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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8 정읍시편] 전북 정읍시의 서원들...동죽서원.도계서원 등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7-07 18:03:16
  • 수정 2022-12-26 10:5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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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코로나19로 인해 잠정적으로 여행을 중지했던 본지가 다시 한국의 서원을 준비했다. 하지만 한국의 서원 6편부터는 지역별 서원들을 종합 편집해 게재할 예정이다. 지난호 백제의 마지막 수도(사비성)인 부여군의 서원들에 이어 전북 정읍시의 서원들을 살펴본다.<편집자주>


서원(書院)의 유래는 국조보감(國朝寶鑑)에 의하면 조선 중종(中宗) 36년(辛丑)인 1541년에 경상도 풍기군(豊基郡)에 그 때 군수로 있던 주세붕(周世鵬)이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 우리나라 서원사(書院史)의 시초(始初)이다.


그는 안유(安裕)의 사당(祠堂)을 짓고 그 左右에 유생(儒生)들이 공부할 집을 지어 주자 (朱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이름을 따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 한데서 연유하였다.


서원(書院)은 선현선사(先賢先師)를 모시는 사당(祠堂)인 동시에 사설 교육기관(私設 敎育機關)으로 근세조선의 최초의 기관이였다.


그 때가 기묘사화(己卯士禍) 바로 뒤여서 많은 사류(士類)들이 정치와 손을 끊고 향촌에 들어와 오직 학문을 일삼고 후진(後進) 양성에 힘을 쓰게 되어 선비들이 서원에 모이게 됐다.


그 뒤 명종(明宗) 5년인 1550년에 풍기(豊基) 군수로 있던 이 황(李 滉)이 경상도 감사(監司)에게 글을 보내 임금께 송(宋)나라 백록동서원의 고사(古事)를 본받아 편액(扁額과 賜額)과 전토(田土)와 노예(奴隸, 學奴)를 내려줄 것을 부탁했다.


당시 경상도 감사는 그대로 임금께 아뢰어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賜額)과 오경(五經)과 성리대전(性理大典) 등을 하사(下司)받아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된 것이다. 그 뒤 소수서원을 계기로 각지에 많은 사액서원이 서게 됐다. 


# 동죽서원


사진제공/정읍시청

1959년에 지방 유림(儒林)들 발의해 다음 해인 1960년(庚子)에 창건(創建)하고, 3월 19일에 사우(祠宇)를 건립하고 제사를 모셨던 동죽서원은 전북 문화재자료 제77호로 지정됐다.(정읍시 덕천면 학전길 32-57)


1961년(辛丑)에 강수재(講修齋)를 세웠고, 1972년(壬子)에 외신문(外神門)을, 1977(丁巳)년 홍살문(紅箭門)을 세웠다.


본 원에 향사(享祀)하는 제현(諸賢)으로는 성리학자(性理學者)인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와 정암의 문하(門下)에서 수업(修業)한 덕촌(德村) 최희정(崔希汀) 두 분을 봉안(奉安) 하고 있다.


사진제공/정읍시청1959년(乙亥)에 지방유림(地方儒林)들의 발의로 다음해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1962년 (壬寅) 4월 6일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덕촌(德村) 최희정(崔希汀)을 제사(祭祀) 지내고 있다.


본원(本院)은 1960년 창건(創建)해 내삼문(內三門. 正義門)을 세웠고, 1961년에 강당인 강수제(講修齊)를 세웠고, 1972년 외신문(外神門.八德門)을 세우고, 1977년에는 홍살문(紅箭門)을 세웠다. 직사(直舍)는 세칸(三間)이 별도로 있다.


사진제공/정읍시청원래 서원은 선현존경(先賢尊敬)과 후진장학(後進奬學)을 목적으로, 장래성이 많은 청년들이 모여 수학(修學)하는 도장(道場)이다.


숨어서 뜻을 구(求)하는 선비와 도(道)를 밝이고 학업을 딱는 사람은 대개 세상의 번거로움을 싫어해 서책(書冊)을 지고 고요한 곳을 찾아 선현(先賢)의 도(道)를 흠모(欽慕)해 그 덕(德)을 쌓고 그 인(仁)을 익히기를 생각하고 이것으로 락(樂)을 삼기 때문에 서원(書院)으로 나가는 것이다.


사진제공/정읍시청국학(國學)이나 향교(鄕校)가 복잡한 곳에 있고, 학령(學齡)의 제한이 있어 자유롭지 못했다.


서원은 산수(山水) 좋고 고요한 곳에 세워진 것으로 여기 모여서 잡념(雜念)을 버리고 정신을 가다듬어 얼마든지 자유롭게 수양할 수 있다.

서원(書院)이 선비와 학문(學問)이 있는 곳이라고 본다면, 국가(國家)에서도 인재(人才)를 얻는 데에는 학교(學校.鄕校)보다 좋다고 보고 그를 장려했던 것이다. 


# 도계서원


사진제공/정읍시청

사진제공/정읍시청도계서원은 1673년인 헌종(顯宗) 14년(癸丑)에 김창집(金昌集), 민진원(閔鎭遠)의 주창으로 창건(創建)한 서원으로 익재(益齋) 이희맹(李希孟), 오봉(鰲峯) 김재민(金齋閔), 모암(慕菴) 최 안(崔 安), 태천(苔川) 김지수(金地粹) 선생 등을 향사(享祀)하다가 1697년인 숙종(肅宗) 23년(丁丑)에 죽헌(竹軒) 김제안(金齊顔)을 배향하고, 1840년인 헌종(憲宗) 6년(庚子)에 학산(鶴山) 김 흔(金 昕)을 추가 배양해 오다가 1868인 고종(高宗) 5년(戊辰)에 조령(朝令)에 의해 훼철됐다가 1913년(癸丑)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우고 1962년 4월 18일 중건(重建)해 퇴휴재(退休齋) 김 섬(金 暹), 안식와(安息窩) 김 습(金 習)을 추가 배향해 총 8현(賢)의 연벽서원(聯壁書院)이다.


사진제공/정읍시청

사진제공/정읍시청사우(祠宇)의 건물로는 오봉(鰲峯) 김재민(金齋閔)의 서당(書堂)이였던 도계서원(道溪書院)과 유물각(遺物閣)이 있는데 유물각에는 오봉(鰲峯)의 문집목판(文集木板)이 13매가 所藏돼 있고, 태천집목판(苔川集木板) 30매가 보관돼 있다.


오봉집(鰲峯集)은 1684년인 숙종(肅宗) 10년 도계서원에서 간행(刊行)한 것이고, 제사 지내는날은 음력으로 매달 9월 중정(中丁)이다. 정읍시 덕천면 도계1길 34-13번지에 소재하고,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79호로 지정됐다. 


# 남고서원


사진제공/정읍시청남고서원(書院)은 1577년인 선조(宣祖) 10년(丁丑))에 창건(創建)해 호남(湖南)의 대성리학자(大性理學者) 일재(一齋) 선생과 그의 제자(弟子)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였던 건제 김천일(建齊 金千鎰) 선생을 배향(配享)했다.


효종(孝宗)때부터 사액(賜額: 임금이 書院의 이름을 지어 주면서 懸板을 내려 주는 것)해 줄 것을 상소(上訴)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685년인 숙종(肅宗) 11년(乙丑) 4월에야 남고서원(南皐書院)이라 사액(賜額)됐다. 같은 해 예조좌랑(禮曹佐郞) 한성우(韓聖佑)를 보내어 치제(致祭)했다.


사진제공/정읍시청이 서원은 이 지방 선비들의 학문(學文)의 도장(道場)으로 일재 이항(一齋 李恒) 선생의 문집(文集)과 그 목판(木板)을 소장(所藏)하고 있다.


1871년인 고종(高宗) 8년(辛未)에 조령(朝令)으로 철폐(撤廢)돼 단(壇)을 만들어 제사(祭祀) 지내다가 1908년 유림(儒林)들의 발의(發議)로 강수재(講修齋)를 세우고 1927(丁卯)년에 서원(書院)을 중건(重建)해 매당 김 점(梅堂 金), 율정 김복억(栗亭 金福億), 용 암 김승적(龍巖 金承績), 매헌 소산복(梅軒 蘇山福)을 추배(追配)하고 있다.


1970년(庚戌)에 국가보조(國家補助)를 받아 서원을 고쳤고, 1975년(乙卯)에 문화공보부(文化公報部)로부터 문화재(文化財) 제 76호로 승인돼 1977년(丁巳)에 또 국가보조를 받아 단청(丹靑)을 했다.


사진제공/정읍시청

지금은 2월과 8월 중정(中丁)에 각각 제사(祭祀)를 드린다.


현재 건물로는 사우(祠宇)를 비롯해 내삼문(內三門), 강당(講堂), 외삼문(外三門)등이 있다. 사우(祠宇)는 정면 3칸, 옆면 2칸의 건물로 지붕은 맛배지붕이고 처마는 겹처마이다. 건물은 잡석의 축대(築臺)위에 세워졌고, 기둥의 앞면은 두리기둥을 사용했으나 건물자체는 모두 네모난기둥(方柱)을 사용했다.


전면 가운데는 사분합(四分合)의 교살문이 있고, 좌우 양측에는 같은 형식의 외여닫이를 달아 드나든다.


사진제공/정읍시청역시 잡석의 축대 위에 세워진 전면 4칸, 옆면 3칸의 강당(講堂)은 가운데의 2칸은 대청(大廳)이고, 좌우에는 방(房)을 뒀다. 이 건물의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처마는 홑처마이다. 기둥은 사우(祠宇)에서처럼 퇴 전면에는 두리기둥을 세웠으나 건물 자체의 기둥은 모두 방주(方柱)를 사용했다. 


대청과 퇴 사이에는 사분합(四分合) 띄살문을 달았다. 두리기 둥아래에 놓은 주초(柱礎)는 자연석 그대로를 이용했기 때문에 크기는 일정하지 않으나 그만큼 소박하고 옛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76호로 1984년 4월 1일 지정됐다. 정읍시 북면 보림1길 392.


# 창동서원



창동서원은 1965(乙巳)년에 유림(儒林)들의 발의(發意)로 창건(創建)해, 후창(後滄) 김택술(金澤述)을 향사(享祀)했다.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78호로 지정됐고, 정읍시 이평면 창골길 38-27


김택술은 1884년인 고종(高宗) 21년(甲申) 6월에 이평면(梨坪面) 창동리(滄東里)에서 출생(出生)해 전간재(田艮齋) 선생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고, 후창이란 호(號)는 전간재 선생이 준 것으로 주자(朱子)의 출생지인 창주(滄州)의 뜻을 새겨 주자의 뒤를 이으라 는 뜻으로 지어줬다.


불망실(不忘室), 낙요당(樂要堂)은 유림(儒林)들이 글을 읽던 곳이다.



이 서원이 건립되기 이전에 불망실과 낙요당이라는 두 개의 건물이 있었다. 이 건물은 그 동안 이 지방 유림들이 모여 글을 읽던 자리로 건립연대는 구 한말(舊 韓末)로 추정된다. 그는 근세(近世)의 학자로 자(字)는 종현(鍾賢)이며, 호(號)는 후창(後滄)이고 부안인(扶安人)이다.


이는 낙진(洛進)의 아들로 1884년인 고종(高宗) 21년(甲申) 6월 이평면 창동에서 태어났고 열일곱 되던 해에 천안 금곡(天安 金谷. 忠淸道)에 있는 전간재(田艮齋) 문하(門下)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고 그 조예(造詣)가 깊으니, 간재가 ‘후창거사(後滄居士) 창동거사(滄東居士)’의 여덟자를 써 주고 후창(後滄)이라 호(號)를 줬다.


1906년인 고종(高宗) 광무(光武) 10년(丙午)에 최면암(崔勉菴)의 태인(泰仁) 창의(倡義)에 참가했고, 또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과 도의지교 (道義之交)를 가졌다.



1909년의 친환(親患)에는 손가락을 쪼개 환자 에게 그 피를 먹였고, 그 뒤 어머니의 상 (喪)을 당하고 석달만에 거듭 조모(祖母)상(喪)을 만나 삼년동안 시묘(侍墓)사리를 하니 효행으로 이름이 떨치자 왜정(倭政)이 금배(金杯)를 포상했으나 이를 거절하고, 큰 아들 일본 학교(日本學校) 입학을 단호히 반대했다.


1925년 同門인 오진영(吳震泳)이 스승의 유지(遺旨)를 저버리고 일본 총독(總督)의 허가를 얻어 문집(文集)을 발간하자 여러 동문의 앞장을 서서 그 죄를 성토했다. 이 때문에 배일당(排日黨)으로 지목돼 여러 차례 곤욕(困辱)을 치루고 광복후 그 수정본(修正本) 을 발행했다.


1930년 삭발령(削髮令)과 창씨령(創氏令)이 불응해 일제의 감시대상이 됐고, 일제 (日帝)가 주는 배급(配給)을 받지않고 솔잎과 감자로 연명(延命)했다.



왜적(倭賊) 타도의 기회를 엿본다는 뜻으로 불망실(不忘室)을 짓고 후세(後世) 교육에 힘썼다. 1954년에 세상을 떠나니 1975년 사론(士論)으로 계양사(繼陽祠)에 추배(追配: 追加해서 祭祀지내는 것)했다.


이 밖에 노양서원(정읍시 상흑길 44, 흑암동), 두암서원(정읍시 소성면 애당리 두암마을), 용계서원(정읍시 칠보면 동편길 41-3), 구양서원(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101)은 개인(종중)이 관리하는 관계로 기사에서 제외됐고, 다만, 무성서원(사적 제166호)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일람표에 등록한 문화재로 한국의 서원 7에서 별도로 게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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