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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야기 11] 자연과 조화 이룬 가장 한국적인 궁궐(5)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1-11-17 10:00:38
  • 수정 2024-04-15 17: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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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헌종의 검소한 면모가 느껴지는 곳 ‘낙선재 일원’


[이승준 기자] 조선 24대 임금인 헌종은 김재청의 딸을 경빈(慶嬪)으로 맞아 1847년(헌종 13)에 낙선재를, 이듬해에 석복헌(錫福軒) 등을 지어 수강재(壽康齋)와 나란히 뒀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고, 수강재는 당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23대 순조의 왕비)를 위한 집이었다. 




후궁을 위해 궁궐 안에 건물을 새로 마련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헌종은 평소 검소하면서도 선진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 그 면모가 느껴지는 낙선재는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을 지녔고, 석복헌에서는 순종의 비 순종효왕후가 1966년까지 기거했고, 낙선재에서는 영왕의 비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생활했다. 이 낙선재는 2012년 보물 제1764호로 지정됐다. 




존경하는 할머니 대왕대비와 사랑하는 경빈을 위해 지음 집답게 세 채의 집 뒤에는 각각 후원이 딸려 있다. 낙선재 뒤에는 육각형 정자인 평원루(平遠樓, 현재는 상량정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음), 석복현 뒤에는 한정당(閒靜堂)이, 수강재 뒤에는 취운정(翠雲亭)이 남아 있다. 특히 낙선재 후원은 서쪽 승화루 정원과 연결되는데, 그 사이 담장에 특별히 원형의 만월문(滿月門)을 만들었다. 건물과 후원 사이에는 작은 석축들을 계단식으로 쌓아 화초를 심었고, 그 사이사이에 세련된 굴뚝과 괴석들을 배열했다. 궁궐의 품격과 여인의 공각 특유의 아기자기함이 어우러진 대표적인 정원이다. 





헌종은 첫 번째 왕비 효현왕후 김씨가 16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이듬해 다시 왕비를 간택했다. 전례 없이 본인이 직접 간택에 참여했다. 이때 삼간택에 남은 세 사람 중 헌종은 경빈 김씨를 마음에 뒀으나, 결정권은 대왕대비에게 있었으므로 효정왕후 홍씨가 계비로 간택된다. 이로부터 3년 뒤 왕비가 있는데도 생산 가능성이 없다는 핑계를 대고 새로 맞은 후궁이 경빈 김씨이다.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후궁이 된 경빈은 헌종의 지극한 사랑으로 왕비와 다름 없는 대접을 받았다. 석복헌은 이런 배경에서 탄생했다. 



특히 헌종은 그의 어머니 신정왕후의 평가대로 ‘낮에는 물론 깊은 밤에도 손에서 책을 놓치 않았고, 옛 분들의 서첩을 매우 사랑했다’. 낙선재에는 온갖 진귀한 서적들이 가득했다. 헌종의 도서 목록인 ‘승화루서목’에는 4.555점이 기록돼 있는데, 그 가운데 서화가 918점이나 됐다. 서화에 대한 그의 지극한 관심을 말해 주듯 낙선재 현판은 청나라 금석학자 섭지선의 글씨이고, 평원루 현판은 옹수곤의 글씨이다. 이들은 모두 추사 김정희의 친교가 있었던 청나라 대가 들이다./사진-이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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