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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14] 경남 함양군의 서원들(2)...송호서원.청계서원 등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7-16 16:4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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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코로나19로 인해 잠정적으로 여행을 중지했던 본지가 다시 한국의 서원을 준비했다. 하지만 한국의 서원 6편과 8편에 이어 지역별 서원들을 종합 편집해 게재한다. 지난호 전북 정읍시의 서원들에 이어 이번 호에서는 경남 함양군의 서원들을 살펴본다.<편집자주> 


# 성천서원 


성천서원은 경상남도 함양군 북상면 월성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교육기관이다. 


1703년(숙종 29)에 안음현감 정중만이 동춘당 송준길(宋浚吉)[1606~1672]이 노천[현재함양군 서상면 대남리 대로마을]과 월성[현재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에서 생활한 것을 기념하고 교육장소로 쓰기 위해 지방 유림들과 논의해 함양군 안의면 후암리에 성천서원을 건립했다.


1716년에는 일휴당 이숙(李䎘)[1626~1688]을 배향했고, 1821년에는 문신.학자인 역천 송명흠(宋明欽)[1705~1768]을 추가로 배향했다.


1844년경에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로 옮겨 지었으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됐다. 가까이 있던 월성초당도 한국전쟁 때 불탔다. 1977년 초당계에서 서원 터에 동춘 송선생 월성초당 유허비를 세웠다.


성천서원 자리에는 성천사라는 사당이 건립돼 있다. 


# 용문서원


정여창 사당비용문서원은 조선 전기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봉산리에 세워진 교육기관으로,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1450~1504]을 추모하고 제향키 위해 세운 서원이다.


1583년(선조 16)정여창을 추모키 위해 창건된 용문서원은 1662년(현종 3)에 사액(賜額)을 받았다. 1586년(선조 19)에 조선 전기 학자 효간공(孝簡公) 임훈(林薰)[1500~1584]과 임훈의 동생 첨모당(瞻慕堂) 임운(林藝)[1517~1572]을 추가로 배향했고, 1642년(인조 20)에는 문간공(文簡公) 정온(鄭蘊)[1569~1641]을 추가로 배향했다. 하지만 창건 후 280여년이 지난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毁撤)됐다.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돼 복원되지 못했다. 현재 서원의 옛 터에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39호로 지정된 함양 정여창 사당비[1583년 건립]와 뒷산 언덕에 있는 유허비가 남아 있다.


# 송호서원


송호서원 전경 

송호서원은 조선 후기 경상남도 함양군 병곡면 송평리에 건립된 교육기관으로, 조선 전기 단종의 폐위 소식을 접한 뒤 경상남도 거창 지역에 있는 박유산(朴儒山)[높이 712m]으로 은거한 고은(孤隱) 이지활(李智活)[1434~?]을 기리기 위해 건립됐다.


함양 송호서원은 이지활을 추모키 위해 1830년(순조 30)에 건립됐다. 1832년부터는 세종의 11번째 아들이자 단종 복위를 도모한 한남군(漢南郡) 이어(李)[1429~1459]와 이지활의 손자 송계(松溪) 이지번(李之蕃)[1469~1522]의 위패도 함께 모시고 제향(祭享)을 지내고 있다. 




그러나 1869년(고종 6)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毁撤)됐다. 1914년 서원 터에 유허비를 세웠고, 1937년 향론으로 복원됐다. 1994년 7월 4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09호로 지정됐다가 지난해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됐다.


매년 3월 중정(中正)과 9월 중정에 향사(享祀)를 지내고 있고, 성주이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함양 송호서원은 위천과 옥계천이 합류하는 평지에 남향해 자리 잡고 있다. 뒤쪽에 제향 영역을 두고, 앞쪽으로 강학 영역을 둔 전학후묘(前學後廟)형이다. 제향 영역은 사당인 경앙사(景仰祠)와 내삼문인 승사문(承事門)으로 구성돼 있다. 경앙사는 정면 3칸, 측면 1.5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이뤄졌다.


강당 영역은 강당 중심으로 맞은편에 대문채인 정용문(整容門), 오른쪽에 동재인 거경재(居敬齋)가 각각 배치돼 있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1.5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공포 양식은 소로수장집(小櫨修粧-)[기둥 상부에 가로로 창방을 걸고 이와 장혀 사이에 ‘소로’라는 부재를 일정 간격으로 끼워 넣어서 마치 접시받침처럼 이뤄진 집]이다.


# 서산서원


조선 인조15년(1637) 봄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이 함락되고 청 태종과 군신간의 삼전도 국치(國恥)가 일어나자, 깊은 산속에 은거하기 위해 인조 17년(1639) 겨울, 화림재(花林齋) 전시서(全時敍)공은 거창 영승리를 떠나 이곳 새들 봉전에 이르러서 들을 개척하고 다음 해 봄 화림재(花林齋)란 서재를 지었는데, 마을에선 신평재(新坪齋)라고도 했다. 



헌종7년(1841)에는 경상, 전라, 충청, 강원 4도의 사림(士林)들이 화림재 전공의 7대조인 여말 충신 전법판서 채미현 휘 오륜(五倫)공을 제향(祭享)하자고 여러 차례 통문을 돌려 안의현 서쪽 20리 화림동에 서산사(西山祠)를 세웠다고 채미현실기에 전한다.


그러나 철종4년(1853) 봉전 돈 마을에 큰 화재가 일어나 서산사도 화염에 쌓이자, 한 서생(書生)이 죽음을 무릅쓰고 화림재 현판을 찾아 서원 뒤에 놓았다. 현판은 그대로 남았으므로 천우신조(天佑神助)의 이적(異蹟)이라 하였다. 


하지만 고종5년(1868) 서원철폐 조령(朝令)에 의해 서산서원은 사라지게 됐다. 이 현판은 거연정(居然亭)에 걸려 있다가 1995년 문중에서 중건한 화림재로 옮겨져 오늘에 이른다.


현판글씨는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서 실학과 서예, 금석학을 공부하고 예서의 묵린에 이름을 떨친 형조판서 위당(威堂) 신헌(申櫶)공이 순조 때 썼다.


서하면 봉전마을이 정부로부터 선비문화마을로 지정이 되고, 이후 권역별 국가사업에 선정되면서 서산서원을 중건(重建)했다.


고종의 서원철폐령으로 인멸된 서산서원이 병신년 경자일(2016년 3월 19일)에 복원됐다.


# 청계서원(咸陽 靑溪書院)


남계서원은 청계서원과 같이 웅장한 자태는 아니지만 소박한 크기의 아늑하고 포근함을 주는 서원이고, 그 무엇보다도 외삼문을 지나서 안에 들어가면  정면에 멋지게 다가오는 강당과 동재, 서재가 보이지만 그  중앙에 수령을 알수 없는 소나무의 고고한 자태가 인상적이다.



함양 청계서원(咸陽 靑溪書院)은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에 있는, 조선 연산군 때 학자인 문민공 김일손(1464∼1498)을 기리기 위한 서원으로,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6호 청계서원으로 지정됐다가, 2018년 12월 20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됐다.


김일손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그의 스승을 비롯한 영남학파 학자들과 함께 조의제문사건에 연루돼 무오사화로 희생됐다. 글에 뛰어났고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비판했다. 


연산군 1년(1495)에는 '청계정사'를 세워 유생을 가르쳤고, 광무 10년(1905) 유림들이 그 터에 유허비를 세웠다. 그 뒤 1915년에 건물을 원래 모습으로 고쳐 청계서원이라 했다. 



구경재와 동재, 서재, 홍남문, 솟을삼문 등의 건물이 남아 있고,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자연과 조화로운 ‘청계서원’은 남계서원을 둘러본 뒤 몇 발짝 옮기면서 찾을 수 있다.


세월을 간직한 아름드리 나무들이 서원 안 곳곳에 있어 건물 자체가 한 눈에 들어오진 않지만 그 조화로운 모습은 서원도 자연의 일부라고 느껴진다.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에 있는 청계서원은 도문화재자료 제56호로 지정돼 있다.


이곳은 1907년에 청계정사가 있던 터에 세워진 것으로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을 위해 만들어졌다. 



김일손은 성종 때 사림파를 대표하는 학자로 요직을 두루 지냈으나 연산군 때 무오사화에 희생됐다. 그가 이곳에 청계정사에서 한동안 공부를 한 적이 있어 유림에서 그 터에 서원을 세운 것이다. 


서원의 건물은 중앙에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기와집 형태의 강당이 있고 그 뒤쪽 높은 지대위에 묘우인 청계사가 있다. 강당 앞으로는 학생들이 거처하던 동재인 ‘구경재’와 서재인 ‘역가재’가 있고 경내에는 김일손을 기리는 비석과 네모난 연못이 자리잡고 있다.


원래 청계서원은 김일손이 1495년 청계정사를 창건하고 공부하던 곳이었으나 그가 무오사화로 화를 입고 폐사됐다. 그 후 그를 추모하던 유림들이 1906년 재건을 위해 모금운동을 전개해 1917년 남계서원으로부터 대지를 기증받아 묘우를 비롯 강당과 부속건물 유적비 건립했다. 1921년 준공돼 같은 해 2월 16일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청계서원이라 헌액돼 지금까지 내려고 있다.



김일손은 사관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준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1464년(세조 10)지금의 경북 청도군 상북면 운계리 소미동에서 태어났다. 17세 때 영남사림파의 영수 김종직의 문하로 들어가 1486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다. 그후 1년 뒤 진주향교의 교수로 부임해 정여창, 남효온, 홍유손, 김굉필, 강혼 등과 교유하면서 사림파의 입지를 굳건히 해 나갔다. 


특히 김일손은 홍문관, 예문관, 승정원, 사간원 등에서 정자, 검열, 주서, 정언, 감찰, 지평 등 언관과 사관의 핵심 요직을 맡으면서 언론기관에서의 남다른 강직함과 선비다움을 뽐냈다.


그는 또 학문과 문장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사림파의 젊은 기수로 훈구파에 맞서 현실 개혁에 대한 의견도 나타냈다. 



새로운 사상과 정치이념으로 무장한 김일손은 적극적인 언관과 사관 활동으로 부조리한 모습을 두고보지 않았다. 결국 그는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칼날을 피하지 못하고 35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사초에 정치적으로 민감했던 사안을 거침없이 적은 것과 김종직의 ‘조의제문(吊義帝文)’, 세조 재위시 신임받던 신하의 비리를 폭로한 것이 발단이 됐다. 그러나 이러한 강직한 기개는 후대 조광조에게도 이어졌고 결국 네 번의 사화라는 탄압에도 사림파가 조선 중.후기를 지배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한편, 그가 처형을 당할 때 냇물이 별안간 붉은 빛으로 변해 3일간을 흘렀다고 해서 ‘자계(紫溪- 붉은 시냇물)’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의 고향인 경북 청도에 있는 자계서원의 이름은 이렇게 유래됐다./사진출처-문화재청, 함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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