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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6 부여편] 백제의 마지막 수도(사비성)인 부여군의 서원들...퇴수서원.동곡서원 등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7-04 01:38:11
  • 수정 2022-12-26 10:5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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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코로나19로 인해 잠정적으로 여행을 중지했던 본지가 다시 한국의 서원을 준비했다. 하지만 한국의 서원 6편부터는 지역별 서원들을 종합 편집해 게재할 예정이다. 먼저 백제의 마지막 수도(사비성)인 부여군의 서원들을 정리해본다. 


# 퇴수서원



퇴수서원은 충남 부여군 임천면 만사리 191번지에 소재하고, 1984년 5월 17일 문화재자료 제91호로 지정됐다. 


풍양 조씨 3인(석곡 조박.성강 조견소.퇴수재 조성복)을 기리고 있는 서원이다. 조박(1577∼1650)은 선조 39년(1606)에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라, 국정을 수행하는 최고의 관료집단인 당상관 중에 통정대부를 지냈다.



조견소(1611∼1677)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관직이 금구현령에 이르렀으나 사직하고 학문과 후학을 가르치는데 전념했고, 조성복(1681∼1723)은 벼슬이 대사간에 이르렀으나 정치적으로 반대하는 이들에 의해 유배돼 그곳에서 죽음을 맞았다.


이 서원은 영조 33년(1757) 세도면 동사리에 처음 지었다. 처음에는 조성복의 위패만을 모셨다. 1868년(고종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됐다가, 1957년 재건하면서 조박과 조견소를 함께 모시기 시작했고 1969년 현재의 위치로 재건하면서 이름도 반산서원으로 고쳤다.


# 동곡서원


동곡서원은 충남 부여군 세도면 동사리 622번지에 소재하고, 1984년 5월 17일 문화재자료 제92호로 지정됐다. 



이 서원은 고려 공민왕(恭愍王)때 회양(淮陽) 부사(府使)(지금의 군수)였던 조신(趙愼)선생을 제향(祭享)하는 서원이다.


선생은 고려 말 신돈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임천(林川)의 덕림(德林)(오늘날 장암면 점상리)에 은거해, 박팽년(朴彭年).유성원(柳誠源) 등의 문하생을 길러냈고,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와도 교분이 두터웠다고 하며, 태종의 어릴적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고, 박팽년.유성원 등의 학자를 길러냈다. 



동곡서원은 조선 철종(재위 1849∼1863) 때 지역 유림들이 지었으나,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됐다가 1930년에 복원했다.


건물 배치는 ㅁ자집 평면이고 강당과 재실이 있다. 안마당을 중심으로 각 방이 배치돼 있어 마치 살림집 모습을 보는 것 같은데 바깥채는 전학당(典學堂)이고, 안채는 화수루(花樹樓)이다. 고종(高宗) 5년(1868) 대원군의 서원(書院) 철폐령(撤廢令)으로 철거됐다가 1930년 지방 유림(儒林)들에 의해 현재의 상태로 복원됐다.


# 칠산서원



칠산서원은 충남 부여군 임천면 칠산리 384번지에 소재해 있고, 1984년 5월 17일자로 문화재자료 제102호로 지정됐다.


시남 유계(1607∼1664)를 기리고 후학을 양성키 위해 세운 서원으로, 유계는 조선 중기 문신으로 예에 관해 정통한 학자이다. 김장생의 제자이고 충청도 유림의 오현 중 한 사람으로 불린다.



칠산서원은 숙종 13년(1687)에 세워 숙종 23년(1697)에 임금으로부터 ‘칠산(七山)’이라는 현판을 받아 사액서원이 됐다. 그 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됐다가 1967년에 복원했다.


서원 경내에는 제사 공간인 사당과 공부하는 공간으로 강당, 장판각 등이 있다. 사당 안에는 유계 선생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있고, 해마다 음력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서적을 보관하는 장판각에는 저서인 ‘가례원류’의 책판과 ‘시남집’의 목판 원본을 보관하고 있다.


# 창강서원


창강서원의 소재지는 충남 부여군 부여읍 저석리 73-2번지이고, 1984년 5월 17일 문화재자료 제107호로 지정됐다.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절충장군(折衝將軍)을 지낸 추포(秋浦) 황신(黃愼) (1560∼1617)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황신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성혼과 이이의 가르침을 받았다.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해 여러 벼슬자리를 거쳤는데, 임진왜란 때에는 절충장군 자리에 오르기도 했고 죽은 뒤에 우의정의 직함을 받기도 했다.


인조 7년(1629)에 세운 이 서원은 숙종 8년(1682) 임금으로부터 ‘창강’이라는 현판을 받아 사액서원이 됐다. 그 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됐다가 1966년에 지금 있는 자리로 이전.복원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제사 지내는 사당과 배움의 공간인 강당,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사당은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해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해마다 음력 3월과 9월 보름날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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