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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야기 16] 경복궁의 영추문과 신무문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1-12-05 22:44:43
  • 수정 2024-04-15 17: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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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 '경복궁'(2)

영추문[이승준 기자] 경복궁 영추문[景福宮迎秋門)은 서울 종로구 세종로 1번지에 있는 경복궁의 서쪽문으로, 영추문이라고도 한다. 1926년 일본인들이 경복궁의 전각들을 헐어낼 때 헐려 그 서쪽에 작은 문만을 내었다. 1975년에 원형대로 복원했다.




‘연추문(延秋門)’이라고도 부른다. 경북궁의 동쪽 문인 건춘문(建春門)의 반대편에 있다. 동쪽은 봄에 해당해 ‘춘(春)’이라고 했고, 가을에 해당하는 서쪽 문이어서 ‘추(秋)’를 붙였다. 주로 승지 등 관료들이 일상적으로 출입하는 문으로 이용했다.


경복궁은 1395년(태조 4)에 완공됐다. 궁성과 성문은 미쳐 완성되지 않았다. 이후 태조 7년부터 정종 때에 이르러 궁성과 함께 동문, 서문, 남문등이 완성됐다. 영추문은 석축을 쌓아 홍예문을 내고서 위에 문루를 세운 모습으로, 1426년(세종 8)에는 남문을 광화문(光化門), 동문을 건춘문(建春門), 서문을 영추문이라고 각각 불렀다.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은 목책으로 설치했다가 세종 때에 성문으로 완성됐다. 1427년에 수리했고, 임진왜란 때에 경복궁이 불타면서 없어졌다가 고종 때 흥선대원군에 의해서 다시 건립됐다. 당시 영추문의 편액은 허계(許棨, 1798~1866)가 썼다. 일제강점기에 전차 노선을 부설(敷設)하면서 주변의 담벼락과 함께 철거됐다. 1975년에 원래의 자리에서 약간 이동해 지금의 성문을 콘크리트로 복원했다.


'북궐도형'에는 “이익공 고16척 광15척 주장8척 어간17척 좌우협간8척식(二翼工 高十六尺 廣十五尺 柱長八尺 御間十七尺 左右挾間八尺式)”이라고 했고, '경복궁배치도'에는 정사각형 모습의 문만 그려져 있다. 아래의 석축에는 1칸의 홍예문이 설치됐고, 그 위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1층 목조 문루가 자리하고 있다. 





홍예문의 천장에는 백호(白虎)가 그려져 있고, 2익공의 겹처마 우진각지붕을 올린 문루 안에는 북이 설치돼 있었다. 북쪽에는 외부의 물이 궁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수문(水門)이 있었고, 남쪽에는 암문(暗門)이 있었고, 성문의 안쪽에는 궐내각사가 배치됐다.


1975년 지금 모습으로 복원된 뒤, 청와대 외곽 경호를 맡은 수경사 30경비단이 주둔하면서 통재됐다가, 2018년 통제 43년만에 일반인에게 개방됐다.


이 성문은 원래의 모습과 위치를 유지하고 있지는 않지만, 경복궁을 둘러싼 성벽과 함께 성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이다.


경복궁에서 바라본 신무문신무문(神武門)은 경복궁의 북문(北門)으로, 다만 정북(正北)이 아닌 서북쪽으로 치우쳐있다. 현판의 글씨는 고종 때 관료인 이현직(李顯稷. 1797 ~ ?)이 썼다.


‘신무’는 ‘신령스러운(神) 현무(武)’라는 뜻이다. 4신 중 현무가 북쪽을 나타내는 동물이므로, 경복궁의 북쪽 문에 ‘무(武)’ 자를 넣은 것이다.


1395년(태조 4년)에 경복궁을 창건할 때는 없었다. 경복궁을 처음 지을 때 동, 서, 남쪽에만 궁문을 뒀고, 북쪽 궁성은 목책으로 돼 있었다. 그러다 1433년(세종 15년)에 비로소 제대로 된 북문을 지었다.


신무문에서 바라본 청와대 하지만 문을 세웠어도 이름은 짓지 않았다. 이후 1475년(성종 6년)에 예문관대제학 서거정이 신무문(神武門)이란 이름을 지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불탄 뒤 270여 년간 방치됐다. 1865년(고종 2년)에 중건됐다. 일제강점기에 성벽의 일부가 무너졌으나 곧 복구됐고 이후 큰 변화 없이 오늘에 이른다.


평소에는 닫혀있었다.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북쪽에 있는데다 풍수지리적으로 북쪽이 음(陰)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다만, 비상시나 나라에 변고가 생겼을 때, 또는 왕이 비밀리에 궁 밖을 나갈 때 주로 사용됐다.



조선 중.후기에는 문 밖에 신하들의 공훈을 기록한 회맹단(會盟壇)이 있어 임금이 신하들과 회맹제에 참석할 때 이용했다. 여기서, 조선 후기에는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이 재건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신무문을 이용했나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아마 문루는 없지만 남아있던 석축을 통로로 활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영조가 어머니 숙빈 최씨의 사당인 육상궁에 참배할 때에도 신무문을 사용했다.


1860년대에 경복궁이 중건된 이후 신무문 밖은 경복궁의 후원이 됐다. 신무문은 후원을 오가는 문으로 기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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