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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야기 8] 자연과 조화 이룬 가장 한국적인 궁궐(2)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1-11-04 19:46:47
  • 수정 2024-04-15 17: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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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금의 집무실로 쓰인 곳 '선정전 일원'


[이승준 기자] 창덕궁은 1405년 태종 때 건립된 조선왕조의 왕궁으로, 처음에는 법궁(法宮)인 경복궁에 이어 이궁(離宮)으로 창건했다. 이후 임금들이 주로 창덕궁에 거주하면서 실질적인 법궁의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 때 한양의 궁궐들이 모두 불탄 후에 경복궁은 그 터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재건되지 않고 1610년(광해 2)에 창덕궁이 재건된다. 그 후 창덕궁은 경복궁이 재건될 때까지 270여 년 동안 법궁으로 사용됐다. 



창덕궁은 인위적인 구조를 따르지 않고 주변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자연스럽게 건축해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왕가의 생활에 편리하면서도 친근감을 주는 창덕궁의 공간 구성은 경희궁과 경운궁 등 다른 궁궐의 건축에도 영향을 주었다. 


조선시대에는 궁의 동쪽에 세워진 창경궁(昌慶宮)과 경계 없이 사용했고, 두 궁궐을 ‘동궐’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또 남쪽에는 국가의 사당인 종묘(宗廟)가, 북쪽에는 왕실의 정원인 후원(後苑)이 붙어 있어서 조선 왕조 최대의 공간을 형성했다. 





그러나 왕조의 상징이었던 궁궐은 여러 차례의 화재로 소실과 재건을 거치면서 많은 영향을 가져왔고, 1991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이 시작돼 현재에 이르렀다. 또한 1997년 12월 6일에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명실공히 한국을 대표하는 궁궐이 됐다. 


선정전은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으로, 지형에 맞춰 정전인 인정전 동쪽에 세워졌다. 아침의 조정회의, 업무보고, 국정세미나격인 경연 등 각종 회의가 이곳에서 매일 열렸다. 




창건 당시에는 조계청이라 불렀는데, 1461년(세조 7)에 ‘정치는 베풀어야 한다’는 뜻의 선정전으로 이름을 바뀌었다.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등의 화재로 소실됐다가. 1647년(인조 25)에 인왕산 기슭에 있던 인경궁을 헐어 그 재목으로 재건했다. 주위를 둘러싼 행각들을 비서실, 부속실로 이용했으나 전체적으로 비좁았다.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뒤편의 희정당으로 편전 기능을 옮겨 가면서 순조 이후에는 이곳을 혼전(魂殿, 종묘로 모시기 전까지 죽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곳)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현재 보물 제814호로 지정돼 있다. 



선정전은 원래 왕의 공간이지만 왕비가 사용한 일도 있다. 성종 때 공혜왕후 한씨가 노인을 공경하는 풍습을 권장키 위해 양로연을 이곳에서 베풀었다. 양로연은 80세 이상의 노인 전원을 대상으로 매년 9월에 열렸다. 성종의 계비 정형왕후 윤씨는 이곳에서 친히 누에치는 시범을 보였고, 중종 때는 내외명부의 하례를 받기도 했다. 사관들은 왕비가 편전인 선정전을 사용한 것은 잘못이라는 비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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