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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3] 율곡 선생과 신사임당의 얼이 살아 숨쉬는 곳 ‘자운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1-10-05 02:0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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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이이선생상.신사임당상은 1969년과 1970년 서울시 종로구 사직공원내에 건립돼 보존돼 오다가 사적 제121호인 사직단 복원계획에 따라 이 곳 파주 이이 유적지로 이전 복원하고 2015년 10월 10일 제막식을 거행했다./사진-이승준 기자

[이승준 기자] 자운서원은 조선 광해군 7년(1615)에 조선 중기의 대학자 율곡 이이(1536-1584)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키 위해 지방유림에 의해 창건됐다. 


효종 원년(1650)에 자운(紫雲)이라 사액을 받았고, 그 뒤 숙종 39년(1713)에 그의 후학인 사계 김장생(1548-1631)과 현석 박세체(1631-1695) 두 분을 추가 분향해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일익을 담당해왔다. 그러니 조선 후기 고종 5년(186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돼 서운 터에서 제단을 세워 지내 왔다 


율곡선생유적지/사진-이승준 기자

그 후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돼 빈터에 묘정비(廟庭碑)만 남아 있다가 1970년유림의 기금과 국가지원을 받아 복원했고 1973년 경내 주변을 정화했다. 경내의 건물로는 팔작지붕으로 된 사당과 삼문(三門) 등이 있고 담장 밖에는 묘정비가 세워져 있다. 


사당(문성사)은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의 아담한 건물로 높은 대지위에 세워져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앞면에는 각 칸마다 2짝 여닫이 문을 달았는데, 문 앞은 개방된 구조로 널찍해 제사를 지내기에 적합하다. 


잔디광장/사진-이승준 기자

최근에 사당 정면에 강당(강민당)과 동재(입지재), 서재(수양재), 협문, 외삼문을 신축하고 주변을 정비했다. 사당 내부에는 이이의 영정을 중신으로 좌우에 김장생과 박서채의 위패를 모셨고 매년 봄.가을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2012년 자운서원 위치 고증을 위한 표본시굴조사 중 문성사 축대 전면에서 창건 당시로 추정되는 건축물의 지대석과 ‘康熙二十(七)銘’ 명문기가 출토됐는데, 연호로 보아 숙종 7년에서 14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자운서원의 위치를 고증할 수 있었다. 


# 율곡 이이(1536-1584)


이이선생 동상/사진-이승준 기자

조선중기의 대표적 학자이며 경세가로 선대의 세거지인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에서 성장했고, 법원읍 동문리에 묘가 있다. 아명은 현룡(見龍),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禺齋), 본관은 덕수(德水), 판관 의석의 증손이고 사헌부감찰 원수(元秀)의 아들로 1536년(중종 31)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율곡을 낳은 날 검은 용이 바다에서 침실로 날아와 아이를 안겨주는  것을 보았다해 어릴 때 이름을 현룡(見龍)이라 했고, 태어난 방을 몽룡실이라 부르고 있다. 


자운문/사진-이승준 기자

자운서원(강인당)/사진-이승준 기자

그의 생애와 관련이 깊은 지역이 세 곳이 있는데, 첫째는 그가 태어난 외가가 있었던 강릉 오죽헌이고, 둘째는 처가가 있던 황해도 해주의 석담, 그리고 셋째는 덕수이씨 가문의 세가지이면서 그가 성장했던 파주의 율곡리이다. 특히 그의 호 율곡은 율곡리에서 유래된 것이만큼 그의 생애에서 파주와의 관련성은 대단히 크다. 


사진-이승준 기자 

사진-이승준 기자 

선생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해 이미 3세에 글을 읽었고 1543년(중종 38)인 8세때 ‘화석정시(花石亭時)와 1545년 10세때 ’경포대부(鏡浦臺腑)를 지었고 1548(명종 12) 13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초시에 합격했다. 1551년 16세때 모친상을 당하면서 3년상을 치른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서를 연구하다가 1년만에 하산해 ‘자경문(自警文)을 지어 공부에 전념했고 1557년(명종 12)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과 결혼했다. 


수양재/자운서원의 서재(유학생들이 기거하던 서쪽 건물). 1997년 신축했고, 정면 3칸, 측면 1칸반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사진-이승준 기자

입지재/자운서원의 동재(유학생들이 기거하던 기숙사 동쪽 건물). 1997년 신축했고, 정면 3카,측면 1칸반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사진-이승준 기자1561년 부친상을 당하고 1564년 7월 생원시에 장원한 이후 아홉 번의 과거에 장원 급제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1564년 호조좌랑이 된 것을 시초로 1565년 예조좌랑 이듬해에 사간원정언, 이조좌랑을 거쳐 홍문관 직제학, 승정원 동부승지, 우부승지, 사간원 대사간, 황해도관찰사, 사헌부 대사헌, 대제학, 호조, .병조,형조.이좐서 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율곡 선생의 학문은 현실적인 문제해결을 중시하는 실천적 학문으로 조선 유학계에 영남학파의 거두인 잉항과 함께 상벽을 이루면서 기호학파를 형성 주도해 조선시대 성리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율곡의 이러한 학문경향은 정치.경제.교육.국방 등에 걸쳐 구체적인 개선책을 제시해 경세가로도 큰 업적을 남겼는데 사창설치(社倉設置),대동법(大同法)실시, 십만양병설 주장 등 사회정책에 대한 획기적 선견은 조선후기 실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문성사에는 중앙에 율곡 이이선생, 좌우로 사계 김장생, 현석 박세채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던 것을 1968년 3월 중건했다./사진-이승준 기자

문성사에 모셔져 있는 율곡 이이선생 위패/사진-이승준 기자1584년(선조 17)음력 1월 16일 49세의 나이로 별세해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자운산 기슭의 선영에 예장 됐다. 저서로는 ‘학교모법‘ ’성학집요‘ ’격몽요결‘ ’소학집주‘ 등과 이를 지대성한 ’율곡전서‘가 있다. 선조의 묘정에 배향됐고 해주 석담의 소현서원, 파주의 ’자운서원‘ 강릉의 ’송담서원‘ 등 전국 20여개 서원에 제향됐다. 1624년(인조 2년) 문성(文成)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1681년(숙종 7) 문묘에 배향됐다.


# 신사임당(1504-1551)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 예술가이자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고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묘가 있다. 사임당(師任堂)은 당호이며 본관은 평산(平山), 아버지는 명화(命和), 어머니는 용인이씨 사온(思溫)의 딸이다. 외가인 강릉 북평촌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19세에 덕수이씨 원수(元秀)와 결혼했다. 결혼 몇 달 후 아버지가 죽자 친정에서 3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시가의 선조때부터 터전인 파주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했고 때때로 친정인 강릉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의 말동무를 해드렸고 이런 와중에 셋째 아들인 율곡 선생을 강릉에서 낳았다. 


신사임당 동상/사진-이승준 기자

38세 되던 해에 시집살이를 주관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수진방(현 창진동)에서 살다가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했다. 같은 해 남편이 수운판관에 임명돼 아들과 함께 평안도에 갔을 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사임당의 뛰어난 예술가로서의 재능은 일찍부터 나타나 7세에 안견의 그림을 사숙하기도 했다. 그의 주된 그림 소재는 풀벌레, 화조, 매화, 난초, 산수 등으로 이런 화제(畵題)를 통해 나타난 그림은 마치 생동하는 듯한 섬세한 사실화였다. 한 예로 풀벌레를 그린 그림을 마당에서 여름볕에 말리려 하자 닭이 다가와 종이가 뚫어질 뻔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림 뿐만 아니라 글씨와 시 문장에도 주위의 격찬이 끊이지 않았고 조선시대의 예술방면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율곡기념관/사진-이승준 기자

율곡기념관/사진-이승준 기자

이렇듯 교양과 학문을 갖춘 예술인으로 성장 할 수 있었던 배경은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과 함께 그 재능을 발휘 할 수 있는 집안 환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명한 어머니의 가르침과 도량 넓은 남편능 만난 점 등은 그의 재능에 힘이 됐고 그러한 인간애는 자식사랑으로 이어졌다.  자녀들 가운데 그의 훈화와 감화를 제일 많이 받은 이는 셋째 아들 이(珥)로 훗날 이이는 어머니 신사임당은 행장기를 저술했는데 여기서 어머니의 예술적재능, 우아한 성품, 정결한 지조 등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또한 넷째 아들 우(瑀)와 큰 딸 매창(梅窓)을 자신의 재주를 계승한 예술가로 키웠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자어리도‘ ’산수도‘ ’초충도‘ ’연로도‘ 등이 있다. 


# 신사임당묘/이이선생묘


여현문, 율곡이이 가족묘/사진-이승준 기자

이이선생묘/사진-이승준 기자 

자운산 기슭에 율곡선생묘와 신사임당묘를 비롯한 가족묘가 자리 잡고 있다. 중심묘역에는 맨 위에 율곡 이이와 부인 곡산노씨묘, 그 아래와 이이의 맏형 이성과 부인 곽씨의 합장묘가 위치하고 있다. 그 아래로는 이이의 부모인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합장묘가 자리하면서 맨 아래쪽에는 이이의 맏아들 경림의 묘가 있다. 


이이선생묘 앞에서 내려본 가족들의 묘/사진-이승준 기자 

이이선생묘는 부인 곡산노씨묘와 위 아래로 인접해 있고 봉분 정면에 상석과 오른쪽에 묘비가 위치해 있다. 그 좌우로 망주석과문인석을 각각 세웠다. 신사임당묘는 남편 이원수와의 합장 봉분으로 중앙에 묘비와 상석, 향로석이 위치하면서 좌우로 키작은 문인석이 자리하고 있다. 묘역은 전체적으로 이이의 명성에 비해 소박하고 평범한 묘제 형식을 띠고 있다. 


# 파주 이이 유적


자운서원묘정비/자원서원묘정비는 율곡선생의 덕행을 추모하고 자운서원의 건립내력을 기록한 화강암 비로 1683년(숙종 9)에 건립됐다.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곡운 김수증이 예서체로 썼다./사진-이승준 기자 

사진-이승준 기자

파주 이이 유적에는 율곡 선생과 신사임당을 비롯한 11기의 가족묘와 율곡 선생의 위패를 모신 ’자운서원‘, 자운서원의 건립 이력을 기록한 ’자운서원묘정비‘, 율곡 선생의 일대기를 기록한 ’이이 선생 신도비‘ 그리고 율곡 선생의 유품 및 일대기를 전시한 율곡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연못/사진-이승준 기자

1973년 자운서원, 이이 선생묘, 신사임당묘가 각각 경기도문화재로 지정됐다가, 1978년 자운서원묘정비가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13년 2월 율곡 선생관련 유적이 한 공간에 모여 있는 장소성이 인정돼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됐다. 


이이선생 신도비/이이 선생 신도비는 높이 223cm, 폭 109cm, 두께 39cm 규모의 대리석 비석으로 앞뒷면에 율곡 선생의 일대기가 기록돼 있다. 1631년(인조 9) 4월에 건립됐고 이항복이 비문을 짓고 신익성이 썼으며 전액은 김상용이 썼다. 현재 보수 공사 중으로 자료사진


율곡기념관/율곡기념관은 1986년 건립된 팔각정 양식의 건물로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돼 있는데, 2009년 새롭게 단장해 율곡선생관련 자료 전시 및 체험공간으로 구성돼 있다./사진-이승준 기자

사진-이승준 기자

사진-이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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