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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66] '독립신문' 발간하고 독립협회(獨立協會) 결성한 '서재필 박사'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1-09-30 22:10:54
  • 수정 2024-04-02 05:4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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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 서재필 선생. 서재필 박사는 조선의 개혁을 위해 몸부림치던 혁명가였으나 정변이 실패하자 미국으로 망명해 의사가 됐다. 이후 두 차례 귀국해 조선의 자주독립과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헌신했으나 그의 뜻을 완전히 펼치지는 못했다. 

[박광준 기자] 독립운동가.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 등 개화파의 일원으로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자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해 의사가 됐다. 미국으로 귀화했으나, 일시 귀국해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독립협회(獨立協會)를 결성했다. 일제 강점기에도 독립운동에 여러 방향으로 도움을 줬고, 광복후에는 미군정청고문으로 일하다가 미국에서 영면했다.


본관은 대구(大丘)이고, 호는 송재(松齋)이다. 영어명은 필립 제이손(Philip Jaisohn)이다. 아버지는 서광언(徐光彦)이고, 외가는 성주이씨로 17세기 초 이조참판 이성(李珹)이 보성에 내려와 터를 잡았다. 


1864년(고종 1) 1월 전라남도 보성군(寶城郡) 문덕면(文德面) 가천리(可川里)에서 출생했다.  보성은 그의 외갓댁이 있는 곳이었다. 5세 경 본가가 있는 충청남도 논산 은진면(恩津面)에서 성장하다가, 둘째 아들로서 7촌 당숙 서광하(徐光夏)의 집으로 양자 입적됐다. 


서재필 동상/사진-박광준 기자

그러나 서재필의 총명함이 나타나자, 안동김씨 세도가 출신인 양어머니의 주선으로 7세 경에 서울로 올라와 양어머니의 동생인 외숙 판서(判書) 김성근(金聲根) 밑에서 성장하면서 과거를 준비했다. 1882년 3월 19세 때 알성시(謁聖試)에 합격했고, 교서관(校書館)의 부정자(副正字)에 임명됐다.


명문가에서 성장해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홍영식(洪英植).박영효(朴泳孝) 등 지도층 자제의 개화파 인사들과 교유했고 개화사상을 접하게 됐다. 1883년 김옥균의 권유로 일본의 도야마[戶山] 육군유년학교(陸軍幼年學校)에 입학해 8개월간 현대군사훈련을 받고 이듬해 5월 졸업했다. 귀국 뒤 궁궐수비대에 배치됐고 고종을 알현해사관학교의 설립을 진언했다. 그 결과 설립 승낙을 받았고 조련국(操練局) 사관장에 임명됐다.


1884년 12월 김옥균이 주도하는 갑신정변에 가담했고 왕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일을 맡았고, 갑신정변 신정부조직에서 병조참판 겸 정령관(正領官)으로 임명돼 활약했으나 정변의 실패로(3일천하)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서재필 동상 측면의 '독닙신문'/사진-박광준 기자 이들 망명객에게 일본이 냉담하게 대하자, 1885년 4월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다시 미국으로 망명했다. 국내에서는 역적의 가족으로 몰려 부.모.형.아내는 음독자살했고, 동생 재창(載昌)은 참형됐고, 아들(2세)은 보살핌을 받지 못해 굶어 죽었다.


처음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낮에는 노동하고 밤에는 영어 공부를 하면서 현지에 적응했다. 그 후 독지가 홀렌백(John Wells Hollenbeck)의 도움으로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베어시에 있는 해리 힐만 아카데미(고등학교)(Harry Hillman Academy)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1889. 6). 


다시 워싱턴시(Washington D.C.)로 이주해 1889년 컬럼비아대학교(지금의 조지워싱턴대학교) 의과대학(Columbian Medical College)에 입학, 낮에는 일하고 야간부에 다녔다. 가족도 모두 잃고 역적으로 몰려 귀국도 어려워진 상태에서 1890년 6월에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다. 


미군정 시절의 서재필.(앞줄 우측에서 네 번째)1893년 6월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 면허를 취득했다. 다음 해 미국 철도우편사업의 창설자(G.B. Armstrong)의 딸 뮤리얼 암스트롱(Muriel Amstrong)과 결혼했다. 그리고 모교에서 강사를 하다가 유색인 차별의 분위기 때문에 사직하고 병원을 개원했다.


조선에서는 갑신정변의 후유증에서 벗어나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개혁이 단행되었됐고 갑신정변 주도자에 대한 역적 누명도 벗겨졌다. 관직에 진출한 박영효(朴泳孝)가 1895년 미국에 들러 권유해 같은 해 12월 귀국했다. 이듬해 1월 중추원(中樞院) 고문에 임명됐다. 귀국한 뒤에는 미국 시민으로 행동하면서 이름도 미국명인 '필립 제이손'이나 한국명으로 표기한 '피재손'을 사용했다.


1896년 4월 정부예산을 지원받아 '독립신문'을 창간했고, 한편 배재학당에서 목요강좌를 진행해 계몽활동도 병행했다. 이상재(李商在).윤치호(尹致昊).이승만(李承晩) 등과 독립협회(獨立協會)를 결성했고(1896. 7), 이를 중심으로 만민공동회도 개최됐다. 


서재필(가운데)과 김규식(왼쪽 끝), 여운형.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정신을 혁파키 위해 모화관(慕華館)을 인수.개축해 독립관으로 바꾸고, 1897년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獨立門)을 세웠다. 이러한 활동에는 서재필은 외국인 신분이었으므로 앞으로 나서지 않고, 뒤에서 지도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수구파(守舊派) 정부와 러시아 일본측의 추방운동 영향으로 1898년 5월 다시 미국으로 출국했다. 당시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해육군 군의관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필라델피아에서 인쇄.문구사업(Philip Jaisohn & Company)을 하다가, 3.1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한국 선전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잡지 'The Evening Leisure'와 제휴, 한국문제를 세계 여론에 호소하는 한편 한국에 친화적인 성향의 미국인을 규합하는 '한국친우회'(The League of Friends of Korea)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후원키 위해 노력했다. 


이승만.정한경과 함께 '제1차 한인연합회'를 개최했고, 한국통신부를 설립해 Korea Review를 발간했다. 그 후 상해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활약, 1922년 워싱턴군축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연명서를 제출하고, 1925년 호놀룰루의 범태평양회의에 한국대표단 일원으로 참석해 일본의 침략을 규탄했다. 한국통신부 활동을 종료하고 국내 신문 및 잡지에 기고활동을 했다. 


서대문형무소 앞의 서재필 동상/사진-박광준 기자

펜실베이니아 의과대학원에서 의학공부를 1년 더 한 후, 여러 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했고, 1936년에는 개인 의원을 개업했다. 1942년부터 1945년 4월까지 미군 징병검사 의무관으로 자원봉사활동을 해 미국회로부터 공로훈장을 받았다.


광복을 맞은 후, 1947년 미군정장관 죤 하지(John R. Hodge)의 초청으로 귀국, 미군정청고문(美軍政廳顧問)으로 있는 동안 국민의 추앙을 받아 대통령 추대 연명을 받았으나, 국내 정치계와의 불화 및 시국의 혼란함을 개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1948. 9) 여생을 마쳤다.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고, 1994년 4월 8일 미국에서 전명운(田明雲) 의사의 유해와 함께 옮겨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2008년 5월 6일 미국 워싱턴시에 동상이 건립됐고, 워싱턴시에서 이날을 '서재필의 날'로 선포했다. 같은 해 7월 8일에는 그가 태어난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에 '서재필기념공원'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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