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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4] 천년 우리의 숨결!...고려선원 청평사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1-09-26 02:25:07
  • 수정 2024-04-02 03: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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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평사 전경/사진출처-춘천시 [이승준 기자] 강원도 춘천 청평사는 영현(永玄)선사에 의해 973년(광종24)에 백암선원(白巖禪院)으로 창건된 사찰로 이자현(李資玄)이 문수원(文殊院)으로 절 이름을 고치고 중창해 고려 중.후기에 불교계의 한 축으로 활동하는 거사불교(居士佛敎:스님이 아닌 일반 속세의 남자)의 요람이 됐다.


이후 이암(李嵒)이 은거해 또다시 거사불교의 맥을 이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설잠(雪岑) 김시습이 스님이 돼 이곳에서 수행했다. 이처럼 거사불교가 번창하던 시기에 대감(大鑑)국 사 탄연(坦然)이 쓴 진락공중수문수원기(眞樂公重修淸平山文殊院記)와 이암이 쓴 문수사장경비(文殊院藏經碑)가 건립됐고, 이는 후대에 한국의 거사불교와 함께 서예사적으로 주목받는 사찰이 됐다.


또한 이자현은 청평사에 37 년간 주석하면서 굴산문의 혜소(慧炤)국사와 그의 제자였던 대감국사 탄연과 교유했고, 원진국사 승형(承逈)에게도 영향을 주어 굴산문의 법맥을 잇고 있다. 또 청평사의 10여 곳에 건물을 짓고 영지(影池)를 조성해 고려시대 별서문화(別墅文化)의 한 단면을 보여줬다.


고려 후기에는 태정황후의 지원으로 중흥기를 맞았고 원(元)나라 황실의 원찰이 되었고,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보우(普雨)가 주석하면서 명종의 원찰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영향은 가람배치에도 영향을 주어 산지중정형의 기본 가람형태를 띠면서도 조선시대 원찰들이 갖는 '□'자형 가람배치를 따르고 있다.


선동교/사진-이승준 기자법맥(法脈)을 보면 보우가 폐지됐던 승과를 부활하고 이를 통해 등장한 휴정의 법맥을 이은 고승들이 주석하게 된다. 즉, 부용영관(芙蓉靈觀)의 법맥인 부휴선수(浮休善修)와 청허휴정(淸虛休靜)계에서 환적의천(幻寂義天)은 청허휴정-편양언기-환적의천으로 이어지는 법계도를 보여주고, 환성지안은 청허휴정-편양언기-풍담의심-월담 설제-환성지안의 법맥을 가지고 있다. 


이는 휴정의 수제자로 각기 편양언기와 월담설제의 법을 이어 청평사를 사상사적으로 한층 승격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가람 역시 보우에 의해 일신 중건된 후 임진왜란 당시에도 소실되지 않았고, 지안(志安)에 의해 대대적인 보수를 이뤄져 법맥도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출가승과 거사의 주석은 청평사가 폐사되지 않고 존속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고려 중기에는 거사불교의 중심지와 탄연의 진적이 남아 있는 사찰로, 고려말에는 원나라의 원찰로서 기능하면서 이암의 진적이 남는 사찰이 됐다.


이러한 면을 볼 때 청평사는 영서지역에 가장 오래된 고찰일 뿐 아니라 사상사와 서예사에서 매우 주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고, 또한 거사불교 와 굴산문의 법맥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조선시대의 원찰형 가람배치를 유구를 통해 살필 수 있는 사찰이기도 하다. 


또한 고려 중기에 예종이 차(茶)를 여러 차례 이자현에게 하사해 현대에서는 이자현과 차 문화를 재조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청평사는 춘천과 강원도를 넘어 한국불교문화사에서 주목을 받는 사찰이다.


# 청평사지(淸平寺址)/강원도 기념물 제55호


측면에서 바라본 경운루/사진-이승준 기자고려 광종 24년(973)에 당나라 승려인 영현선사가 이곳에 절을 세우고 백암선원(白巖禪院)이라고 했다.


이곳은 얼마 뒤 문을 닫았다. 문종 22년(1068)에 이 지역에서 벼슬을 살던 이의가 절을 고치고 새로 열면서 이름을 보현원(普賢院)이라고 바꾸었고, 선종 6년(1089)에는 이의의 아들인 이자현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하면서 많은 건물을 새로 짓고 이름을 문수원(文殊院)이라고 했다. 이후 조 선 명종 때 보우대사가 절을 고쳐 지으면서 이름을 청평사(淸平寺)로 바꾼 것이 오늘까지 이르고 있다. 


청평사는 국보로 지정됐던 극락전 건물과 고려 최고의 명필가인 탄연이 쓴 문수원기가 전해 내려왔는데 한국 전쟁으로 인해 소실됐다. 이들은 1975년과 2008년에 각각 복원됐다. 


# 회전문(廻轉門)/보물 제164호


회전문(廻轉門)/보물 제164호/사진-이승준 기자1557년경 보우대사가 청평사를 대대적으로 중건할 당시에 세운 사찰의 중문(中門)으로 옆모습이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의 형태로 대들보가 3개인 3량식 가구(架構)이다. 주심포(柱心包)계의 익공 건물로 조선 전기에 세워진 매우 귀중한 건축물이다.


회전문의 중앙부 위쪽에는 홍살을 첨가해서 홍살문의 기능도 함께 하기 위해서 했다. 이는 영암 도갑사의 해탈문과 같은 양식이다. 사찰에 들어설 때 만나게 되는 두번째 문인 사천왕문을 대신하는 것으로, 가운데 칸을 출입문으로 좌우 한 칸씩은 사천왕의 조각상을 세우거나 그림을 걸도록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회전문에서 바라본 경운루/사진-이승준 기자중생들에게 윤회전생을 깨우치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름은 청평사 창건설화인 공주설화와 연계돼 윤회를 한다는 의미로 회전문이라고 불린다. 또한 불교의 경전을 뒀던 윤장대(輪藏臺)를 돌린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것으로도 추정된다.


# 경운루(慶雲樓)


경운루/사진-이승준 기자사진-이승준 기자사진-이승준 기자 회전문을 지나 회랑과 동일한 축선인 동-서로 팔작지붕의 형태를 갖춘 2층 누각(樓閣)이다.


보통 산지 사찰에서 사천왕문을 통과해 누각의 아랫부분을 지나 법당 앞마당으로 나아가는 방식인 누하진입 (樓下進入)으로 회전문-경운루-대웅전으로 연결된다.


조선시대 기록에는 강선루(降仙樓)라고 부르다, 복원하면서 경운루로 고쳤다. 누각의 옆으로는 회전문과 같이 회랑으로 복원됐다. 경운루를 중심 으로 동-서로 각 4칸씩 건축됐다.


# 관음전(觀音殿)


관음전/사진-이승준 기자 관음보살을 모신 곳으로 관음보살이 주원융통(周圓融通, 두루 걸림이 없다는 뜻)하게 중생의 고뇌를 씻어주는 분이라는 뜻에서 원통전(圓通殿)이라고도 한다.


관음보살은 모든 환란을 구제할 뿐 아니라 중 생의 안락을 불가사의한 인연과 신력으로 돕기 때문에 자비를 상징하는 보살이기도 하다. 


관음탱화관음전 내에는 감로병을 얹힌 연꽃을 들고 연화좌(蓮華座) 위에 앉은 관음상과 후불탱화로 관음보살과 협시(脇侍) 인 남순동자(南巡童子)를 묘사한 관음탱화(觀音幀畵)를 봉안했다.


관음전은 맞배지붕의 형태를 하고 있고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전면의 1칸은 퇴칸(좁은 칸)으로 향교에서 대성전처럼 실내가 아니라 실외로 건축됐다. 조선시대에는 관음전이 향적당(香積堂)이고 나한전이 사성전(四聖殿)이었고 사성전 구역에 구광전(九光殿)도 함께 있었다고 한다.


# 나한전(羅漢殿)


나한전/사진-이승준 기자 석가모니불과 이 세상에 머물면서 정법(正法)과 중생을 수호한다는 집단으로서의 부처님의 열여섯 제자인 십육나한(十六羅漢)을 모신 곳으로 응진전(應眞殿)이라고도 한다.


후불탱화로 석가모니께서 제자들에게 설법한 모임을 간략하게 묘사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를 봉안했다.


후불탱화로 석가모니께서 제자들에게 설법한 모임을 간략하게 묘사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사진출처-청평사나한전은 맞배지붕의 형태를 하고 있고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전면의 1칸은 퇴칸(좁은 칸)으로 향교에서 대성전처럼 실내가 아니라 실외로 건축됐다. 조선시대에는 관음전이 향적당(香積堂)이고 나한전이 사성전(四聖殿)이었고 사성전 구역에 구광전(九光殿)도 함께 있었다고 한다.


#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현세불인 석가모니를 봉안하므로 사찰에서 중심을 이루는 건물이다. 가장 중요한 곳으로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 협시보살(脇侍菩薩)로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모셨다.


대웅전문수보살은 '지혜'를, 보현보살은 '행을 실천'하는 보살이다. 두 보살의 손에 든 연꽃 위에는 문수 동자와 보현동자가 두 손 모아 합장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일반사찰에서 보기 드문 형태이다.


후불탱화로 석가모니께서 제자들에게 설법한 모임을 묘사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와 불단 좌우로 모든 곳에 부처가 존재한다는 다불사상에 근거해 천불을 묘사한 천불탱화(千佛幀畵), 영혼을 천도하는 불교의식에 사용된 감로탱화(甘露幀畵),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 중 대예적금강신(大穢跡金剛神)을 주축으로 묘사한 신중탱화(神衆幀畵)를 봉안했다.


영산회상도1990년대 초에 중건된 대웅전은 정면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의 형태이고, 1980년대 발굴조사보고서에 의하면 활주가 확인됐다는 것으로 보면 팔 작지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 앞 계단 법당을 오르는 7단의 대형계단이 있는데 계단의 옆을 마무리한 소맷돌에는 태극문양과 연화문이 정교하게 조각돼 있다. 이는 양주 회암사지의 계단과 매우 유사하다. 이는 청평사와 회암사를 중창한 보우대사의 설계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태극문양은 왕실과 관련 있는 건축물에서만 새기는 것을 감안하면 청평사는 왕실과 연관이 있었음을 나타낸다. 조선시대에는 대웅전과 의미는 같지만 능인보전(能仁寶殿)이라고 불렀다.


# 극락보전(極樂寶殿)


극락보전/사진-이승준 기자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협시보살(脇侍菩薩)로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셨다.


아미타불은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부처님으로 죽은 이의 극락왕생과 함께 중생들의 수명장수와 안락을 도와주고 관음보살은 지혜로 중생의 음성을 관해 그들을 번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 대세지보살은 지혜의 광명으로 모든 중생을 비춰 끝없는 힘을 얻게 한다.


지장탱화이상향인 극락이 서쪽에 있으므로 보통 동향으로 배치해, 예배하는 사람들이 서쪽을 향하도록 배치한다.


후불탱화로는 아미타극락회상도(阿彌陀極樂會上圖), 대웅전과는 다른 유형으로 제석천(帝釋天)과 대범천(大梵天), 동진보살(童眞 菩薩)을 중심으로 묘사한 신중탱화(神衆幀畵)를 봉안했다.


신중탱화 보우대사가 회전문과 함께 1555년경에 지었고 상량문을 1772년에 중수, 1889년에 다시 보수했다. 극락전은 당시 최고의 기술로 지어 궁 궐 못지않게 화려한 건물로 국보(구 국보 115호)로 지정되기도 했었다. 이후, 한국전쟁 직전에 극락전이 불에 타고, 1977년에 새로 지어졌다. 불타기 전에는 전면 1칸, 측면 1칸이 실외로 설계됐다. 이는 향교의 대성전과 같은 양식이다. 현재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 모두 실내로 새롭게 복원됐다.


# 삼성각(三聖閣)


삼성각/사진-이승준 기자 삼성각은 산신(山神), 칠성(七星), 독성(獨聖)을 함께 모시고 있는 곳이고, 나눠 모셨을 때는 '칠성각(七星閣), 독성각(獨星閣), 산신각(山神閣)'이라 한다.


삼성은 각각 재물과 수명과 복을 관장하는 존재로서 전통 신앙인 삼신신앙(三神信仰)과 함께 하는 것이다. 


'산신'은 산에 있는 신을 의미하고, '칠성'은 북두칠성을 말하는 것으로 별나라의 주군(主君)으로 인간의 수명과 복을 담당하고 있다고 하며, '독성'은 나반존자(那般尊者)라고도 불리는데 십이인연(十二因緣)의 인연을 혼자서 깨달아 성인의 위치에 올라서 말세의 중생에게 복을 내린다고 한다.


칠성, 독성, 산신탱화/사진출처-청평사 내부는 칠성을 불교의 호법선신으로 수용하고 이를 의인화해 묘사한 칠성탱화(七星幀畵)를 중심으로 좌우로 석가모니의 제자들인 십육나한 중 첫 번째 존자인 독성존자를 단독으로 그린 독성탱화(獨聖 幀畵), 산의 신령이라고 믿었던 호랑이를 신격화시켜 그린 산신탱화(山神幀畵)를 봉안했다.


한국전쟁으로 소실돼 극락전과 함께 1977년에 건립됐다. 불타기 이전의 명칭은 산신각이다.


# 범종각(梵鐘閣)


범종각/사진-이승준 기자불전사물(佛殿四物) 가운데 범종(梵鐘)만을 봉안해 범종각이라 부른다. 범종은 청정한 불사(佛寺)에서 쓰이는 맑은 소리의 종이라는 뜻이지만 지옥의 중생을 향해 불음을 전파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다. 1994년에 범종각 신축과 범종을 주성했다.


# 요사채(寮舍)


요사채 전경 

요사체 시주 공덕비/사진-이승준 기자스님과 일반대중이 기거하는 공간으로 승당(僧堂)이라고도 부른다. 요사채가 지어지기 전에는 밭으로 이용됐으나 1984년에 ⌟  자 형태의 승당이 완성됐다. 2010년대에 다시 ㄇ자 형태의 건물로 개축해 식당과 종무소 등으로 사용하고 있고 서쪽으로 ━자 형태의 2개 건물은 대중과 스님의 숙소로 활용하고 있다.


# 문수원기(文殊院記)


문수원기/사진-이승준 기자문수원기는 1125년에 이자현이 세상을 떠나고 5년이 지난 1130년 8월 고려 인종으로부터 진락공이란 시호를 받았다. 그 3개월 후인 같은 해 11월에 세워진 비이다.


비의 앞면은 청평사 창건과 중창, 이자현의 행적 등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고 고려 중기 문장가인 김부철(金富轍)이 짓고 대감국사 탄연(坦然)이 썼다. 비의 뒷면은 이자현을 추모하는 제문(祭文)으로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제자인 혜소(慧素)가 짓고 역시 탄연이 썼다. 이 비문은 간화선(看話禪)과 굴산문(崛山門)의 법맥 등 고려시대 불교사, 사상사, 서예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조선 순조년간(1801∼1834)에 편찬된 '춘천읍지'에 의하면 문수원기는 글자가 벗겨지고 떨 어진 채로 절 앞에 서 있다고 돼 있다. 1914년 훼손이 심하자 극락전으로 옮겨 보관하게 되댔. 그러나 이때 이미 비문의 절반 이상이 멸실된 상태였다고 한다. 


문수원기(뒷면)/사진-이승준 기자 

해방 이후에는 청평사가 북위 38°선의 경계선상에 있었기 때문에 주지승이 남한과 북한에 의해 자주 연행돼 사상 조사를 받는 사태가 발생하자 부인이 부처님의 가피가 없기 때문이라면서 극락전을 불태우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다시 피해를 입은 문수원기는 현재의 대웅전 자리에 있던 요사에 옮겨 보관하게 됐다. 그러나 6.25 전쟁 때 요사가 다시 불에 타면서 문수원기는 완전히 파괴됐다.


그 후 1968년 현재의 대웅전 자리에서 문수원기의 비편이 발견됨으로써 문수원기의 존재가 알려지게 됐고 1985년 5월 25일에는 대웅전 터를 발굴하던 중 일부의 비편이 새로 확인됐다. 그 후 문헌, 탁본 등의 비교 분석 작업을 통해 2008년에 복원됐다.

 

# 문수사장경비(文殊寺藏經碑)


비좌/사진-이승준 기자 문수사장경비는 1327년(충숙왕14)에 원나라에서 청평사에 대장경과 돈을 보내 온 것을 기념키 위해 그 해에 이제현이 글을 짓고 이암(李嵒)이 써서 청평사에 건립한 비문이다.


비의 앞면을 이제현이, 비의 뒷면을 승려 성징(性澄)이 지었다. 글씨는 비의 뒷면은 자료가 전하지 않기 때문에 누가 썼는지 알 수 없으나, 앞면은 이암이 쓴 2면비이다. 1327년 5월에 건립됐다.


조선 후기에 파손돼 전하지 않으나 탁본이 남아 있어서 현재 복원 작업 중에 있다. 조선 순조년간(1801∼1834)에 편찬된 '춘천읍지'에 의하면, 장경비는 절단돼 자획도 보기 어렵다고 서술돼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이미 파손이 심각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청평사 중창비(淸平寺 重創碑)


청평사 중창비/사진-이승준 기자 

청평사 중창비/사진-이승준 기자 석진스님과 제원스님의 재임기간에 있었던 청평사의 중창을 기념해 불기2535년(서기1991)에 건립한 비로, 대웅전 동쪽에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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