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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3] 윤장대 꽃살문이 아름다운 절...경북 예천 '용문사'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1-09-19 03:54:24
  • 수정 2024-04-02 03: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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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예천 용문사 보광명전/사진-이승준 기자 [이승준 기자] 용문사는 870년 (신라 경문왕 10년) 두운 선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해온다. 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를 정벌하러 내려가다 이 사찰을 찾았으나 운무가 자욱해 지척을 분간치 못했는데, 어디선가 청룡 두 마리가 나타나 길을 인도했다 해 용문사라 불렀다고 한다.


고려 명종 때 '용문사 창기사'로 개명했으나 조선 세종대왕의 비 소헌왕후의 태실을 봉안하고 '성불사 용문사'로 다시 고쳤고, 정조 때 문효세자의 태실을 이곳에 쓰고 '소백산 용문사'로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광명전에서 내려본 용문사 전경/사진-이승준 기자임진왜란 시 승병들의 지휘소로 이용됐던 자운루가 용문사에 아직도 남아있어 호국불교의 기풍을 후손들에게 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윤장대(보물 684호)를 비롯 성보문화재 10여점이 현존하고, 조선 숙종 때 조성된 목각탱화(보물 89호)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특히,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한 윤장대를 돌리면 번뇌가 소멸되고 공덕이 쌓여 소원이 성취된다고 하여 예로부터 참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 대장전 


대장전/사진-이승준 기자

대장전은 용문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이다. 용문사의 주불전인 보광명전과 나란히 서 있는 대장전은 경전을 봉인하는 전각으로, 안에 안치된 2좌의 윤장대로 더욱 유명하다. 대장전은 초창부터 중창까지 기록이 잘 남아있다. 


이 건물의 이력을 알려주는 기록으로는 '중수 용문사기'(1185)와 '속용문사적기'(1688), '예천용문산창기사대장전중수상량문'(1767, 이하 '중수상량문') 등이 있다. 


'중수용문사기'를 보면, 1173년에 2좌 윤장대를 안치할 3칸까지 건물을 지었다고 하나, 현 건물의 모습은 초창 당시의 건물이 아니고 조선시대에 중수가 거듭돼 새롭게 지어진 건물로 보인다. 


사진-이승준 기자

1767년 대장전 중수 때 적은 상량문에는 1173년의 초창뿐만 아니라 1467년, 1534년, 1597년, 1665년의 중수 연대가 순차적으로 기록돼 있다. 이 중 1665년 중수 기록을 '속용문사적기'에서는 1670년으로 적고 있어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는 옮기는 과정에서 생긴 착오라기 보다 1665년과 1670년에 거듭된 보수의 기록으로 추정된다. 


'속용문사적기'에서 당시 대장전 수리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와 같은 표현은 적묵당의 '構' 범종루의 '建', 광명전의 '立', 지장전의 '作', 응향각의 '成', 삼강당의 '設', 만월당의 '起' 등 과는 엄연히 다른 표현으로 건물 전체의 중수가 아니라 부분적인 수리를 의미한다. 


지금까지 대장전은 '속용문사적기'의 수리 기록에 근거해 정교하고 수준 높은 치목과 장엄, 그리고 내부에 봉안된 아미타삼존불과 목각탱의 조성시기인 1684년과 연결해 17세기 건물로 보고 있다. 


국보 제328호 윤장대/사진-이승준 기자

그러나 세부 부재를 살펴보면, 공포의 쇠서가 유연하게 올라가기 시작하고, 공포를 비롯해 건물의 내.외부에 연꽃의 장식요소가 강조됐고, 측면의 칸수와 고주의 처리가 후대에 주로 쓰이는 수법이라는 점에서 18세기에 조성됐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아미타삼존불과 목각탱이 1683년에 세워진 금당에 봉안키 위해 제작됐다는 사실이 새로 밝혀졌다. 


대장전은 윤장대와 건축적 수법 외에도 건물 외.내부의 용과 물고기 장식이 눈길을 끈다. 용과 물고기는 물과 관련된 상징물로, 이는 "일찍이 서역의 구담씨가 팔만대장경 전장을 용궁에 안치했다. 이로 인해 대장전이 세워졌다."는 '중수상량문' 내용과 상통한다.


건물의 현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전형적인 다포계 맛배집으로 처마는 겹처마이다. 측면의 칸수도 2칸으로 계획된 것으로 보면, 1767년 중수시 완성된 형태로 보인다. 공포는 내.외로 2출목이고 삼분변작에 가까운 건물이다.


# 보광명전


예천 용문사 보광명전/사진-이승준 기자

보광명전에 봉안된세 부처님 중 아미타불산은 보물 제1637호 예천 용문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으로 2010년 2월 4일에 지정됐다./사진-이승준 기자

우리나라보다 중국에서 더 인기를 얻고 있는 포대화상/사진-이승준 기자보광명전 내부 중앙에는 높은 수미단 위에 삼존불이 봉안됐다. 삼존불은 지권인을 결한 본존인 진리의 법신불(法身佛)인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서방 극락정토의 주존불인 아미타불(阿彌陀佛)과 동방유리광세계의 주존불인 약사불(藥師佛)을 함께 모셨다. 보광명전에 봉안된 세 부처님 중 아미타불상에서는 1515년에 중수한 발원문이 발견됐다.


# 명부전 


명부전/사진-이승준 기자

명부전은 대장전의 동쪽에 있고, 남서향을 하고 있다. 용문사의 배치축과 일정한 배치관계는 없이 지형의영향으로 대장전에서 적당히 떨어진 위치에 놓인 것으로 보인다. 


'속용문사적기續龍門事蹟記'에 의하면 1649년에 보광전의 동쪽에 지장전을 짓고, 1682년에 다시 시왕전을 지었다고 하는데 그 위치는 적혀 있지 않다. 다만 실적(實籍)과 신경대사(神鏡大師)가 판불과 함께 시왕상十王像을 조성하는데 힘을 썼다는 기록이 있어 현존하는 명부전이 1682년에 지은 시왕전임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명부전은 조성 이후 이렇다 할 중수기록이 없다. 현재 명부전 내부에 걸려 있는 '용문사명부전개채여단확기'(1884)를 통해서 조선말의 현황은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개채(改綵)와 단확은 단순히 지장 및 시왕상의 색을 다시 칠하고 건물에 단청공사를 다시 한 것뿐만이 아니라 건물의 흙벽을 다시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명부전은 존상의 개수가 많기 때문에 측면과 후면에 문을 설치하는 예가 드문데 만약 문을 설치하게 되면 기둥에 장부구멍이 생긴다. 하지만 이 건물의 경우 측면과 후면의 기둥에서 장부구멍의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계획 당시부터 지장삼존과 명부 시왕을 봉안키 위한 건물로 볼 수 있고, 조상시기와 건물의 결구 수법 등을 비교해 볼 때에도 상을 조정했을 당시에 세워진 건물로 생각된다.


현재 명부전은 전면과 후면의 공포양식에 큰 차이를 보인다. 전면의 공포는 조선 말기의 공포인 반면에 후면은 쇠서의 곡서의 곡선이 완만한 주삼포식(柱三包式)의 공포로 전면에 비해 세련된 조형미를 가지고 있어 조성시기를 17세기 후반까지 올려볼 수 있다. 특히 측면에 고주가 직접 종보를 받치는 수법은 측면의 고주가 대들보를 받치고 있는 대장전의 가구수법보다 선행하는 수법으로 17세기 후반에 중창돼 가구법의 기본형식을 그대로 유지한 채 현전하는 것으로 보인다.


# 응진전


응진전/사진-이승준 기자

대장전 서편 위쪽에 위치한 응진전은 16나한상을 모신 전각으로 십육전(十六殿)이라고도 한다. 


속용문사적기續龍門事蹟記」에 의하면, 이 전각은 17세기 중엽 학문(學文)에 의해 건립됐다. 응진전은 1785년에는 자하루와 함께 중창됐고, 1884년에는 명부전과 함께 보수됐다. 


응진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으로, 어칸에 분합문(分閤門)으로만 출입이 가능하다. 건물 내부의 삼면에는 많은 상이 봉안돼 있다. 이를 위해 측면에 문을 내지 않고 들창을 설치 한 것으로 생각된다. 들창은 채광과 환기를 위한 것이다. 수서와 앙서가 한 쌍을 이루고, 연봉과 봉두로 장식된 전형적인 주삼포(柱三包) 건물로 기둥 사이의 공포대에는 화반이 놓였고 뒤뿌리가 짧은 부연을 달았다. 투박한 익공의 초가지 표현이나 나지막한 천정, 소규모 평면에 맞는 가구 처리 등에서 19세기 후반 혹은 이보다 늦은 시기에 중수 과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영남제일강원 


영남제일강원/사진-이승준 기자

漢武玉堂塵已沒

石崇金谷水空流

光陰乍曉仍還夕

草木?春卽到秋

處世若無毫末善

死將何物答冥侯    


한무옥당진이몰석숭금곡수공류광음사효잉환석초목재춘즉도추처세약무호말선사장하물답명후

     

한무제의 궁궐은 이미 티끌이 되었고

석숭의 별장에도 쓸쓸히 물만 흐르네

세월은 빨라 새벽이다 싶으면 이내 곧 저녁이 되고

초목은 겨우 봄인 듯했는 데 어느덧 가을이 되고마니

세상을 살면서 털끝만한 선행도 못하면

죽어서 염라대왕에게 무엇으로 대답하리.


처음엔 띠가 들쑥날쑥 자라난 것일거라 말했는데,

불이 나서 다 타고 보니 원래 땅바닥이 고르지 않았구나.


# 진영당 


진영당/사진-이승준 기자대장전과 명부전 사이에 자리한 진영당은 과거 용문사에 주석 했던 선사들의 진영을 봉안하는 곳이다. 현재 이전각에 '진영당眞影堂'이란 편액이 걸려 있지만 본래 기능을 상실하고 사찰 종무소로 사용하고 있다. 편액 외에 건물 전면 고주에는 일제강점기에 작성한 진영당에 관한 현판이 있다. 이 현판 기록에 의하면 이 전각은 조사전(祖師殿)인 동시에 시왕전의 노전이었다.

 

1681년에 희인(希仁)대사가 신암자(新庵子)를 이건한 뒤 1893년에 혜옹강백이 중수하고 1934년에 주지 이광하(李晃夏)가 중수한 후 이 어 1935년 다시 중수했다. 


이 외에 진영당으로 추정되는 건물로 '속용문사적기續龍門事蹟記'에 적힌 1649~1670년에 건립된 삽삼전이 있다. 삽삼은 삼십삼명의 조사, 즉 조사전을 가리키는 것 같지만, 삽삼전을 지은 행변과 신암자를 이건한 희인이 일치하지 않고 조성시기도 맞지 않는다. 


진영당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건물로 향 우측 전면 2칸은 통칸으로 사용하고 있고, 향 좌측의 전면 4칸은 앞쪽에 툇마루를 두고 있는 홑처마 납도리 집이다. 현재의 평면으로 추정해 보면, 후면의 퇴칸은 감(龕)이었을 것이고, 그 앞의 실(室)과 툇마루는 예를 올렸던 사당형 공간이었을 것이다. 


# 자운루 


자운루/사진-이승준 기자

자운루는 대장전에 대응하는 문루(門樓)로, 보광명전과 대응하는 해운루와 나란하게 서 있다. '속용문사적기續龍門事蹟記'에는 81년에 만세루(萬世樓)가 지어졌다고 한다. 이 만세루가 지금의 자운루이다.


용문사와 같이 경사가 심한 지형에 자리잡은 사찰에서는 건축물을 통해 이를 극복키 위한 것이다. 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문루이다. 경사면에 위치한 지운루는 앞쪽에서 보면 중층이고, 뒤쪽은 단층인 지계형(地階形)건축이다. 누의 역할은 사찰마다 약간 차이를 보이는데 주로 휴식과 수행의 공간으로 사용되거나 출입문의 역할을 하는 등 복합적인 성격을 가진다. 


자운루는 평면형의 구조나 대장전 쪽을 제외한 좌측과 정면에 개폐가 가능한 벽체가 설치돼 있는 점으로 미루어 수행과 휴식의 공간으로 사용됐다고 본다.


자운루/사진-이승준 기자

자운루 입구/사진-이승준 기자

현재 자운루의 전면창호는 창틀 가운데 사이기둥이 있는 영쌍창이고, 창방의 폭은 수장폭(修粧幅)이다.측면은 3칸으로 가운데 내주(內住)를 관통하는 뜬창방이 있고, 측면 가구와 이를 인접하는 가구들을 연결하는 충량(衝樑) 역할의 부재가 사용되었다. 이러한 특징은 현전하는 누 건축에서 연대가 앞서는 누에서 보이는 수법으로 비교적 17세기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진주를 이주해 평면의 중간에 세움으로써 대들보의 길이를 줄이는 수법을 사용했다. 익공은 초익으로 전형적인 사찰익공의 모습을 하고 있다. 진입형식은 누하진입(樓下進入)이 아니라 우각부진입(隅角部進入)방식의 문루이다.


# 원통전


원통전/사진-이승준 기자

원통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 사찰의 주된 전각일 때 붙이는 이름이다. 사찰 내의 1개 전각일 때는 관음전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중국에서는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강조해 대비전이라고도 한다. 관세음보살은 다른 부처나 보살과 달리 현세적인 이익을 주는 보살로, 모습이 다양하고 중생이 원하면 어느 곳에나 나타난다. 


성관음(聖觀音).천수천안관음(手千眼觀音).마두관음(馬頭觀音).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준제관음(准提觀音).불공견 삭관음의 칠관음이 대표적이다. 이 전각에는 관세음보살상이 단독으로 모셔진다. 


협시로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이 있으나 이들은 대부분 후불탱화에 나타난다. 관세음보살상은 봉오리 상태의 연꽃을 왼손에 들고, 오른손에는 감로병을 들고 있다. 불상 뒤에는 대부분 관음탱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것으로는 보물 제916호로 지정된 법주사원통보전과 낙산사원통보전이 있다.

    

# 범종각 


범종각/사진-이승준 기자

범종각은 범종을 달아 놓은 전각으로, 당호는 절에 따라 범종루.종각.종루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단층일 경우 각(閣)이라 하고 중층일 경우 루(樓)라고 한다. 규모가 큰 사찰에서는 중층으로 세워 법전사물(法殿四物)을 함께 두기도 한다. 전각의 외양은 대개 기둥과 목책이 있는 사각의 단층 건물이거나, 2층 누각이다. 보통 불이문(不二門)을 지나 사찰 경내에 들어서면 법당 앞에 있거나 일주문 왼쪽에 있는데, 중층 누각의 경우는 다르다. 


범종/사진-이승준 기자

경상북도 영주 부석사(浮石寺)의 경우는 해탈문인 안양루 아래에 있고, 청도 운문사(雲門)의 경우는 누각 밑이 바로 사찰 진입로이다. 전라북도 완주 송광사(松光寺)의 경우는 평면이 십자형이고, 영암 불갑사(佛甲寺)의 범종루는 6각의 중층 누각으로, 1층에 목책을 두르고 범종을 안치했고 난간을 두른 2층 다락은 비워뒀다. 


고창 선운사(禪雲寺)에서는 천왕문 2층에 범종과 법고를 함께 둔다. 범종각에 범종과 함께 두는 법전사물은 법고(法鼓雲板).목어(木魚)이다. 법고는 바닥에 두고 운판과 목어는 보나 도리에 매단다.    

 

# 산신각 


산신각/사진-이승준 기자

산신각은 산신을 모시는 전각이다. 사찰에 따라서는 산령각(山靈閣)이라고도 부른다. 또 삼성각(三聖閣)을 둬 칠성신.독성(獨星)과 함께 모시는 경우도 흔하다. 본래 산신은 도교에서 유래한 신으로, 불교가 전래되기 전에 많이 믿던 토착신이다. 특히 산지가 70%나 되는 한국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 말에 이르기까지 산신신앙이 널리 유행했다. 이 산신이 불교에 수용되면서 호법신중(護法神衆)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불교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므로 산신도 비교적 일찍 불교에 수용됐을 것으로 여겨지나, 산신각이 세워진 것은 조선중기 이후부터이다. 대개 전각의 뒤쪽에 세우며, 크기는 정면1칸, 측면 1칸이 보통이다. 산신각 내에는 산신을 그린 탱화를 모시는데 대개 흰수염, 대머리, 긴 눈썹이 휘날리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손에는 하얀 깃털부채나 파초선.불로초 등을 들고 있고 주로 봉래산.영주산.방장산 등의 삼신산을 배경으로 한다.


# 일주문 


용문사 일주문에는 현재 ‘小白山龍門寺’란 편액만이 걸려 있다./사진-이승준 기자

사찰의 첫 문인 일주문은 기둥 2개에 지붕을 올린 구조로 사찰의 경계를 표시한다. 일주문은 성(聖)과 속(俗)을 구분 짓는 종교적 의미 뿐만 아니라 사(邪)됨을 막는 벽사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일주문에는 사명(寺名)과 사찰이 소재한 산명(山名)이 적힌 편액 혹은 ‘자하문(紫霞門)’,‘ 조계문(曹溪門)’과 같은 편액이 걸리기도 한다. 용문사 일주문에는 현재 ‘小白山龍門寺’란 편액만이 걸려 있다.


'속용문사적기'에는 1608년에 시작된 용문사 창의 막바지 불사로 1689년에 건립될 예정이라고 적고 있다. 이후의 중 창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공포의 조각수법이나 장식은 17세기보다는 18세기 후반의 건축적 형식이 강하게 드러난다. 대장전의 공포와 유사 한 것으로 미뤄 대장전 중창과 궤를 같이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주문 추녀마루에는 얼마 전까지도‘昭和十三年’명 암막새가 놓여있어 1938년에 보수가 됐음을 알수 있다.


공포대는 두 개의 간포(間包)와 두 개의 귀포로 이뤄져 있고, 출목은 앞뒤 모두 2출목이다. 공포는 하나의 수서와 두개의 앙서, 그리고 권비형(拳鼻形) 운공(雲?)으로 이뤄져 있고, 지붕 형태는 우진각 지붕으로 중국의 패루(牌樓)와 닮았다.


# 회전문 


회전문에는 사방을 지키고 불법을 수호하는 4명의 천왕상이 있고 좌우 2구씩 목책안에 안치돼 있다/사진-이승준 기자

회전문에는 사방을 지키고 불법을 수호하는 4명의 천왕상이 있고 좌우 2구씩 목책안에 안치돼 있다. 보광명전으로 들어가는 왼쪽 앞쪽에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이, 뒤쪽에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이, 오른쪽 앞쪽에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이, 뒤쪽에 동방 지국천왕 (持國天王)이 배치돼 있다. 


천왕상/사진-이승준 기자

천왕상/사진-이승준 기자

사천왕상은 흙을 사용해 의자에 걸터앉은 자세로 천왕이 든 지물은 다문천왕이 당(幢) 을, 광목천왕은 용(龍)과 보주(寶珠)를, 지국천왕이 비파를, 증장천왕이 검을 들고있고 얼굴은 불법을 수호하기 위해 험상궂은 표정을 하면서도 눈썹과 수염 등에서 부드럽고 해학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사천왕 발아래에는 악귀들이 천왕의 다리를 받쳐 들고 있다. 1688년에 사천왕상이 제작됐다.


천불전/사진-이승준 기자

천불전 옆에 위치한 석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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