있다.




건축물은 겸손과 절제를 추구하는 선비정신에 따라 복잡한 장식을 피하고 간소한 양식을취했고,자연과 함께 심신을 단련하고 수양하면서 한굼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조용하면서도 빼어난 경치를 가진 곳에 세웠다. 


한국 서원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는, 유교 성리학이 조선 사회에 정착된 후, 성리학의 보급에 합당한 한국 특유의 서원 건축 양식이 형성됐다. 서원 건축은 조선시대 사학(私學) 교육의 가장 전형적인 증거를 보여주면서, 주변 경관과 조화하는 특유한 공간 유형을 창출했다.



또한 서원의 경관은 '성리학자들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자연과 인간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는 천인합일사상이 반영돼 있고, 서원은 조선시대 지방 문화와 교화의 중심지로서 많은 문집과 문헌을 남겼다. 향촌사회의 여론과 공론을 집약하는 지성인 집회소 역할, 제향과 강학 기능을 통한 사회교육의 장소, 그리고 도서관과 출판 기능을 수행했다.<편집자 주>


병산서원은 고려 중기부터 안동 풍산에 있던 교육기관인 풍악서당(風岳書堂)에서 비롯됐다. 지방 유림의 자제들이 모여 공부하던 곳으로, 고려 말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왕의 행차가 풍산을 지날 무렵, 풍악서당의 유생들이 난리 중에서도 학문에 열중하는 것을 보고 왕이 크게 감동해 많은 서책과 사패지(賜牌地)를 주어 유생들을 더욱 학문에 열중하도록 격려했다.



200년이 지나면서 서당 가까이에 가호가 많이 들어서고 길이 생기며, 차츰 시끄러워지면서 유림들이 모여 서당을 옮길 곳을 물색하는 중에 서애 류성룡 선생께서 부친상을 당하시고 하회에 와 계실 때 그 일을 선생에게 문의하니, 서애 선생께서 병산이 가장 적당할 것이라고 권하게 됐고 유림들은 선생의 뜻에 따라 1575년(선조 8) 서당을 병산으로 옮기고 ‘병산서원’이라고 고쳐 부르게 됐다.


1614년(광해 6)에 우복 정경세, 창석 이준, 동리 김윤안, 정봉 안담수 등 문인들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존덕사를 창건해 선생의 위판을 봉안했다.



선생의 위판은 1620년(광해12) 합향하는 과정에서 여강서원(주향 퇴계 이황)으로 옮겼다가 1629년(인조 7)에 다시 병산에 복향했다. 당시 서애 선생의 위판을 여강서원과 병산서원에 봉안하는 문제를 두고 '일읍양원병향(一邑兩院竝享)'과 '일읍봉안(一邑奉安)'등 의견이 있었으나 주자의 예에 따라 한 고을 두 서원에 병향해도 무방하다 해 두 서원에 병향하게 됐다.


1662년(현종 3)에 선생의 셋째아들인 수암 류진(柳袗, 1582-1635)공의 위패를 종향했다.


명산서원 전경/사진-이승준 기자

병산서원은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했고 많은 학자를 배출했고, 1868(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이 내렸을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중 하나이다. (書院 27개, 祠 20개)


병산서원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교 건축물로서 서애 류성룡(柳成龍, 1542~1607)선생과 그의 제자이며 셋째 아들 수암 류진(柳袗, 1582~1635) 공을 배향한 서원이다.


이곳은 서애 선생께서 31세 때인 1575년에 풍산 상리에 있던 풍악서당을 이곳으로 옮겨와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1607년 선생이 돌아가신 후 묘우(尊德祠)를 짓고 선생의 위판을 모다. 매년 봄.가을 향사를 받들면서 서원으로 승격됐다.



그 후 철종 14년(1863)에 병산서원으로 사액 받았고,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사적 제 260호로 지정돼 있고, 한국의 서원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된 서원이다.


병산서원은 낙동강의 은빛 백사장과 맑은 물이 굽이쳐 흐르고 병풍을 둘러친 듯한 '병산'이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하게 할 만큼 빼어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특히 누각 건물인 만대루에서 바라보는 주변경관은 병산의 자연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으며, 유생들이 교육을 받던 강당인 입교당에서는 자연과 건축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어 자연 친화적이고 자연과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는 본보기가 되는 곳으로, 우리 민족의 절제된 마음과 자연을 지켜가고자 하는 민족성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선비의 절제된 마음을 담아 낸 인공적인 건축물과 하나되어 펼쳐 내는 장엄함은 어느 곳에서도 느낄 수 없는 한옥의 완숙미를 보여주고 있으며, 주사(廚舍) 앞에 달팽이 모양을 한 하늘 열린 통시(화장실)는 또 다른 볼거리로 재미를 준다.


# 복례문(復禮門)


복례문/사진-이승준 기자

복례문 현판/사진-이승준 기자

‘復禮’는 논어 '안연(顔淵)」편에 “안연이 인(仁)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하기를, ‘자신의 사욕을 이겨 禮로 돌아가는 것이 인을 실행하는 것이니, 하루라도 자신의 사욕을 이겨 예로 돌아간다면 천하 사람이 모두 어질다고 허여(許與)할 것이다. '顔淵問仁 子曰 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안연문인 자왈 극기복례위인 일일극기복례 천하귀인언)' 고 한 구절에서 인용했다. 사람마다 욕망과 탐욕의 유혹을 이겨내고 예(禮)로서 자신을 절제해 유학의 종지인 인(仁)을 이룩하라는 의미에서 ‘복례문’이라 했다. .


# 광영지(光影池)



주자의 관서유감 시의 天光雲影共徘徊(천광운영공배회)에서 인용한 것이다.


觀書有感(관서유감) 글 읽는 즐거움 -朱熹(주희)-


半畝方塘一鑑開(반무방당일감개)조그마한 연못은 거울 같아서

天光雲影共徘徊(천광운영공배회)하늘빛과 구름이 함께 노닌다,

問渠那得淸如許(문거나득청여허)묻건대 어찌하야 그리 맑은 고

爲有原頭活水來(위유원두활수래)끝없이 샘물 솟아 그렇더란다

昨夜江邊春水生(작야강변춘수생)어젯밤 강변에 봄비 내려서,

艨艟巨艦一毛輕(몽동거함일모경)크나큰 전함도 깃털 같아라,

向來枉費推移力(향래왕비추이력)애써서 밀어도 소용없더니

今日流中自在行(금일류중자재행)오늘은 물길에 저절로 가네,


# 만대루(晩對樓)/보물 2104호 지정(2020.12.28)


만대루/사진-이승준 기자

만대루는 두보(杜甫 701-762)와 주희(朱熹 1,130-1,200)의 시에서 인용하였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당나라 시인두보가 삼국지의 유비가 최후를 맞은 곳으로 유명한 백제성 절벽위의 누대를 바라보면서 지은 시의 ‘翠屏宜晚對(취병의만대)’에서 종일토록 바라보아도 싫지 않다는 뜻에서 만대루라 했다.


복례문에서 바라본 만수대/사진-이승준 기자

白帝城樓(백제성루) - 杜甫(두보) -


江度寒山閣(강도한산각) - 강은 차가운 산 전각을 지나고,

城高絕塞樓(성고절새루) - 성은 아득한 변방 누각에 높다.

翠屏宜晚對(취병의만대) - 푸른 절벽은 늦을 녘에 마주 대할 만하고

白谷會深遊(백곡회심유) - 흰 바위 골짜기는 여럿 모여 그윽이 즐기기 좋구나.

急急能鳴雁(급급능명안) - 울 줄 아는 기러기 빠르디 빠르고,

輕輕不下鷗(경경부하구) - 내려오지 않는 갈매기 가볍디가볍다.

彝陵春色起(이릉춘색기) - 이릉에 봄빛이 일어나니,

漸擬放扁舟(점의방편주) - 작은 배를 점점 띄우려 한다.


만대정(晩對亭) - 주희(朱熹) -


주자의 무이정사(武夷精舍) 경치를 그린 무이잡영(武夷雜詠) 의 만대정 시(詩)


倚笻南山巓(기공남산전) - 지팡이에 의지해 남산에 오르니

卻立有晩對(각입유 만대) - 멀리 만대봉이 있네

蒼峭矗寒空(창초촉한공) - 가파르고 가파른 모습 차가운 하늘에 우뚝한데

落日明影翠(낙일명영취) - 지 는 해는 푸른 절벽을 비추네,

해질 녘에 취병을 바라보는 감회를 읊었다. 저녁 해가 병풍처럼 펼쳐진 푸른 절벽을

비스듬하게 비추는 모습에서, 두보와 주자는 산의 생기를 더 선명하게 느꼈던 것이다.


# 서재(西齋) : 정허재(靜虛齋)


서재(정허재)/사진-이승준 기자

입교당과 만대루 사이의 마당을 가운데로 하고 동쪽과 서쪽에서 마주하고 있다. 유생들의 기숙사였던 두 건물은 똑같이 크고 작은 2개의 방과 가운데 1칸 마루로 구성됐다. 강당쪽의 작은 방은 학생회장격인 유사(有司)의 독방이거나 서적을 보관하는 장서실이다. 2칸 규모의 큰 방은 학생들이 단체로 기거하는 방이었다. 좌고우저(左高右低)의 원리를 쫓아 동재에는 상급생들이, 서재에는 하급생들이 기거했다.


# 입교당(立敎堂)


병산서원(입교당)/사진-안동시 

서원 중심 강당으로‘立敎’는 '小學' 立敎편에서 하늘로 부여받은 착한 본성에 따라 인간윤리를 닦아가는 가르침을 바르게 세운다는 것에서 인용한 것이다. 유생들이 배워야할 성현의 가르침인 오륜(五倫)을 바르게 세운다는 의미이며, 성현의 가르침을 받아 자기의 몸을 바로 세우고 나아가 선비로서의 사명을 바로 세우는 공부를 했다.


# 동재(東齋) : 동직재(動直齋)


동재(동직재)/사진-이승준 기자입교당과 만대루 사이의 마당을 가운데로 하고 동쪽과 서쪽에서 마주하고 있다. 유생들의 기숙사였던 두 건물은 똑같이 크고 작은 2개의 방과 가운데 1칸 마루로 구성됐다. 강당쪽의 작은 방은 학생회장격인 유사(有司)의 독방이거나 서적을 보관하는 장서실이다. 2칸 규모의 큰 방은 학생들이 단체로 기거하는 방이었다. 좌고우저(左高右低)의 원리를 쫓아 동재에는 상급생들이, 서재에는 하급생들이 기거했다.


# 신문(神門)



서원의 내삼문(內三門)에 해당하고, 향사(享祀) 때에 제관(祭官)들이 출입했다. 정면 3칸의 솟을삼문으로 사당의 출입문답게 붉은 색칠을 해 부정한 것의 접근을 막고 있다. 향사례에서 신문 앞의 마당은 중요한 장소가 된다. 외삼문 중앙 두기둥에 주역의 8괘가 그려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서애선생의 일생과 그 시기의 시대적인 분위기를 주역의 괘로 풀어서 세겨둔 것이다


# 장판각(藏板閣)



책을 인쇄할 때 쓰이는 목판(冊版)과 유물을 보관하던 곳으로, 입교당 후면 왼쪽으로 비켜서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도리가 없는 구조이며, 습기를 피하기 위해 정면에 모두 판문(板門)을 달았다. 화마(火魔)를 막기 위해서 다른 건물과 거리를 두어 독립적인 공간을 마련했다. 서원의 명문도를 평가하는 주요 기준 가운데 하나는 바로 판본의 소장량이다. 따라서 책을 발간하는 목판은 서원의 소중한 재산이었다.


# 존덕사(尊德祠)


존덕사/사진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서애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높이 우러른다.”는 뜻에서 존덕사라 하였다. 중용 27장 君子(군자) 尊德性而道問學(존덕성이도문학) ‘군자는 덕성을 존중하고 묻고 배움을 길로 삼는다’ 에서 취해 위에거처 교만하지 아니하고 아래에 일하면서 배반하지 아니하여 旣明且哲(기명차철)하고 以保其身(이보기신)한 서애선생의 삶을 찬양하는 의미가 있다.


# 전사청(典祀廳)


전사청은 사당에 올릴 제수를 준비하는 곳으로 사당과 한 울타리 안에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병산서원의 경우에는 전사청과 사당이 각각 독립된 영역으로 분리되어 있다. 이는 아래쪽에 있는 주소(廚所) 건물과 중심축을 맞춤으로써 전사청으로 올라오는 제수를 마련하는 주소의 작업을 충실히 지휘 감독하기 위함이다. 존덕사의 오른편으로 자리하고 있다.


# 달팽이 뒷간


서원밖 주사 앞에 있는 화장실 '달팽이 뒷간'/사진-이승준 기자

서원밖 주사(廚舍) 앞에 있는 화장실이다. 진흙 돌담의 시작 부분이 끝 부분에 가리도록 둥글게 감아 세워 놓았는데, 그 모양새에서 이름을 따왔다. 출입문을 달아 놓지 않아도 안의 사람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배려한 구조이다. 지붕이 따로 없는 이 하늘 열린 '달팽이 뒷간'은 유생들의 뒷바라지를 하던 일꾼들이 사용하던 것이다. 400여년 전 서원건물과 함께 지어졌으며, 옛 기록에는 대나무로 벽을 둘렀다고도 전해진다. 병산서원의 부속건물에 포함되어 사적 제 260호(1978년)로 지정되었다. 2003년 보수 작업이 이뤄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 明誠齋(명성제)


명성재 현판/사진-이승준 기자

‘明誠’은 '중용'21 장에 '성(誠)으로 말미암아 밝아짐을 성(性)이라 이르고, 명(明)으로 말미암아 성(誠)해짐을 교(敎)라 하니, 성(誠)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성(誠)하게 된다. 〔自誠明 謂之性 自明誠 謂之敎 誠則明矣 明則誠矣(자성명 위지성 자명성 위지교 성즉명의 명즉성의)〕'고 한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성(誠)은 성실히 하는 것으로 행(行)에 해당하고 밝음(明)은 이치를 밝히는 것으로 지(知)에 해당하고, 성(性)은 배우지 않고 본성대로 하는 것으로 성인(聖人)을 이르고 교(敎)는 가르침을 받아야 비로소 선행을 하는 현인(賢人)을 이른다.


# 敬義齋(경의재)


경의재/사진-이승준 기자‘敬義’는 '주역' '곤괘(坤卦), 문언전(文言傳)'에 “군자는 경으로서 내면을 곧게 하고 의로서 외면을 바르게 한다. 〔君子 敬以直內 義以方外(군자 경이직내 의이방외)〕”는 구절에서 인용했다. 경(敬)으로서 내면을 수양하고 ,의(義)로서 외부적 행동의 판단준거를 삼는다는 뜻이다.


# 주사(廚舍)


서원의 관리인아 거주하는 곳으로 사당을 관리하는 고지기, 유사를 보좌하는 장무 등이 있고 , 유생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역할과 향사시 제수를 준비하는 일을 한다. 병산서원의 주사는 안동지방 특유의 뜰 집으로 안마당을 중심으로 口형태의 구조를 가진다. 헛간, 고방, 방앗간 ,부엌, 장돋대 등이 돌아가면서 배치된 보조 공간이다./사진-이승준 기자, 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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