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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6] "당신은 부처님 이십니다"...마음의정원 '진관사'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1-10-01 10:30:42
  • 수정 2024-04-02 03:0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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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관사   입구(마음의 정원)/사진-이승준 기자

[이승준 기자] 북한산(삼각산) 서쪽 기슭에 있는 조계종 소속 고려시대의 고찰로, 불암사, 삼막사, 보개산 심원사와 함께 조선시대에는 한양 근교의 4대 사찰 중 하나였다.


진관사가 창건된 배경은 고려 현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진관조사의 은혜에 보답키 위해 지은 절이라고 전해진다. 고려 목종(제7대)이 아들이 없자 태조의 손자 욱(대량원군)을 세자로 책봉했는데 경종(제5대)의 대비였던 천추태후가 욱을 살해하려고 했다. 욱은 진관조사의 도움으로 진관사에 숨어 목숨을 건졌고 욱은 목종에 이어 현종으로 등극해 1011년에 진관사를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삼각산 진간사 일주문/사진-이승준 기자

조선시대에는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수륙재(水陸齋)가 열리는 근본 도량으로 춘추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수륙재란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를 달래면서 위로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의식으로, 이곳에서 조상의 명복을 빌고, 나랏일로 죽었어도 제사조차 받지 못하는 굶주린 영혼을 위해 재를 올렸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화재로 소실됐다가 1964년 이후 복원됐다. 진관사 법전으로는 대웅전, 명부전, 홍제루, 동정각(動靜閣), 나한전, 독성전, 칠성각, 나가원(那迦院), 객실 등의 건물이 있다. 


진관사 앞 극락교/사진-이승준 기자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안에 석가모니 불상과 미륵보살상, 제화갈라보살상을 모셨고, 비로자나 후불탱화와 석가모니 후불탱화, 노사나 후불탱화를 봉안했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장보살과 도명존자상, 시왕상, 동자상 등이 있고 지장보살상 뒤편에 지장 후불탱화가 있다. 명부전 옆의 독성전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독성상과 독성탱화, 산신탱화를 모셨다.


해탈문/사진-이승준 기자

진관사에서 북한산 정상방향인 동쪽으로 이어진 계곡을 진관사계곡이라고 부르는데 암반이 잘 발달돼 있다. 암반은 경사가 급하고 작은 폭포들이 계곡을 따라 이어진다. 


진관사계곡을 따라 산길을 오르면 북한산 사모바위와 비봉에 이르게 되고 이어 향로봉과 승가봉이 가까이 있다. 주변은 북한산국립공원으로 지정돼 있다. 도봉산, 북한산성, 도선사, 문수사, 망월사, 승가사, 천축사, 화계사, 서오릉, 정릉 진흥왕순수비유지 등의 관광지가 있다. 


# 대웅전


대웅전 전경/사진-이승준 기자대웅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는 진관사 가람의 중심 전각으로 대웅전 안의 불상은 석가모니불(현세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제화갈라보살(과거불), 미륵보살(미래불)의 삼세불三世佛을 모시고 있다. 후불탱화는 비로자나불(법신불), 노사나불(보신불), 석가모니불(화신불)의 삼신불三身佛이 모셔져 현상과 시간에 걸림이 없는 원융한 부처님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다.



석가여래좌상의 머리는 나발이 뚜렷하고 육계의 윤곽도 구분이 된다. 눈꼬리가 약간 올라가 반쯤 뜬눈, 평면적이면서 예리한 콧잔등과 꼭 다문 입술 등의 이목구비에서 엄숙함을 느끼게 한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이 새겨져 있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의 착의법을 했고, 왼손은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살며시 올려 선정인을 하고, 오른손은 오른쪽 무릎 위에 올려놓고 검지를 약간 들어 땅을 가리키는 전형적인 항마촉지인을 하고 연화대좌 위에 있다.


# 명부전


명부전/사진-이승준 기자

저승세계인 명부冥府를 상징하는 곳으로, 그곳에서 중생을 제도해 극락왕생으로 이끄는 지장보살님을 중심으로 저승세계의 심판관들인 시왕十王이 좌우로 늘어 모셔져 있다. 명부전은 지장보살이 중심이 되기에 지장전地藏殿이라 부르기도 한다. 지장보살의 좌우 협시挾侍는 스님모습의 도명존자와 상자를 든 무독귀왕이다. 명부전의 편액과 주련은 한국 근대불교의 대강백大講伯인 탄허呑虛스님의 글씨이다.


# 독성전


독성전/사진-이승준 기자독성獨聖은 ‘홀로 깨달은 분’이란 뜻으로 주로 나반존자那般尊者라고 부른다. 나반존자는 16아라한의 한 분이신 빈두로파라타존자를 말하고 신통이 뛰어나서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에도 세상을 제도하면서 중생의 복전福田이 되는 분이니다. 


독성도/사진-이승준 기자

독성전에는 독성상(서울시 문화재자료 제11호), 독성도(서울시 문화재자료 제12호)와 함께 산신도(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49호)도 함께 봉안돼 있다.


# 칠성각



칠성각(서울시 문화재자료 제33호)은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치성광여래와 일광보살, 월광보살, 칠성대군을 모신 곳이다. 칠성신앙은 수명과 복, 아이를 점지해 준다고 해 민간에서 오래전부터 신앙되어온 것이 불교에 흡수된 것이다. 



석조여래좌상(서울시 문화재자료 제10호)과 칠성도(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47호)가 봉안돼 있다. 


# 진관사에 태극기·독립신문 숨겨


3.1운동과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90주년이던 지난해 5월 26일 진관사는 일장기 위에 덧그려진 태극기를 포함한 독립운동과 관련된 자료들을 공개했다.  


건물 보수를 위해 칠성전(서울시 문화재 제33호)을 해체하던 중 불단 안쪽 벽에 숨겨져 있던 태극기 1점과 신대한신문.독립신문.조선독립신문.자유신종보 등 당시의 신문과 경고문 19점을 발견했다. 


백초월은 1939년 용산에서 만주로 가는 군용열차에 ‘대한독립 만세’라는 낙서를 한 사건의 주모자로 일본 경찰에 구속됐다. 재판에서 3년형을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될 당시의 모습과 수형자 카드.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사진이다. 진관사 제공진관사 법해 스님은 당시 상황에 대해 언론 인터뷰에서 “오전 9시경 인부 한 명이 칠성각에서 나왔다며 보자기 같은 걸 들고 왔어요. 뭔가 해서 살그머니 열어 봤죠”라고 말했고, 같은 자리에 있었던 계호 스님은 “보자기를 자세히 보니 태극무늬가 보이더라고요. 그때부터 심장이 쿵쾅거렸죠. 태극기 안에는 아주 곱게 접은 신문들이 있었다”고 했다. 


법해 스님은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울컥하면서 눈물이 나요. 불에 그슬리고 여기저기 찢어진 자국을 보니 나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지더라고요”라고 말했다.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 두 스님은 평소 친분이 있던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에게 연락했고 곧바로 달려온 문 교수는 유물을 확인하고 안전하게 보존 처리했다. 이후 불교계와 역사학계에서 진관사 유물들에 대한 연구가 시작됐다. 그 결과 태극기와 독립신문류 6종 20점이 2월 25일자로 문화재청 등록문화재(제458호)로 등록됐다. 


지난해 5월 26일 진관사(위) 칠성각에서 신대한신문·독립신문·조선독립신문·자유신종보 등 당시 신문과 경고문 19점이 태극기에 싸여(오른쪽) 발견됐다/진관사 제공

여기서 잠깐 백초원레 대해 살펴보자. 1919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든 백초월은 4월 서울로 올라와 불교 중앙학림(동국대의 전신) 안에 한국민단본부라는 비밀 독립운동 조직을 만들고 군자금을 모았다. 7월에는 상하이 임시정부와 독립운동단체의 활동 내용을 요약해 정리한 지하신문 ‘혁신공보’를 발간해 배포했고, 또 상하이에 있는 임시정부와 국내 조직과의 비밀 연락망인 ‘연통제’를 통해 국내에서 모집한 군자금과 독립운동에 활용할 청년을 상하이와 만주로 보냈다. 외국에서 만든 항일운동과 관련된 신문을 국내로 들여와 조직원들에게 배포했다. 


1919년 백초월은 불교계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활동했다. 4월 상경한 그가 곧바로 독립운동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김광식 교수는 “이미 3·1운동 이전부터 중앙학림의 초대 강사로 내정될 정도의 실력과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실력이 검증된 상황에서 한용운이 민족대표 33인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수감되자 자연스럽게 지도자 역할을 대행하게 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난해 5월 26일 진관사(위) 칠성각에서 신대한신문·독립신문.조선독립신문.자유신종보 등 당시 신문과 경고문 19점이 태극기에 싸여(오른쪽) 발견됐다. 진관사 제공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한 백초월은 12월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 일제 경찰에 체포돼 가혹한 고문을 받았고, 고문 후유증으로 병을 얻은 그는 석방된 뒤 진관사와 진관사의 마포 포교당(극락암)에서 지냈다. 다음 해 1920년 2월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3.1운동 1주년을 맞아 도쿄 유학생들과 독립운동을 일으키려다 체포됐다. 



4월에는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신상완 스님과 ‘승려의용군’을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으다 또다시 체포됐다. 


태극기와 함께 발견된 신문들의 발행일이 1919년 6~12월 사이인 것으로 확인됐다. 


문화재청은 진관사에서 발견된 태극기가 일장기를 개조해 만들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밝혔다. 


1939년 백초월은 또다시 구속된다. 당시 철도국 노동자 박수남이 용산역에서 만주로 가는 군용열차에 ‘대한독립 만세’라는 낙서를 한 사건이 있었다. 박씨를 체포한 일본 경찰은 이 사건을 일으킨 주동자가 백초월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그를 체포, 징역 3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이때 수형자 카드를 작성하기 위해 찍은 사진이 현재 유일하게 남은 백초월의 사진이다. 그러나 백초월은 3년이 지난 뒤에도 석방되지 못하고 대전.청주형무소 등으로 이감되다가 해방을 1년 앞둔 1944년 6월 66세의 나이로 청주형무소에서 순국했다.


# 나한전


나한전/사진-이승준 기자나한은 부처님의 깨달은 제자들을 말하고, ‘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는 분’ 이라 해 응공應供이라고도 한다. 독성전과 함께 가장 오래된 나한전에는 소조 석가삼존상(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43호), 소조 16나한상(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44호), 영산회상도(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45호)등이 봉안돼 있다. 



석가모니 후불도(영산회상 후불탱화)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145 호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그 옆에네 명의 보살과 사천왕, 여섯명의 제자를 배치했다. 화면의 빈 공간에는 채운을 가득 그려 넣어 전체적으로 여백 없이 빽빽한 화면 구성을 보여준다.

또 석가모니불은 붉은색 통견의 대의를 입고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아미타수인과 유사한 모양을 하고 있다. 본존의 좌우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두손으로 커다란 연꽃을 들고 본존을 향해 서 있다.


 # 나가원


나가원은 대웅전 우측에 있는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72년에 진관스님이 신축한 것으로, 건물은 콘크리트로 쌓은 낮은 기단 위에 원형초석을 두고 그 위로 두리기둥을 세워 다포를 받친 모습이다. 건물전면 3칸에 툇마루를 둬 요사채의 모습을 보여준다. 


요사채지만 건물 외부는 동자도와 화훼도 같은 단청이 칠해져 단정한 멋이 느껴지고, 어간에는 현판을 비롯해 주련 8기가 걸려 있다. 건물 내부는 정면 3칸은 대중방으로, 그리고 좌우 2칸은 요사채로 구성돼 있다. 대중방에는 1972년에 조성된 석조관음보살좌상 (石造觀音菩薩坐像)과 1973년에 조성된 아미타후불홍탱(阿彌陀後佛紅幀)이 봉안돼 있다.



[나가원(那迦院) 주련(柱聯)]

細推今舊事堪忍 貴賤同歸一土邱

고금의 사바사계 일 살펴보았더니

귀한 이나 천한 이나 모두 흙으로 돌아갔네


梁武玉堂塵已沒 石崇金谷水空海

양무제의 화려한 궁궐도 이미 티끌이 되었고

석숭의 금곡도 빈 바다의 물거품이 되었네


光陰乍曉仍還夕 草木春卽到秋

시간은 잠깐 새벽이었다가 곧 저녁이 되어버리고

초목은 겨우 봄인 듯 싶더니 문득 가을이네


處世若無毫末善 死歸何物答冥候

세상살이 털끝만큼도 좋은 일 없으니

죽으면 어떤 물건으로 염라대왕에게 답하랴


# 향적당(산사음식체험관)


향적당/사진-이승준 기자

향적은 중향(衆香) 나라의 부처님 이름으로 나라의 법의 향기가 시방무량세계(十方無量世界)에 주류(周流)한다는 뜻이다. 향을 넣어 두는 바리때를 향적주(香積廚)라 하고, 음식을 잘 만드는 곳으로 향적세계 곧 향적계(香積界)가 있다. 진관사 향적당은 보현보살님을 봉안하고 있다. 진관사 산사음식연구소는 1700년 동안 이어진 사찰의 음식문화와 그 정신을 계승하는 한편, 사찰음식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한 진관사를 찾은 수많은 외국인들에게 산사음식을 직접 배우고 맛보게 함으로써 한국의 깊은 마음과 불교의 정신을 알리고 있다. 


# 동정각


나가원 아래에 있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사모지붕의 목조건물로, 1975년에 진관스님이 신축한 것이다. 건물은 계단석이 있는 가구식 기단 위에 원형초석을 두고 그 위로 두리기둥을 세워 다포를 받친 모습으로, 사면이 개방돼 있고, 기둥에는 낙양각이 장식됐다. 


동정각/사진-이승준 기자건물 외부는 어간에 근대 불교계의 대강백(大講伯) 탄허(呑虛)스님이 쓴 동정각(動靜閣)이라는 편액(扁額)이 걸려 있고, 기둥 외부로 주련(柱聯)이 있다. 건물 내부는 진관사의 범음을 전달하는 범종(梵鐘)이 걸려 있다. 1974년에 조성된 것으로 높이 160㎝, 구경 91㎝, 300관의 대형범종이다.


동정각(動靜閣) 주련(柱聯)

願此鐘聲遍法系 원컨대 이 종소리 법계에 두루하여

鐵圍幽暗悉皆明 철위산 깊고 어두운 무간지옥 다 밝아지며

三途離苦破刀山 지옥·아귀·축생의 고통 여의고 칼산지옥 깨뜨려

一切衆生成正覺 일체 중생이 바른 깨달음 이루어 지이다.


# 홍제루


홍제루/사진-이승준 기자진관사 경내로 들어가기 전 초입에 있는 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형식의 건물로서 1층은 석주기둥으로 구성됐고 2층은 팔작지붕의 목조건물로 1977년에 진관스님이 신축한 건물이다. 절에 진입하는 출입구로 경내에 들어서려면 누각아래의 중앙 계단통로를 이용해야 한다. 건물 1층은 석주를 세워 하부구조가 드러나 있고, 석주에는 '대종대시주비'가 새겨져 있어 조선후기 진관사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이외 석주 좌우로는 목조로 만든 출입구가 있고, 출입구에는 사천왕문을 대신한 듯 인왕상이 단청돼 있다. 이외에 2층은 현재 강당으로 사용된다.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아 사찰을 참배하고 집회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고, 외부는 계자난간을 둘러 진관사를 찾는 참배객들의 휴식처로도 사용되고 있다.


홍제루/사진-이승준 기자

[홍제루(弘濟樓) 주련(柱聯)]

慈光照處蓮花出 자비광명이 비추는 곳에 연꽃이 피고

慧眼觀時地獄空 지혜의 눈이 열리니 지옥도 본래 없네

又況大悲神呪力 또한 다시 대비신주의 힘으로

衆生成佛刹那中 중생을 찰나 중에 성불시켜 주시도다

普濟人天難思量 널리 인천을 제도함이 사량키 어려움이라

招憑諸佛大悲力 제불의 대비력을 불러 의지함이요

衆生不盡業茫茫 중생의 업이 아득하고 아득하여 끝이 없음이여

世界無邊塵擾擾 가없는 중생계는 어지러이 일어나는 먼지와 같음이여


# 함월당


사진출처-네이버달을 품은 집인 함월당은 템플스테이관으로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님이 봉안돼 있다. 2013년 서울시 건축상 최우수상을 수상한 함월당과 효림원에서 진행되는 진관사 템플스테이는 삶의 쉼표가 간절한 일반인들과 외국인들에게도 큰 호응을 이끌어내면서 한국 불교와 전통문화를 널리 알리고 있다. 자연과 불교, 그리고 전통문화가 어우러진 진관사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쉬는 것은 잊고 있던 자신을 차분히 되돌아보게 하는 동시에 천년고찰 진관사에 스며든 역사의 숨결은 전통문화의 멋과 생명력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다. 


진관사의 장독대/사진-이승준 기자

사진/이승준 기자

아미타불/사진-이승준 기자 

부도/사진-이승준 기자

오층석탑/사진-이승준 기자 

김칫광/사진-이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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