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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70] 당신의 역사를 기억합니다(2)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1-10-09 14:44:03
  • 수정 2024-04-02 05:4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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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국애족의 뜻을 배우는 역사의 산 교육장 서대문형무소, 중앙사-공작사

[박광준 기자]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일제에 의해 경성감옥으로 개소돼 1945년 해방까지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된 식민지 근대감옥이다. 해방 이후에도 1987년까지 서울구치소로 이용되면서 민주화 인사들이 수감돼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을 안고 있는 공간이다. 1987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면서 서대문구에서 성역화 사업을 거쳐 1998년 서대문역사관으로 개관했다(국기사적 제324호). 과거의 역사를 교훈으로 삼고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가의 자유와 평화를 향한 신념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역사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 옥사전시 


서대문형무소는 조선총독의 관리 하에 있는 기구로, 형무소장은 총독의 명령을 받았고 형무소의 설치나 폐지도 총독의 권한에 속했다. 중앙사에서는 형무소 조직기구와 감시도구 그리고 재소자들의 하루 일과 등 전반적인 형무소 생활에 대해 알아 볼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됐다.


중앙사 외부/사진-서대문형무소

10.11.12옥사/1919년 3.1운동으로 잡혀 온 수감자가 갑자기 늘어나 1920년대 초에 새로 지은 2층 옥사이다. 왼쪽부터 10, 11, 12옥사로 불렀다. 수감자 감시와 통제를 쉽게 하려고 원형 감옥 구조로 만들었ㄷ. 가운데 중앙 간수소를 중심으로 각 옥사를 부채꼴 모양으로 배치한 형태이다. 복도 천장에는 채광창을 내어 수감자의 움직임이 잘 보이도록 했다./사진-바광준 기자

중앙사 내부 전시물/사진-박광준 기자

중앙사 내부 전시물/사진-박광준 기자

이곳은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가들이 실제 수감됐던 곳으로, 옥사의 구조와 간수의 근무모습을 살펴보고 직접 감방 안에 들어가 수감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또한 독립운동가들의 의사소통 방법인 타벽통보(打壁通報)법을 전시하고 있다.


12옥사 외벽에 걸린 태극기/사진-박광준 기자

12옥사 1층 감방/사진-박광준 기자

12옥사 2층 감방/사진-박광준 기자

타벽통보법/수감자들이 감방과 감방 사이의 벽을 두드려 정보를 주고받던  암호 통신법이다.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순서대로 두드려 글자를 조합하는 방식이다. 망으ㅜ리 우편 수송차 습격 사건으로 8년형을 받고 갇혀 있던 공명단원 김정련이  1932년 서대문형무소에 잡혀온 안창호에게 타벽통보법을 알려 주다가 순찰하던 간수에게 발각되자 '통통'을 뒤집어엎고 소란을 피워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다는 일화가 있다.

감방 환기구/옥사 외벽 아래쪽에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는 사각형 모양의 구멍이환기구이다. 감방 바닥 마룻널이 습기 때문에 썪는 것을 막기 위해 뚫어 놓았다. 옥사 1ㅡㅇ에는 마룻널의 위 아래에 구멍을 내어 공기를 순환시켰고, 2층에는 마룻널  위쪽에만 한기구를 만들었다./사진-박광준 기자 

해방 후 옥사 화장실 흔적/일제강점기에는 감방 안에 화장실이 없어 나무 양동이, 일명 '똥통'을 두어 대소변을 해결했다. 해방 후에 감방 외벽을 헐고 돌출된 형태의 화장실을 설치했다. 1987년 서울구치소가 이전한 뒤에 이를 철거하고 복원하면서 벽돌로 마감했으나 원래 벽돌과 달리 하얗게 색이 변해 그 흔적이 남아있다./사진-박광준 기자

일제강점기 각 형무소에는 재소자들의 노동력을 동원해 형무소, 군부대, 관공서 등지에 필요한 물품을 만들어 공급하던 공장이 있었다. 이곳에서 재소자들은 강제노역과 인권유린에 시달려야 했고, 1930년대 후반 이후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군수물품을 만들어 공급하기도 했다.


공작사 외부/사진-박광준 기자

공작사 내부. 현재 '철학광복.민청학련'이 열리고 있다. /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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