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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10] 꿈이 이루어지는 낙산사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1-10-30 19:22:01
  • 수정 2024-04-02 03: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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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사찰에 색깔에 있다면 낙산사는 푸른색일 듯싶다. 동해의 넘실대는 파란 물결이 바로 눈앞에 있어서인데, 원통보전에서 조금만 옆에 있어도 바다가 보이고, 낙산사의 상징처럼 돼 있는 해수관세음보살상 앞에 있어도 바다가 보인다. 


또한 의상대로 해서 홍련암 쪽으로 걸어 올라가노라면 깎아 지른 절벽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이쯤 해서는 어느 새 푸른 바다에 취할 만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이 바다가 가깝게 있는데도  마치 깊고 깊은 산자락에 들어선 것 마냥 이렇게 산이 포진해 있는 것도 희한하게 느껴진다. 낙산사가 자리한 오봉산은 확실히 묘한 매력이 있다. 


낙산사는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671년에 창건했다. 관세음보살님의 진신이 항상 머무르면서 설법하고 계신다는 보타낙가산의 '낙산'에서 유래됐다. 중국 당나라의 지엄문하에서 화엄학을 공부하고 신라에 돌아온 해는 670년(문무왕)이었다.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에 있는 절.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 신흥사의 말사로, 관세음보살이 머무른다는 보타락가산(補陀落迦山), 즉 낙산(오봉산)에 있는 사찰 '낙산사'

대비진신(관세음보살님)이 해변의 굴 속에 계시기 때문에 낙산(洛山)이라고 부른다는 말을 들었다. 간절하게 기도한 끝에 7일 만에 자신이 앉았던 좌구를 물 위에 띄었더니 천룡팔부의 시종이 나타나 굴속(관음굴)으로 인도했다. 들어가서 참례하고 공중에서 떨어진 수정염주 한 벌과, 동해 용이 여의보주 한 벌을 주어 받아서 물러 나왔다. 


다시 7일 동안 수행해 드디어 관세음보살님의 진용을 뵈었는데 말씀하시길, "이 자리 위의 꼭대기에 대나무 한 쌍이 돋아날 것이니, 그곳에 불전을 짓는 것이 마달할 것이다"라고 했다. 지금의 원통보전 자리이다. 그 말을 듣고 굴에서 나오니 과연 땅에서 대나무가 솟아났다. 


이에 금당을 짓고 흙으로 불상을 만들어 봉인하니, 그 원만한 모습과 아름다운 자질이 엄연히 하늘에서 난 듯하다. 대나무는 곧바로 없어졌으므로 바로 이곳에 관세음보살님께서 상주하심을 알았다. 이로 인해 낙산사로 하였고 의상대사는 받은 구슬을 법당에 모셔두고 떠났다.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에 있는 절.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 신흥사의 말사로, 관세음보살이 머무른다는 보타락가산(補陀落迦山), 즉 낙산(오봉산)에 있는 사찰로, 신라 문무왕 11년(671년)에 의상(義湘)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원통보전, 칠층석탑, 건칠관세음보살좌상, 부처님 진신사리가 출연한 공중사리탑, 홍예문, 홍련암, 해수관음상, 모든 관음상이 봉인된 보타전, 의상대사의 행적에 관한 자료가 있는 의상기념관 등 많은 성보문화재를 갖추고 있다. 


2005년 4월 5일 양양군 일대 대형 산불로 인해 많은 전각이 소실됐으나, 단원 김홍도의 '낙산사도'와 발굴조사를 근거로 조선 전기 가람배치의 형태대로 원형에 가깝게 복원했다. 

지난 2005년 4월 5일 양양군 일대 대형 산불로 인해 많은 전각이 소실됐으나, 단원 김홍도의 '낙산사도'와 발굴조사를 근거로 조선 전기 가람배치의 형태대로 원형에 가깝게 복원했다. 낙산사가 천년고찰의 면모를 다시 찾기까지 당시 주지인 금곡 정념 스님과 대중 스님들이 국민과 불자들의 원력을 모아 마침내 2013년 11월 17일 복원 불사를 회향했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전설에 의하면, 의상이 관세음보살을 만나고자 낙산사 동쪽 벼랑에서 27일 동안 기도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해 바다에 투신하려 했다. 이때 바닷가 굴 속에서 희미하게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여의주와 수정염주(水晶念珠)를 건네주면서 "내 전신(前身)은 볼 수 없으나 산 위로 수백 걸음 올라가면 대나무 두 그루가 있을 터이니 그곳으로 가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는데 그곳이 바로 원통보전(圓通寶殿) 터라고 한다. 


이를 계기로 오봉산을 관세음보살이 있는 낙산(보타락가산)이라 여겨 '낙산사'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이외에 부속건물로 의상대(義湘臺), 홍련암(紅蓮庵) 등이 있고 일대가 사적 제495호로 지정됐다. 


일주문/관음성지낙산사3대 관음기도도량으로도 손꼽히고 관동팔경의 하나로 유명하다. 경내에는 조선 세조 때 다시 세운 7층석탑을 비롯해 원통보전과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담장 및 홍예문 등이 있다.


신라 헌안왕 2년(858년)에 범일(梵日)대사가 중창했으나 고려 고종 18년(1231년)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소실됐다. 조선 억불 군주였던 태종이 재해를 막기 위해 행차해서 법회를 열었고, 조선 세조 13년(1467년)에 왕명으로 크게 중창했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화재를 겪었다. 


다시 인조 2년(1624년), 9년(1631년)과 21년(1643년) 재차 중건했지만 정조 원년(1777년)에 화재를 당했다. 다음 해에 다시 중건했으나 6.25 전쟁으로 소실돼 결국 1953년에 다시 지었다. 이대로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2005년에 산불이 옮겨붙어 또 다시 소실되고 말았다. 


2005년 4월 5일에 일어난 큰 산불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됐다. 당시 산불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이전부터 낙산사 주변에서 물을 뿌리면서 확산을 막던 소방헬기들도 다른 곳의 불을 끄느라 도저히 낙산사로 올 수 없었고 그나마 온 소방차가 오히려 불에 탈 정도였다. 



낙산사의 승려와 신도들이 소화기로 불을 꺼보려 했지만 고작 소화기 따위로 이 큰 산불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 화재로 보물 제479호로 지정됐던 낙산사 동종이 녹아서 소실되면서 같은 해 7월 7일 지정해제됐다. 산불에 어떻게 금속 종이 녹아내리나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겠지만, 나무가 탈 때 내는 에너지는 생각보다 많다. 산불 같은 대화재의 겉불꽃(제일 뜨거운 부분)은 천수백°C. 녹는점이 천°C 근처인 구리나 청동은 충분히 녹일 수 있다. 게다가 차라리 종이 넘어져서 땅바닥으로 굴러갔다면 손상은 입어도 녹지 않았을 텐데, 종루가 불타서 종을 그대로 덮어버려서 화덕에 들어간 꼴이 되어 녹아버린 것이다.


전소 이후 복원불사를 진행키로 했다. 다만 불타기 전의 낙산사는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뒤 성급하게 지어져 꽤나 난잡한 상태였기에 바로 복원하지는 않았고 발굴 조사를 통해 통일신라부터 조선시대까지의 낙산사 유구를 발견했다. 그 중 낙산사가 가장 번성했던 조선시대의 모습으로 복원키로 결정이 났고, 김홍도의 낙산사도를 참고해 복원불사에 착수, 2007년 4월 5일 복원이 완료다.



복원 과정에서 형태가 바뀐 전각도 여럿 있다. 저번처럼 타버리지 않게 불에 강한 나무를 심거나 바람길을 뚫는 등 화재에 보다 대비했다. 또한 화재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인지 화재 이전보다 고압수방수 살포장비 등 비상대응 장비를 여기저기에 설치했다.


화재 이전의 낙산사는 거의 숲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나무가 많았었는데, 복원된 뒤에는 약간 휑하게 보일 정도로 경내에 나무가 없어졌다. 그래도 산불 이후 15년이 지난 2020년대에는 어느 정도 나무들이 커져 그런대로 숲이 울창해지긴 했다.


낙산사 동종 역시 예전의 형태대로 복원됐지만 문화재로 등재되지는 못했다. 문화재청이 문화재 가치를 잃었다고 판단, 보물에서 지정해제됐기 때문이다.


# 홍예문



조선 세조 13년(1467)에 왕이 친히 낙산사에 행차한 것을 기념해 사찰의 입구에 세운 무지개 모양의 돌문이다. 당시 강원도의 고을은 모두 26개였고, 고을에서 한 개씩의 석재를 내어 건립한 것이다. 2개의 지대석 위에 각각 2개의 장대석으로 13개씩 2열을 쌓았다. 홍예문 위의 누각은 1963년에 세운 것으로, 2005년 양양 산불로 소실된 것을 2007년 5월 복원했다. 주변의 석축은 강돌로 보수한 것을 양양 산불 이후 산돌로 교체했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 33호로 지정됐다. 


#사천왕문


사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4명의 사천왕을 모신 문으로, 사천왕은 수미산의 각 방향을 지키며 악귀를 쫓아낸다. 따라서 무서운 얼굴을 하고, 갑옷을 입은 장수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대부분 발밑에 악귀를 밟고, 손에 무기를 들고 있다.



낙산사 사천왕문은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이고, 맞배지붕이다. 내부에는 양 측면에 사천왕이 모셔져 있다.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은 음악을 관장하는 신으로 국토를 지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 지국천왕은 비파를 연주하면, 건달바를 거느린다. 남쪽을 지키는 중장천왕은 수미산 중턱 남쪽에 있는 유리 지방을 관장하는 신으로 중생의 이익을 넓게 길게 만들어 만물을 소생시킨다. 구바다를 거느린다. 서쪽을 지키는 광목천왕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크게 벌려 큰 소리와 웅변으로 악귀를 물리친다. 용과 여의주를 잡고 용과 비사사를 거느린다. 멀리 두루두루 볼 수 있다.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은 보탑과 창을 들고 있고, 야차와 나찰을 거느린다. 사찰을 지키고,설법을 빠짐없이 듣는다고 한다.


광목천왕(수미산 서쪽 하늘), 비루팍쉬(산스크리트어)는 많은 용을 권속으로 삼으며 오른손은 용을 움켜쥐고, 왼손에는 여의주를 쥐고 있다. 비루파는 귀, 여러가지 색이라는 뜻이고, 팍쉬는 눈 또는 뿌리라는 뜻으로 '여러가지 색의 눈 또는 뿌리'라는 뜻인데, 이를 한자로 바꾸어 넓은 광과 눈 목을 써서 '광목천왕'으로 부르며, 이는 크고 넓은 눈으로 서방 국토를 바르게 지키고 중생을 도와주는 천왕이라는 뜻이다. 

지국천왕(수미산 동쪽 하늘), 드라타라슈트라(산스크리트어)는 제석천 또는 부처님이 동방에서 불법을 지키라고 명령하였으며, 국토를 지키고 백성을 편하게 할 것을 맹세했다고 하여 지국천왕으로 불린다. 건달바를 권속으로 삼으며, 비파를 들고 튕기는 모습이다. 

이 사천왕성은 조선 말기에 김주성이 조성했고,1914년 문을 고치면서 사천왕상을 개금했다. 1988년 문을 고치고, 2010년에 문을 다시 다시 고치면서 사천왕상 개금을 다시 했다. 


벚나무, 이 벚나무는 6.25전쟁 후 고 이형근 장군이 웜통보전 복원시 기념 식수한 나무 중 한 그루이다.이 건물은 한국전쟁과 2005년 산불에도 해를 입지 않았다. 사천왕문 앞에 있는 큰 벚나무 두 그루가 산불을 막아 화재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백화수각은 백화도량에서 나온 것이다. 백화도량은 관세음보살이 살고 있는 곳으로, 보타락가산을 의미한다. 이 보타락가를 번역하면 흰 꽃나무가 있는 산이라는 의미의 백화수산이다. 백화수산 가운데는 작고 흰 꽃나무가 많은데, 그 꽃의 향기가 매우 향기로워 멀리까지 퍼진다고 한다. 산 곳곳에는 샘이 있고, 산꼭대기에는 거울같이 맑은 못이 있다고 한다. 낙산사 백화수각은 이러한 백화도량을 나타낸 것으로, 용의 입에서 물이 나오는 사각의 수각 부분은 흰 백자 모양으로 만들고 아랫단은 꽃 모양을 본떠서 만들어 흰 백자와 꽃 모양으로 백화도량을 표현했다.  백화수각은 방문객들의 갈증을 풀어주고, 물과 차를 끓일 때 사용하는 실용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백화도량을 상징함으로써 인간사의 괴로움을 구제받고 왕생의 길로 인도하는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 범종루


범종루

보물 제 479호 낙산사 동종이 걸려 있던 누각으로, 2005년 화재 때 불타면서 안에 있던 동종까지 모조리 녹아버렸다. 현재는 동종을 예전 형태대로 복원해서 걸어 놨다. 복원 전후의 외양 차이가 다른 전각에 비해 상당히 큰 편이다. 하루 2번 이곳에서 타종을 한다.


동종/동종은 보물 제479호로 지정돼 고향실 옆 종각에 보존돼 있었으나, 2005년 4월 산불로 소실 용해돼 2006년 10월에 복원했다. 조선 세조가 낙산사에 행차해 중창이 된 것을 기리기 위해 1469년 예종의 명으로 만들어졌다. 동종에는 제작 연원과 만드는 것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주종장은 정길산이며 명문을 지은 사람은 집현전 학자인 김수온이다. 글씨를 쓴 사람은 홍천사 종명, 봉선사 종명, 유점사 종명을 쓴 문신이자 서예가인 정난종이 썼다. 크기는 전체 높이 158cm, 입지름 98cm이다. 종 꼭대기 장식인 용뉴에는 용 두 마리가 서로 뒤엉켜 머리를 반대로 두고 다리로 천판을 밟고 있는 모습이 용맹스럽게 묘사됐다. 종신 가운데에 가로로 3줄의 대를 둘러 위, 아래로 구분했다. 종신 위에는 연꽃잎 무늬의 띠 연판문대를 두르고 보살입상 4구와 범자를 양각했다. 종신 아래쪽에는 긴 명문을 양각하고 그 아래에 파도  무늬의 띠를 둘렀다./자료사진  

사진은 2005년 4월 산불로 소실 용해된 상태로 의상기념관에 보관,전시돼 있다. # 원통보전


원통보전과 칠층석탑

무량수전 전경 원통보전은 자비로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하고 극락왕생의 길로 인도하는 관세음보살을 모신 건물이다. 해당 건물이 사찰의 주불전일 때는 원통보전, 사찰의 부속 건물일 때는 원통전, 관음전으로 불린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671년 의상대사가 관음굴에서 7일간 기도해 수정염주와 여의보주를 받았고, 다시 기도해 관세음보살을 만나 산 정상에 대나무 한 쌍이 솟아난 곳에 불전을 지으라는 계시를  받고 그곳에 관세음보살을 조성해 모셨다고 한다. 그 장소가 지금의 원통보전이다.


원통보전은 절들의 대웅전 위치에 있는 건물로, 석가모니불 대신 관세음보살을 모신다. 2005년 화재로 모조리 불탔지만 안에 있던 관음불상은 미리 옮겨놨기에 화를 면했다. 이후 복원하면서 예전엔 청기와 건물이었던 것을 일반적인 기와를 올린 건물로 바꿨다.

원통보전 법당에 모신 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2호)은 고려시대 후반의 전통양식이며 강원도에서는 유례가 없는 건칠기법으로 조성된 불상이다, 2005년 양양  산불로 건물이 모두 불에 탔으나, 건칠관음보살좌상은 당시 주지 금곡 정념 스님과 사부대중의 원력으로 화마 속에서도 무사할 수 있었다. 현 전각은 2007년 11월 복원한 것이다. 2003년 보물 제1362호로 지정됐다. 보기 드물게 장지에 옻칠을 해 조선한 불산으로 고려시대 후반의 전통양식이다. 


낙산사 담장은 원통보전과 칠층석탑을 다른 건물들로부토 구분하면서 담장 자체가 가진 고유의 아름다움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담장 중 뒤족 5.8m, 오른쪽 8m만 원형이 남아있고, 나머지는 있는 것을 토대로 보수했다.

낙산사 담장(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4호)은 경계를 구분하거나 시선을 차단해 내부를 보호하는 역할을 울타리이다. 고유어인 담과 한자어인 장이 합쳐진 것이며, 원장, 장원이라고도 한다. 낙산사 담장은 원통보전과 칠층석탑을 둘러싸고 있고, 담벽 안쪽은 기와, 바깥쪽은 막돌로 쌓아 아놔 밖을 구분했다. 담장 아래는 큰 돌을 쌓아 습기를 예방했다. 담벽은 암키오 강회, 진흙을 차례로 다져 수평으로 줄을 맞춰 쌓았고, 그 사이에 둥근 화강석을 규칙적으로 배치해 벽면을 구몄다. 담장 위에는 기와를 얹어놓아 담장 보호와 장식효과를 동시에 고려했다. 


# 낙산사 칠층석탑(보물 제499호)


의상대사가 이 탑을 처음 세울 때 3층이었던 것을 1467년 7층으로 만들어 낙산사의 보물인 수정염주와 여의보주를 봉안했다. 조선시대 다층석탑의 전형적인 특징을 갖고 있어 보물로 지정된 석탑으로, 원통보전 앞에 세워져 있다. 다만 정중앙이 아닌 약간 어긋난 위치에 있다. 석탑의 재질은 화강석이고 청동제 상륜을 달았다. 6.25전쟁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지만 전쟁을 겪으면서 한쪽 귀퉁이가 뭉텅 잘려나가는 손상을 입었다. 다른 석탑들에 비해 독특한 양식으로 만들어졌다.석탑은 부처님의 유골이나 사리를 모신 탑을 말한다. 재질에 다라 목립, 석탑, 벽돌탑 등이 있다, 양양 낙산사 칠층석탑은 현재 단층으로 된 기단 위에 탑신과 옥개석 일곱 층을 올렸고, 재일 위쪽에 상륜을 올렸다. 이 석탑은 탑신석 아래에 탑신석과 비슷한 두께의 석재가 끼워져 있고, 다른 탑신석에 비해 두께가 얇은 점이 특징이다. 낙산사 칠층석탑은 산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신라시대에 조성됐고, 조선 세조 13년에 중창  하면서 7층으로 다시 쌓았다. 그리고 이때 수정으로 만든 염주와 여의보주를 탑 속에 봉안했다고 한다. 


# 보타전


보타전

천수천안 관음상을 비롯해 얼굴과 팔이 여럿인 불상이 다수 있어서 꽤나 이국적으로 보인다. 

원통보전에서 해수관음상 쪽으로 가다 보면 아래쪽에 보이는 눈에 띄게 거대한 건물로, 원래 있던 건물은 아니고 근래에 지어진 것이다. 낙산사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관음성지임을 상징하는 건물로, 건물 안에는 관음상 1500좌를 봉안했다. 


보타락에서 본 관음지

천수천안 관음상을 비롯해 얼굴과 팔이 여럿인 불상이 다수 있어서 꽤나 이국적으로 보인다. 한국 불교에 힌두교가 살짝 가미된 느낌. 앞쪽에는 낙산사 7층 석탑을 본따 새로 지은 탑과 보타락이라는 이름의 2층 누각, 연꽃이 가득 있는 연못이 있다.


# 해수관세음보살상



낙산사 성보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바로 해수관음상이다. 그래서 굳이 불자가 아니더라도 동해에 왔다가 낙산사를 찾는 여행객들이면 누구나 들러 참배하는 것이 하나의 정해진 코스가 됐을 정도다. 관음상은 대좌 위에 활짝 핀 연못 위에 서 있는데, 왼손으로 감로수병을 받쳐들고 오른손은 가슴쪽에서 들어 수인을 짓고 있다. 

낙산사 해수관세음보살상은 당시 주지 원철 스님의 원력으로 양질의 화강암 산지로 손꼽는 전북 익산에서 석재 700여 톤을 가져다 1972년부터 불사를 시작해 5년 만인 1977년 11월에 점안했다. 높이 16m, 둘레 3.3m, 최대 너비 6m로 대좌 앞부분에 두 마리의 용을 조각하고, 양 옆으로는 사천왕상을 조각했다. 


비익조의 전설, 해수관음상 복전하믄 상.중.하단으로 나눠어 있다. 각각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를 상징한다. 하늘을 상징하는 비익조는 연리지와 함께 부부간의 금슬과 연인과의 사랑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상징매개체이다. 비익조는 극락세계의 아미타불부처님 전에 산다고 한다. 그래서 극락구품도와 같은 아미타불 후불탱에도 역시 비익조는 자주 등장한다. 예전에는 사찰의 큰 대문에도 미소 짓는 비익조들을 가끔 그려놓았다. 비익조는 사랑하는 두 인연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또한 비익조는 가화만사성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따라서 해수관세음보살님께 절을 올리고, 비익조를 만지고 가는 부붕ㅘ 연인들은 가족들의 화목과 사랑을 이룬다고 한다. 

삼족섬의 두 가지 복, 삼족섬은 예로부터 한국과 일본, 중국의 세 나라에서는 재복을 가져다 주는 재물신으로 항상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현재 심사정이 그린 삼족섬은 하마섬인도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을 정도이다. 삼족섬은 사실 다리가 세 개에 불과한 두꺼비인데, 전설에 의하면깊은 연못에 살면서 함께 사는 주인에게 돈이 있는 곳을 알려주어 부자가 되게 한다고 한다. 또한 마음대로 모습을 바꾸거나 어디든지 날아갈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이 있어서 주인이 가고자 하는 곳은 어디든 데려다 줄 수 있다. 해수관세음보살님께 옙ㄹ을 올리고삼족섬을 만지는 사람한테는 여행복과 재물복을 준다는 전설이 있다. 

해수관세음보살상 둘레의 108법륜석은 2005년 4월 낙산사 화재 이후 불법이 더욱 번창해 중생의 번뇌를 깨달은 으로 성화시킨다는 의미에서 조성한 것이다. 108개의 장판석과 48개의 바퀴실을 화강암으로 갈았고 2008년 6월 20일에 완성했다. 


# 의상기념관 


의상기념관의상기념관내 전시물들

낙산사 출토 자기류절의 설립자로 알려진 의상대사와 관련된 것들을 전시하기 위해 세운 건물로, 낙산사의 옛 모습과 의상에 대한 전시물들을 볼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2005년에 있었던 화재에 휩쓸려 흉측하게 녹아버린 동종을 전시 중에 있다.


# 의상대



의상이 좌선수행을 했던 곳이라 전해지는 곳이다. 원래는 암자가 있었다고 하나 폐허로 변해버렸고 이후 1925년에 그 자리에 정자를 세우고 의상대라 이름붙였다. 1974년 9월 9일 강원유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됐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며 그 덕인지 양양 8경 중 하나로 선정됐다.


# 홍련암



상당히 외진 곳에 위치해 있는 암자로, 절벽 끝에 세워져 있다. 의상대에서 옆으로 빠져서 한참을 가면 도착할 수 있다. 옛날에 의상대사가 참배를 할 때 갑자기 푸른 새가 나타나자 기이하게 여겨 따라가다가 어떤 석굴 속에서 자취를 감추자 그 앞에서 7일 밤낮을 기도했고, 그러자 앞바다에 연꽃이 나타나 관세음보살이 현신했다고 한다. 이후 그곳에 터를 닦고 암자를 세워 이름을 홍련암이라 지었다.


천수천안 관음상을 비롯해 얼굴과 팔이 여럿인 불상이 다수 있어서 꽤나 이국적으로 보인다. 한국 불교에절벽 아래에 앞서 언급된 자연 석굴이 있는데, 용이 살고 있다는 전설이 있다. 관음굴이라 불리운다. 암자 바닥에 관음굴을 볼 수 있는 작은 유리창이 뚫려 있다. 이 유리창을 통해 아래를 내려다 봤을때 용이 보이면 소원이 이뤄 진다나? 절벽 아래에 앞서 언급된 자연 석굴이 있는데, 용이 살고 있다는 전설이 있다. 관음굴이라 불리운다. 암자 바닥에 관음굴을 볼 수 있는 작은 유리창이 뚫려 있다. 이 유리창을 통해 아래를 내려다 봤을때 용이 보이면 소원이 이뤄 진다나? 실제로 보면 절벽과 석굴에 부서지는 하얀 파도만 보인다. 이러한 전설 덕분에 오세암과 함께 흔히들 말하는 기도빨 죽이는 암자로 유명하다. 이로 인해 홍련암을 찾는 불자들이 많다. 2005년 산불 당시 바로 앞까지 불길이 번졌으나 다행히 소실되는걸 피했다.


# 보물(제1723호) 양양 낙산사 해수관음공중사리탑.비 및 사리장엄구 일괄 


양양 낙산사 공중사리탑은 예술적인 측면으로만 살펴보면, 일급의 석조물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몇 가지 사실을 통해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해수관음공중사리탑.비(보물 제1723호)

첫째, 건립의 절대연대가 1692년으로 밝혀져 비슷한 시기의 승탑을 비롯한 관련 석조물의 편년에 소중한 준거가 된다는 점이고, 둘째, 매우 드물게 현존하는 이른바 승탑형 불사리탑의 새로운 예가 추가됐다는 점도 평가할 만하다.


셋째, 양식적으로나 세부에 있어서나 조선시대 왕릉의 장명등과 유사성이 다분해 양자 사이의 교류 관계, 나아가 절집 석조물과 그 밖의 석조물의 양식적인 영향 관계를 살필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인정할 수 있다.


양양 낙산사 공중사리비는 그 자체만으로는 조선후기 석비의 일반적인 형태를 크게 벗어나지 않아 독자적인 가치를 인정하기 어렵지만, 공중사리탑과 그 안에서 수습된 사리장엄구와 아울러 생각한다면 이 비의 가치는 배가된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불사리를 모시려는 목적 아래 만들어진 일관 유물일 뿐만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기능과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비문의 내용이 사리장엄구의 일부를 이루는 문서 내용과 일치한다는 사실은 공중사리탑, 공중사리비, 사리장엄구가 이런 관계 속에 존재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공중사리비 또 공중사리탑에서 수습된 사리장엄구 일괄은 인위적인 손상 없이 처음 매납된 상태 그대로 수습돼 학술적인 가치가 높다. 그리해 조선후기에 접어들 무렵까지도 사리병―금합―은합―동합의 순으로 매납용 사리기를 제작해 그 안에 사리를 안치하는 전통적인 사리 장엄 방식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실례로써 주목된다. 


또한 사리장엄구의 일부로 수습된 비단 보자기 11점은 그 양호한 상태, 색채의 선명성, 무늬의 다양성 등을 통해 우리나라 직물사 연구에 커다란 기여를 할 수 있는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무엇보다도 이들 세 가지 유물, 즉 공중사리탑과 공중사리비와 사리장엄구 일괄은 관련 유물 가운데 어느 하나 결실되지 않고 고스란히 온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렇게 관련 유물이 갖춰진 형태로 전해지는 경우가 매우 드물기 때문에 그러하다. 따라서 이들은 낱낱의 유물이 지니는 가치도 적지 않지만 함께 보존되고 관리될 때 그 의미가 한층 강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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