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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생활실험을 통해 사회혁신을 생각한다
  • 오혜인 연구원/서울대 사회복지연구소
  • 등록 2021-11-01 19: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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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는 저명한 에세이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들에게 매달 500파운드의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경제적 자유 더불어 ‘사유할 시간과 공간’의 확보는 여성이 성장하고 생산성을 내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임을 의미한다. 남성이 남성의 시간과 공간을 갖듯, 여성에게도 일정한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전업주부일수록, 이런 공간은 더욱 소중해진다.


역사상 유례없는 코로나 팬데믹이 발생했다. Mahajan(2020)을 비롯한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들은 Covid-19 대유행이 현대사회 남녀의 불평등을 극적으로 노출시켰다면서, 미국 노동부 자료를 인용해 2020년 8월과 9월 사이에 많은 산업에 걸쳐 86만 5천 명의 여성들이 '자기만의 방'은 커녕, '직장'조차 가질 권리를 박탈당해 떠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그리고, 현재 바이러스가 여성들에게 끼친 유해하고 불균형한 영향을 미친 이 시기를 "여성 침체기(female(she)-recession)"로 명명했다. 코로나라는 상황 속에서 진짜 여성들의 삶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여성들은 어떻게 생존하고 생활하며 이 시대를 헤쳐나왔을까?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성평등기금의 지원을 받아 “코로나19 하의 여성들의 삶”이라는 주제로 십 여명의 시민들과 함께 리빙랩(Living Lab)을 수행하는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리빙랩이란 2004년 MIT교수였던 윌리엄 미첼(William J. Mitchell)교수가 최초 도입한 개념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을 실험실로 삼아 다양한 기술과 사회문제의 해법을 찾아보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 맞벌이가 아니라 맞살림이다


필자는 이 프로젝트에 6개월간 함께하며, 팬데믹 하의 여성의 가사노동이라는 큰 주제에 일차적으로 관심을 두었고, 자본주의적 색채가 묻어나는 ‘맞벌이’라는 단어 대신, 평등한 생활인의 의미가 더 묻어나는 ‘맞살림, 맞돌봄’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생태(Eco)“라는 주제를 함께 가져갔다. 팬데믹의 상황 속에서 환경에 대한 관심을 한번도 가져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선포되면서, 사람들이 직접 마트나 시장에 가기보다는 온라인 쇼핑과 택배, 외식 대신 배달 앱을 통한 주문을 일상적으로 이용하게 되면서 쓰레기 대란을 겪었고, 온갖 공장이 멈추면서 역설적으로 맑은 공기를 마시는 경험을 해보기도 하면서, 결국 팬데믹은 환경, 지구, 생태라는 주제에 대해 새롭게 사유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미니멀라이프, 제로웨이스트, 환경을 위한 소비, 비건지향적인 식단... 등 최근 각광받고 있는 라이프 스타일을 현실에서 실천하는 것은 비단 여성들만의 일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남성(남편)들이 함께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하나의 가정공동체 내에서 환경이나 쓰레기 문제 등에 대해 비슷한 수준의 경각심, 의식화된 상태로 함께 공유하지 않는다면, 생활실천을 하는 사람에게는 외로운 고행이 되거나, 작심삼일 하듯 동력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높다. 


# 생태적 맞살림을 위한 구체적인 실험들


그렇다면 생태적 맞살림을 실현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우리가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사실 이론적으로는 간단하다. ‘생태적’ 차원의 ‘살림’을 남편과 아내가 ‘같이’ 하면 된다. 함께 비건을 지향하는 식탁을 꾸리고, 비닐봉지나 플라스틱 대신 용기를 함께 에코백에 담아 다니며, 함께 친환경을 위한 물품들을 고르고, 함께 대나무 칫솔을 쓰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와 물질주의, 편리성이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는 배달과 택배의 천국 서울에서, ‘생태적’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어느 정도의 각성과 지속적인 훈련이 아니고서야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맞벌이 여성의 가사노동시간이 남성의 4배에 이르는, 맞살림이나 맞돌봄 자체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제도와 문화 속에서 남성의 상당시간을 가사노동에 투입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맞살림’ 은 녹록치 않은 미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대로 행동을 개시해나갔다. 1차적으로 우리는 탄소발자국을 줄이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우리집 텃밭’을 가꾸는 활동을 시작하였고, 쓰레기로 가득한 베란다를 보며 배달과 택배를 절반 이상으로 줄이기로 결심했다.


아이들과 함께 할 아파트 텃밭과 비건 아침식사 실험]두 번째 달에는, 미래의 대한민국 ‘남성’이 될 두 아들과 함께 제로웨이스트 활동을 펼쳤다. 대형마트 대신 재래시장을 이용하고, 재래시장에 갈 땐 용기를 가져가 불필요한 비닐소비를 줄이는 것이 구체적인 실천방법이었다. 지역사회 내의 여러 음식점에서 ‘용기내’ 프로젝트를 수행하였으며, 처음엔 의아해하시는 분들도 계셨으나 점차 우리의 노력을 인정해주고, 지지해주는 분들이 생겨났다. 


비건지향적인 삶을 기획해보기도 했다. 남편과 ‘earthlings’라는 다큐를 같이 보고, 함께 비건지향적인 삶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고기를 워낙 좋아하는 성장기 아이들과 남편으로 인해 완전한 비건식탁은 몇 주 만에 사라졌지만, 적어도 비건인들을 이해하는 생각의 폭이 넓어지고, 하루 한 끼 아침식사 만이라도 비건지향적인 식탁을 지향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 되는 시간이었다. 


프로젝트가 끝나기 직전 달에는 분리수거를 제대로 함께 하자는 생각으로 남편과 같이 분리수거에 대한 책을 읽고 함께 공부를 하기도 했다. 쓰레기 분리수거를 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이걸 정확하고 세심하게 실천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방법을 함께 공부하고 알아가니 생태 맞살림이 더욱 수월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의지가 없었다기보다는, 잘 몰라서 제대로 못하는 부분이 존재했음을 알게 됐다.  


코로나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아이들과 상업적이고, 소비적인 시간을 보내는 상황들이 많이 발생하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생태적이고, 서로에게 여유를 줄 수 있는 맞돌봄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바톤터치 생태육아’를 수행해보기도 했다. TV나 유투브, 대형마트에서의 쇼핑, 장난감만이 놀이가 아니라, 자연에서도 수많은 놀이를 할 수 있음을 아이들에게 알려주되, 부부가 각자만의 시간과 공간을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바톤터치 방식은 상당히 유용했다. 


# 리빙랩, 사회혁신을 위한 도구


실험을 해나가면서 여러 가지 아이디어들이 떠올랐다. 가령, 쓰레기 분리수거 방법을 명확히 설명한 재미있는 유투브 영상교육을 본 사람들에게 무료로 쓰레기 봉투를 나눠주는 인센티브를 준다던지, 바톤터치 육아를 부부가 돌아가며 할 게 아니라 지역사회 다른 가족들과 삼삼오오 모여서 그룹으로 할 수 있도록 조직화를 해본다던지, 집에다 조그만 텃밭을 억지로 꾸미는 것을 넘어서서 관내 유휴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다양한 작물을 함께 키우는 도심 내 로컬팜 프로젝트를 실제로 수행해보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진정한 리빙랩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맞닿았을 때 정말로 빛을 발할 수 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생태적 맞살림을 위한 한 가정의 실험, 노력, 아이디어에서 이야기가 멈추었다는 점이 조금 아쉽다. 리빙랩 전문가들은 리빙랩과 공공은 파트너처럼 함께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리빙랩이 민(民), 아래로부터의 전환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더라도, 이것이 사적인 이야기로만 끝나버리면 의미가 없다. 의미 있는 리빙랩들이 정책과 서비스 속으로 들어와 구조화되고, 시스템화될 수 있도록 하는 거버넌스와 협력이 필요하다. 


또한, 하나의 아이디어를 현실화시켜가는 데에는 연대하고 함께하는 많은 사람들의 참여가 필요하다. 학계의 전문가가 제시하는 정확한 통계와 분석이 요구될 수도 있고, 때로는 지역사회 노인의 삶의 지혜가 필요할 수 있다. 다양한 영역의 지역사회 시민과 전문가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공간과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보다 진화된 리빙랩을 만들어갈 수 있다. 


더구나 사람의 에너지는 항상 똑같지 않다. 나의 경우도, 맞살림을 하다가 급작스러운 ‘권위주의적 가부장제’로 인해 기울어지는 관계에 힘겨워하기도 하고, 생태를 부르짖다가도 클릭 한 번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오늘날의 현실과 조용히 타협하고 싶어지는 때가 온다. 이렇게 실천 활동을 하다가 살짝 지칠 때 즈음, 초심을 잃고 힘을 잃어 갈 때 즈음.... 나와 함께 리빙랩을 수행하던 동료들, 그리고 글을 쓰게 독려해주던 프로젝트 매니저, 그리고 그런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소속감은 지금 생각해보면 매너리즘과 피로로부터 벗어나도록 만들어주는 힘이 되었던 것 같다. 때로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 그들의 존재 자체가 힘이 된다.  


아직 ‘생활실험(리빙랩)’이라는 단어 자체가 우리 사회에 익숙하지 않은 도입 초창기에 있다. 사회문제의 다양한 영역에서 시민들의 참여와 협력이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만큼 다양한 방식으로 리빙랩을 도입해야 한다. 시민들이 살아가고 있는 마을, 동네, 지역사회의 현장 곳곳에서 다양한 삶의 아이디어와 노하우들은 끊임없이 피어난다. 하루가 멀게 변화무쌍한 현실과 현장을 모르고 탑다운(Top-down)방식으로 정책을 구상하는 일은 매우 위험하고, 비효율적이며 구시대적인 발상이다. 새로운 시민중심의 거버넌스에 걸맞는 생활실험들을 상상하고 진행해 보다 공동체적이고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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