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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11] 김인후와 그의 제자 양자징을 배향하고 있는 ‘필암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7-12 14:21:51
  • 수정 2022-09-24 15: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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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필암서원은 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에 있는 서원으로, 호남 지방의 유종(儒宗)으로 추앙받는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1560)와 그의 제자이자 사위인 고암 양자징(鼓巖 梁子徵, 1523~1594)을 배향하고 있다.


김인후 선생이 죽은 후 30년이 지난 선조 23년(1590)에 호남의 유림들은 그의 도학을 기리기 위해 그가 살고 공부하면서 제자를 가르쳤던 장성읍 기산리에 사우(祠宇)를 짓고 그의 위패를 모셨다. 이것이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자 인조 2년(1624)에 김인후 선생이 태어난 황룡면 증산동에 다시 사우를 지었다. 




현종 3년(1662)에는 유생들의 요청에 따라 ‘필암’이라는 액호를 하사받고 서원으로 승격됐다. 당시 서원의 입지 조건이 수해를 입을 우려가 있었으므로 현종 13년(1672)에 다시 지금의 위치로 옮겨 지어졌고, 1786년에 양자징도 함께 모셔졌다. 그 후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도 다치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른다.


서원의 출입구인 확연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을 얹은 2층 문루 건물로, 바깥쪽으로는 아래위층에 모두 활짝 열어 제 칠 수 있는 널문이 달렸다. 안쪽은 툭 트이고 2층에 마루가 깔렸고, 측면에는 바깥쪽 두 칸씩에 널문이 달리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이곳은 서원의 정문이면서 동시에 원생들의 휴식처로, 때로는 여러 선비들이 모여 시회를 열기도 했을 2층 누마루의 난간 받침은 위쪽이 살짝 뒤집힌 연잎 모양으로 멋을 냈다. 팔작지붕의 2층 문루로 서원의 정문이면서 원생들의 휴식공간이다. 정면에 나붙은 현판 글씨는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확연루와 마당을 지나 곧바로 닿게 되는 것은 청절당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강당 건물이다. 숙종 때 나서 영조 때 죽은 학자 윤봉구가 쓴 필암서원이라는 현판이 정면에 걸려 있고, 마루 위에는 선조 때부터 현종 때까지 살았던 송준길이 쓴 청절당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로, 들어 여는 문이 달려 있고, 양옆 한 칸씩은 온돌방으로 돼 있다. 이곳은 원생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하던 곳으로 서원 안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진원현(珍原縣)의 객사 건물이었던 것을 1672년에 옮겨왔다고 한다.




청절당을 지나면 정면에 사당인 우동사로 향하는 내삼문이 있고 오른쪽과 왼쪽에 각각 재실이 있다. 재실은 원생들이 기거하는 곳으로 강당과 함께 서원 교육 기능의 핵심을 이룬다. 이곳 필암서원은 재실이 안쪽에 배치됐다. 들어가면서 보아 오른쪽에 있는 것을 동재, 왼쪽에 있는 것을 서재라 한다. 원생 가운데 선배들이 동재에, 후배 되는 사람들이 서재에 기거했다. 필암서원 동재와 서재에는 역시 송준길의 글씨로 진덕재와 숭의재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숭의재 옆으로는 인조가 하사한 묵죽판각(墨竹板刻)이 소장돼 있는 자그마한 경장각이 있다. 경장각의 현판은 정조의 친필이라 전해진다. 




‘하서집’이 소장된 경장각 뒤로 우동사로 들어가는 입구인 내삼문이 보인다. 가장 안쪽에 자리잡은 우동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단층 맞배지붕 집으로 정면인 북쪽 벽에는 김인후의 위패를 모시고 동쪽 벽에는 양자징의 위패를 모셨다. 1년에 두 번, 중춘(음력 2월)과 중추(음력 8월)의 중정일(中丁日)에 많은 유림과 지방 기관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사를 지낸다.


우동사는 하서 김인후를 모신 사당으로 서원 안쪽에 자리잡고 있다. 우동사의 동쪽에는 인종이 하사한 묵죽(먹으로 그린 대나무)과 ‘하서집’ 등 1,300여 권의 책, 그리고 보물로 지정된 ‘노비보’(奴婢譜) 등 69점의 문서를 소장한 장서각이 있고, 다시 그 담 밖에는 ‘하서집’의 목판이 소장된 장판각, 원지기들이 거주하던 교직사가 있다. 



중종 37년(1542) 백운동 서원에서 비롯된 우리나라 서원의 건물 구성은 시대가 흐르면서 서원의 기능이 달라지는 데 따라 변화를 보인다. 처음에는 교육 시설이 중시됐으나 17세기 후반 이래로는 제향 시설을 중심으로 건물이 세워졌고, 그에 따라 장판각이나 장경각, 누각 등도 점차 사라졌고 19세기에 이르면 사당과 강당만으로 구성된 단순한 형태로 바뀐다. 


그 가운데 필암서원은 서원의 교육 기능과 제향 기능이 균형을 이루던 중간 시기에 조성돼, 건물 구성에 있어서도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조선 시대 서원 공간의 꾸밈새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사적지가 된다. 사적로 지정돼 있다.



필암서원에 소장된 서책과 고문서들은 1975년에 일괄해 보물로 지정됐다. 이 서책과 고문서들은 서원 창건 당시부터 있던 것들이 완벽하게 전해지는 것은 아니고 주로 18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자료들이 전래된 것이다.


18세기 이후 전래된 서책과 고문서, 서원의 각종 기록이 수록된 ‘필암서원 집강안’ ‘노비보’ 등은 당시 유교의 지방교육제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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