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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82] 산문 문학의 대가, 이태준과 '수연산방'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1-10-15 18:19:24
  • 수정 2024-04-02 06: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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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북동이라는 사랑방, 문학 그리고 문인(2)

이태준과 '수연산방'[박광준 기자] 3.1운동 후 일제는 성난 조선을 진정시키기 위해 이른바 '문화통치'로 체제를 바꾼다. 언론, 정치, 교육 활동이 보장됐지만 좌익 운동의 탄압과 1931년 민족 운동의 중추 기능을 담당했던 신간회가 해소됨으로써 그 중심 세력과 문화 예술인들이 성북동으로 이동하게 된다. 


상허이태준가옥(수연산방)

당시 성북동은 용산, 신당동 등 일본의 중심의 신시가지와 달리 한국인이 집단으로 거주, 한국적인 가치를 구현할 수 있는 서울에서 거의 유일한 주거 공간이었다. 1930년대 이후 민족 문학의 주류를 형성하는 데 이바지했던 성북동의 '구인회'와 문예지 '문장'을 살펴보고, 산문 문학의 대가인 이태준과 '수연산방'에 대해 살펴본다. 


# 구인회와 문예지 '문장'



상허 이태준이 좌장 역활을 한 구인회는 글자 그대로 아홉 명의 문인 1933년 결성한 단체이다. 당시 문단에선 프로문학이 큰 흐름이었지만 이태준, 정지용, 이효석, 김기림 등 아홉 명의 중견 작가들은 현실에 초연한 순수 문학을 지향했다. 이후 김유정, 이상, 박태원 등도 가입하는데 회원은 들고나도 주는 언제나 아홉이었다. 


'구인회'하면 문예지 '문장'이 떠오른다. '문장'은 이들의 주도로 발간된 일제 말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잡지였다. 한글과 문학 탄압이 거세지는 상황에서도 좌우파를 막론한 당대 최고의 소설가와 신인의 작품을 수록한다. 


성북동 '방우산장' 조형물조지훈과 박목월, 박두진도 '문장'을 통해 등단한 문인들이다. 해방 후 이들이 성북동 조지훈의 집(방우산정)에 모여 시집을 발간하기도 하는데, 그것이 바로 '청록집'이다. 이후부터 이들을 청록파 시인이라 불리게 된다. 


'문장'은 고전, 한글, 민속학, 어문학 등 학술 연구 논문도 꾸준히 소개하면서 이념으로 싸우기보다는 한국적 정신문학 유산을 지켜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추사 김정희의 필자를 집자해 만든 '문장(文章)이라는 제자(題字)와 김환기, 길진섭 등 당대 최고 화가들이 참여해 그런 동양화적 표지만 봐도 '문장'의 이러한 성격을 잘 알 수 있다. 


# 산문 문확의 대가, 이태준과 '수연산방'




상허 인태준은 '운문(시)엔 (정)지용, 산문(소설)엔 상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적확한 언어로 서정성이 높은 미문을 구사했던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다. 일찌기 부모를 여의고 불우하게 성장했지만 단란한 일가를 일구고 행복을 누리던  때도 잠깐이나마 있었다. 지금의 수연산방에서의 시절이다. 


지금은 그의 외종 손녀가 집을 지금 고쳐 찻집으로 운영하고 있다. 아담한 집 안으로 들어가면 그가 생전에 좋아했던 파초는 없지만 한편에서 도란도란 화담을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이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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