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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복지국가를 위한 학교교육의 혁신
  • 조준호/엔젤스헤이븐 대표
  • 등록 2021-12-14 16: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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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와 교육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1998년 김대중 정부의 사회보장 정책이후 복지국가의 길로 들어섰고, 제대로 된 복지국가라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가 지금 보다 더 나은 복지국가가 나아가야 한다는 데에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그렇다면 교육과 복지는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 복지국가도 복지국가를 추구하지 않는 다른 국가와 큰 차이 없이 학교 교육이 구성되는가? 글쓴이는 복지국가의 교육은 복지국가의 고유의 가치와 철학을 갖고 있고, 그에 따른 변화와 혁신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 대한민국에서 교육개혁의 의미는?


우리나라에서 교육개혁에 대한 논의의 핵심은 입시제도의 개혁에 있다. 누가 서울대를 가는가, 아니면 누가 좋은 대학을 가는가를 결정하는 것이 입시제도이다. 한국의 입시제도는 대학별고사, 예비고사와 본고사, 학력고사와 내신, 수학능력시험과 학교교육의 충실화를 위한 학생부종합 등 다양한 형태로 변화해 왔다. 우리나라는 대학입시의 지배력이 중등학교 이하의 학교교육에 절대적이다. 각 대학에 전적인 선발권을 주는 시기도 있었고, 내신제도에 더 비중을 두기도 하였고, 최근에는 입학사정관제도를 두어 학생들의 경험을 전문적으로 평가하기도 하였지만,우리 학생들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 공부한다.


한국교육의 문제는 입시위주의 교육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연말마다 입시제도에 대한 논의가 치열하게 전개된다. 특히 최근에는 전 조국 장관의 문제와 관련하여 수시와 정시에 대한 논의로 교육에 대한 논의가 집중됐다. 필자는 입시제도에 대한 논쟁에는 드러난 것과 숨겨진 것의 두 가지 맥락, 즉 입시제도의 공정성에 대한 논의와 입시제도를 통한 교육의 과제(적절성) 논의가 함께 진행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선발의 공정성이다. 정시 확대측의 입장은 열심히 공부한 재능있는 학생이 성공해야 하는 데, 현재의 수시제도는 부모의 경제력, 입시와 관련된 정보수집능력,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교육열이 더 큰 영향을 주어서 공정한 성장이 되지 못하니, 과거와 같이 국가가 출제하는 수학능력시험을 통해서 공인된 성적을 중심으로 학생선발이 되는 것이 공정하다고 주장한다. 


수시가 더 우월하다는 입장은 수학능력시험이라는 정해진 학력측정기준으로 대학입시를 결정하면, 입시위주의 교육환경, 즉 학원중심, 사교육 중심의 교육이 더 강화돼 마찬가지로 경제력과 교육열이 높은 부모가 많은 강남 8학군 위주의 불평등이 심화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시는 입시의 공정성에 초점을 맞추고 수시는 학교교육의 강화와 그를 통한 학생 개인의 성장에 초점을 맞춘다. 


둘째는 대학에서 배울 수 있는 능력, 즉, ‘수학능력’이 무엇인가와 관련이 있다. 초등 6년, 중고등 6년간 우리 학생들은 학교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국가는 어떤 인간을 학교를 통해서 키우려고 하는 지, 개인은 학교에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시대와 사회가 요구하는 교육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다. 19차례의 입시제도의 변화가 있는 동안 9차례의 교육과정 개편이 있었고(7차 이후에는 수시개편), 언제나 그전 입시제도를 개선하기 위해 새로운 입시제도를 도입하는 개편이 지속됐다.


입시제도의 개편으로 한국의 교육이 성공하고 있는 가를 따져 보았을 때, 사실 2000년대 이후에는 부정적이다. 대학진학의 수단으로 학교교육을 바라본다면 입시위주의 교육에 대한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입시위주의 교육이 갖고 있는 문제는 해마다 반복되는 교육토론에서 공정성 시비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학교교육에서 성공하지 못한 학생들, 즉,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한 학생들에게 학교는 관심이 있는가? 학교가 대학진학을 위해서 기능한다면 학교는 제 역할을 하는 것인가? 


# 성장지향 국가와 교육의 기능


2000년대 초까지 우리나라의 학교교육은 많은 비판을 받으면서도 국가와 개인 모두에게 어느 정도 기능을 했다고 본다. 한국사회에서 교육의 역할은 개인에게는 계층 상승의 도구로, 국가와 자본의 입장에서는 순치된 노동력의 양성으로 성공적으로 그 기능을 수행해왔다. 2000년 이전까지로 한정한다면, 교육을 통한 사회변화의 가장 좋은 모델이 한국이라 할 수 있다. 2000년대 초까지 한국은 후진국에서 중진국,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해 정부와 사회, 국민 모두가 경제성장이라는 한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했고, 교육이 그것을 뒷받침했다. 경제성장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성공 이데올로기에 기초해서 한국은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다. 그 이데올로기는 경쟁주의, 능력주의, 서열주의로 표현될 수 있고, 학교교육은 대학진학을 위해 성적에 따라 서열이 정해지고 그것이 정당하게 여겨지는 문화를 키워왔다. 전통적으로 학교에서 공부는 절대적 가치를 가지고 있었고, 꼴찌도 공부해야 하는 문화로 발전해왔다.


우리사회에서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갖는 직업을 정당화하는 기제는 학교교육과 그와 연관된 시험이다. 누가 더 좋은 사회적 지위를 차지하는가는 그가 나온 대학, 다시 말해서 이전에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했는가를 통해서 정당화된다. 사회에서 성공한다는 것은 공부를 잘해서 의사, 변호사 등이 되거나 사업을 통해서 성공하는 것이다. 세습이 아닌 능력이 더 좋은 사회적 자리를 갖게 하는 기제가 되어야 하며, 그러할 때 학교의 교육은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고 사회 전체적으로도 열심히 노력하는 자가 성공한다는 선순환 구조, 교육의 순기능이 작동했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한국교육은 이러한 구조가 흔들리고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 입시제도의 변화를 통해서 공정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더 큰 실패로 이어지는 것은 교육이 계층상승의 도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부자든 빈자든 치열하게 공부한 자가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력과 정보력을 가진 특정계층, 본래의 부자계층과 교육을 통해서 성공한 베이비 부머 세대층이 교육의 상층구조, 높은 사회적 지위를 독차지하게 되었다는 의미다. 한국은 양극화가 심화되고, 계층이동의 사다리가 없어진, 사회적 이동이 거의 사라진 국가가 되었다. 


이에 더해 21세기 한국에서는 교육의 사회경제적 기능이었던 순치된 노동력의 양성이 더 이상 학교교육의 과제가 아니다. 후발국가로서 다른 나라가 갔던 길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다른 나라가 가는 길이 아닌 우리의 길을 가야 하는 국가가 되었다. 다시 말해서 50분 수업, 10분 휴식, 암기 위주의 주입식 교육, 교사의 말에 절대 복종하는 학생을 길러내는 것이 목적이 아닌 ‘창의적 교육’이 필요한 국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90년대 말부터 교실붕괴라는 담론이 나오고 기존의 학교교육 문제와는 다른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지만, 그에 대한 답을 학교교육은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개발도상국으로 성장중심의 사회에서 소수의 학생들만이 성공하는 구조, 그리고 다수의 학생들이 학교에서 실패하고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를 가진 일자리를 갖는 구조는 복지국가에 맞는 교육이 아니다. 지난 20년간 학교교육은 복지국가 즉 모든 국민의 행복을 목표로 하는 국가에 맞는 교육청사진을  그려내지 못했다. 그 결과 현재의 학교는 모두가 만족하지 못하는 교육이 되어버렸다. 


기회의 공정을 따지는 가장 낮은 수준의 교육의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 맞다고 주장하는 담론을 아직도 상식으로 여기는 분위기이다. 복지국가와 맞지 않는 학교교육의 결과는 참혹하다. 청소년 행복도가 가장 낮은 국가, 청소년 자살율이 가장 높은 국가, 왕따와 학교폭력, 학교밖 청소년에게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국가, 학교가 맞지 않는 청소년들에게 어떤 교육적 관심도 갖지 않는 국가....왜 학교는 다수의 실패하는 학생들에게 관심을 갖지 못할까? 


# 복지국가의 학교교육, 모두를 위한 교육개혁 


복지국가에서의 교육은 성공이데올로기 – 능력주의, 경쟁주의, 서열주의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 21세기 복지국가에서 한국교육은 모든 학생들이 교육을 통해서 건강한 시민(주체로서의 개인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성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국민 모두가 행복하기 위한 교육을 목적으로 한다면 학교에서부터 행복해야 한다. 소수의 학생이 좋은 사회적 지위를 차지하고 다른 다수의 학 생들은 학교에서 들러리가 되는 교육이 아니다. 


능력, 경쟁, 서열을 중시하는 자유주의 국가의 담론은 기회의 공정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능력이 없어서, 노력하지 않아서, 재능이 부족해서 경쟁에서 도태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노력과 재능(능력)을 통한 선별이 가장 정의로운 것이라고 주장한다. 최대 10%만 성공할 수 있는 그런 교육을 복지국가의 교육이라 할 수 없다. 기회가 공정하게 주어진다는 것이 최고의 가치라는 것은 기존 교육사회학의 평등논의에서 기회의 평등, 과정의 평등, 결과의 평등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돈을 많이 벌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사람은 소수일 수밖에 없다.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소수만 대우받는 교육이 아니라, 모두가 존중받는 교육으로의 변화가 복지국가 교육의 첫걸음이다. 


70년대에서 90년대까지의 학교는 학급당 학생수가 6-70명이 넘었으며, 학생들을 통제하고 교육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폭력적이고, 강압적이고 일방적 강의에 의한 주입식 교육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교사의 권위는 절대적이었고, 성적에 의한 서열을 정당화하며, 폭력적구조가 사회와 학교에 만연했다. 


21세기 대한민국은 그런 경쟁구조의 학교교육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학급당 학생수가 25명을 넘지 않는 현재의 교육은 교육의 본래의 목표에 따라 교육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졌다. 앞으로의 교육 개혁의 목표는 좋은 대학에 누가 갈 것인가에 대한 기준을 정하고 정당화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학교에서 배제 당했던 '꼴찌들을 위한 교육개혁'이 필요하다. 소수의 공부 잘하는 학생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교육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복지국가에서 학교교육의 목표는 앞에서 언급한 건강한 시민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사교육이 지배하는 교육현실에서 학교는 왜 교육이 더 필요한 학생들에게는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일까? 30년 전에 대학을 졸업하고 얼마되지 않아 학교선생님이 된 선배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 선배와의 대화는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학업분위기를 흐리는 학생들, 특히 가출을 자주 하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들을 조기에 퇴학시켜서 학업분위기를 좋게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 그후 학업분위기를 위해서 어떤 학교는 30~40명의 학생을 1년에 조기 제적시키고 나머지 학생들을 좋은 대학에 보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른 학교보다 나은 성적, 학급의 동료보다 나은 성적을 받으면 그것으로 교육의 목적을 달성하는 학교였던 것이다. 


교육받을 권리는 대한민국에 사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현재의 한국교육은 그렇지 않다.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공부를 잘하는 학생, 공부를 못하는 학생, 딴생각이 많은 학생, 선생에게 대드는 학생, 잠만 자는 학생, 욕이 입에 붙은 학생, 게임만 하는 학생, 부모에게 학대당하는 학생, 폭력적인 학생, 친구에게 돈을 빼앗기는 학생, 왕따당하는 학생, 왕따시키는 학생, 친구들이 가장 소중한 학생, 자기만 아는 학생, 장애학생, 한부모 가정 학생, 다문화가정 학생, 꿈이 없는 학생, 기타를 잘치는 학생, 책읽기를 좋아하는 학생, 학교를 싫어하는 학생, 우울증에 걸린 학생, 아무 생각이 없는 학생 등 다 다른 학생들이 학교를 다닌다. 학생에게 문제가 있고, 어려움이 있다면 더더욱 교육의 필요성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학교에서 실패한 학생들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학교의 책임, 국가의 책임, 사회의 책임으로 생각하는 나라가 복지국가이다.


학교에서 무시당한 학생, 학교에서 내쫒긴 학생들은 결국 사회가 떠맡을 수밖에 없고, 학교부적응이 사회부적응으로 사회문제로 이어지게 된다. 이는 학생 개인의 실패가 아닌 학교의 실패이며, 그 실패를 사회로 떠넘기는 것이 현재의 학교교육이다. 수시, 정시에 대한 논쟁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필요한 교육을 어떻게 우리의 학교교육에서 그리고 학교밖의 교육에서 보호와 성장이 필요한 우리의 청소년들에게 동등하게 주어져야 하는 지를 숙고해야 한다. 교육은 미래를 위한 준비가 아니다. 그리고 교육의 목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받는 모든 개개인의 성장과 변화를 위해 맞추어져야 한다. 


노르웨이의 장애교육 교수를 만난 적이 있다. 노르웨이의 학교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완전통합으로 학급을 이룬다고 한다. 소리지르고, 자해와 타해를 하는 최고 중증의 장애학생이 함께 수업을 받는 것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학령기 내내 이어지고, 성인이 되어 함께 살아간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환경이 어떻게 복지국가인 노르웨이는 가능한 것일까? 우리사회가 할 수 없는 이유는 본질적으로 그런 장애학생이 있으면 수업을 할 수 없고, 수업을 하지 못하면 대학입시에 절대적으로 불리해지기에 중증의 장애학생이 함께 수업을 받는 것을 우리나라는 엄두를 내지 못한다. 경쟁위주의 서열을 정하는 학교교육체제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장애학생도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이고 함께 살아가야 할 존재이며, 다른 공간에서 배운다는 것을 선택지로 삼지 않고, 함께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가치와 철학을 가진 교육이 복지국가의 교육이다.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는 교육! 교육을 받는 개개인 한명, 한명이 교육의 목적인 교육! 그것이 복지국가의 교육이다. 


조준호는 사회복지법인 엔젤스헤이븐 대표로 은평구에서 아동과 장애인 복지서비스 기관들을 운영하고 있으며, 향후 이 기관들을 커뮤니티 케어 서비스 기관으로 재편하는 일을 민관협력으로 진행하고 있다. 그는 공동체에 기초한 복지서비스를 만들어가려는 사회복지 전문가로 현재 사단법인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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