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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17-안동시 편(2)] 퇴계 선생이 왕래하면서 강학하던 서재에서 비롯된 ‘유암서원’ 外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7-25 17:41:27
  • 수정 2022-08-01 23:3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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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코로나19로 인해 잠정적으로 여행을 중단됐던 본지가 다시 한국의 서원을 준비했다. 대략 500여 개의 서원들이 전국에 흩어져 있다. 이러한 서원들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면서 한국의 서원들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갖기를 기대해 본다. 이번 호도 지난호에 이어 안동시에 소재하고 서원에 대해 살펴본다.<편집자주>


# 유암서원


유암서원 전경

유암서원은 안동시에서 도산서원 방면으로 안막재를 넘어 중앙선 철도 밑 국도를 지나 좌측편 명잣 방면 군도를 따라 이하역 앞 길로 이상리 마을 뒤편 저수지 위 고개를 넘어 두루 마을 옆 산 밑 북향에 위치하고 안동시청에서 10km지점 진성이씨 경류정 종택 건너편에 소재한다.. 이 서원은 낙금헌 이정백(樂琴軒 李庭栢) 선생(1553~1600)을 祭享키 위해 사림에서 세운 서원이다.


그 기원은 두루마을 남쪽 기슭에 퇴계 선생이 왕래하면서 강학하던 서재에서 비롯한다.


그 후 동구 밖으로 옮겨 유암서당을 짓고 송계(松溪) 선생(李亭男, 生員進士)과 송간(松澗) 선생(李庭檜, 縣監),낙금헌 선생을 列享 했다. 다시 두루마을 앞 지금의 서원자리에 移建하고 사림의 공의로 유암이사(流巖里社)가 됐다. 



1787년 서원 훼철령에 따라 송계, 송간 양선생을 북후 물한에 소재하는 작산사(鵲山祠)로 移奉하고 낙금헌 선생 위패는 매판(埋板)한 뒤 묘우와 동서재는 모두 헐리게 되고 강당 10여간이 남아 청년강습 장소로 사용됐다.


100여년 지난 뒤 암고공(巖皐公, 李秀杰, 眞城人)의 발의로 복설을 추진해 사림과 진성 이씨 후손들의 수연금(收捐金)으로 垈畓을 매입하고 동서재 2간과 존덕사, 전사청 등을 신축해 유암서원으로 승격하고 낙금헌 선생을 제향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낙금헌 선생은 1553년 와룡면 주하리 진성이씨 慶流亭 종택에서 출생하고 36세에 式年司馬試에 합격해 생원이 됐고 40세인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분연히 倡義해 대장에 추대됐다. 열읍향병이 예천 용궁에 이르러 대장자리를 金垓公(號 近始齊, 承文院 正字)에게 양여하고 裴龍吉公(號 琴易堂, 翰林)과 좌우 부장으로 협모한다.


뚝향나무(천연기념물 314호)안동, 예천, 상주, 의성, 군위 등지에서 많은 전공을 거뒀다. 다음 해 밀양으로 이진하고 응천, 경주 등지에서 왜군을 물리치던 중 2년간의 전란으로 인해 병을 얻고 가마에 실려 돌아왔다.


서애 선생이 공의 행의를 조정에 천거해 慶基殿 參奉에 제수했으나 전란에 임해 구차하게 죽음을 면하고 관직을 받는 것을 부끄러이 여기고 나아가지 아니했다. 만년에 강학을 위해 집 남쪽에 小齊를 지어 樂琴軒이라 扁額하고 自號로 삼았고 거문고를 벗삼아 안분양병했다. 


서원 건너편 경류정 종택(경북 민속자료 72호) 앞에 세종조 때 영변판관을 지낸 李禎公(선산도호부사, 중이조참판)이 평안도 약산에서 옮겨심은 600년된 뚝향나무(천연기념물 314호)가 있다.


# 용계서원



용계서원은 조선 중기의 학자인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 선생을 배향한 서원이다. 이 서원은 당초 정조 2년(1778) 유일재 선생의 문인들과 후손들이 보덕사(報德祠)를 세워 선생을 제향했고, 뒤에 인재 권대기 선생을 열향(列享)했다. 


대원군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지금까지 복설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서원 맞은 편 언덕에 보덕단(報德壇)을 세워 매년 3월 초정일(初丁日)에 향사하고 있다. 현재는 강당 건물 한 동과 부속 건물 1동이 남아 있다.


# 분강서원


분강 서원은 1613년(광해군5)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현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키기 위해 향현사를 창건해 위패를 모셨다. 그후 1700년 (숙종26)에 서원으로 개편해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해 오던 중 대원군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고종5)년에 훼철, 1967년 옛터 서쪽에 복원하고 영정을 봉안하고 석채례를 행했다.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게 돼 도곡재사를 옛터에 서원을 이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4칸의 승덕사, 8칸의 흥교당, 6칸의 극복재, 6칸의 경서재, 유도문, 12칸의 주소, 협문 등이 있다. 사당인 숭덕사에는 이현보 선생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강당인 흥교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돼 있는데 마루는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등에 사용 되고 동쪽 협실은 재임과 별유사의 방으로, 서쪽 협실은 헌관실로 사용하고 있다. 극복재와 경서재는 각각 동재와 서재로 유생들이 기거하면서 공부하는 곳이고, 정문인 유도문은 향사시 제관의 출입 문으로만 사용하고 있다.



이현보 선생(1467, 세조13∼1555, 명종10)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조작가로 본관은 영천 이고 자는 비중, 호는 농암, 설빈옹으로 참찬 흠의 아들이다. 1498년(연산군4)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32세에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검열, 춘추관사, 예문관봉교를 거쳐, 1504년 38세때 사간원 정언이 됐으나 서연관의 비행을 논했다가 안동에 유배됐다. 


그 후 중종반정으로 지평에 복직돼 밀양부사, 안동부사, 충주목사를 지냈고, 1523년에는 성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표리를 하사받았고, 병조참지, 동부승지, 부제학 등을 거쳐 대구부윤, 경주부윤, 경상도관 찰사, 형조참판, 호조참판을 지냈다. 



1542년 76세 때 지중추부사에 제수됐으나 병을 핑계 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만년을 강호에 묻혀 시를 지으면서 한거했다. 홍귀달 선생의 문인이며, 후배인 이황, 황준량 선생 등과 친했다. 조선시대에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국문학사상 강호시조의 작가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전해오던 ‘어부가’를 장가 9장, 단가 5장으로 고쳐 지은 것과 ‘효빈가’ ‘농암가’ ‘생일가’ 등의 시조 작품 8수가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농암문집’이 전해지고 시호는 효절이다.


# 봉암서원



봉암서원은 허영정(氵許氵穎亭) 남응원(南應元)공을 주향으로 모시고 난재(懶齋) 남융달(南隆達), 유유헌(由由軒) 남급(南㡤碻), 고암(孤巖) 남천한(南天漢)공을 배향한 서원이다. 철종12년(1861) 봉암사를 창건했고 대원군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었으나 1928년 세덕사(世德祠)로 복설했다. 1964년 사림들의 공의로 서원으로 승격돼 매년 3월 중정일에 향사하고 있다. 묘우는 상덕사(尙德祠), 강당은 현휘당(賢輝堂)이다.


# 벽계서원



벽계서원은 철종11년(1860)에 옥계(玉溪) 강봉문(姜鳳文) 선생의 학덕을 추모키 위해 서당을 세우고 위패를 봉안해 오다가 훼철된 뒤 1962년에 복원해 매년 3, 9월 하정일에 향사하고 있다.


# 명호서원


명호서원은 1790년(정조14)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이원과 이주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키 위해 창건됐다. 처음에는 청도군 매전면 온막리의 자미산 아래에 있었고 서원명도 명계서원이라 불렀다. 그 후 1837년(헌종3)에 정상동으로 이전해 명호서원이라 개칭했다. 당시의 경내 건물로는 묘우인 경의사를 비롯헤 명륜당, 동재, 서재, 신문, 전사청, 주소 등이 있었다고 한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5)에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했으나, 매년 9월 중정에 설단으로 향사를 올리고 있다. 



이원(1368~1429) 선생은 고려말과 조선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고성이요, 자는 차산이며, 호는 용헌이다. 고려때 수문하시중이었던 암의 손자이며, 밀직부사 강의 아들이다.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문인으로 1382년(우왕8)에 진사가 되고, 1385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사복시승을 거쳐 예조좌랑과 병조정랑 등을 역임했다. 1392년 조선왕조가 개국되자 지평이 됐고, 1400년(정종2) 좌승지로 있을 때 방원이 그의 동복형인 방간의 난을 평정하고 왕위에 오르는데 협력한 공으로 1401년(태종1)에 좌명공신 4등에 책록됐다. 



같은 해 철성군에 봉작됐고, 같은 해에 공안부소윤을 거쳐 대사헌이 됐다. 다음 해 경기좌우도관찰출척사가 됐고, 1403년에 승추부제학으로 있으면서 병마도절제 사를 겸했다. 1406년에 참지의정부사와 판의용순금사사로 겸직했다. 


이어 대사헌과 판한 성부윤을 거쳐, 1408년에 태조가 죽자 국장을 주관하는 빈전도 감판사가 됐고, 이듬해에 경상도관찰사로 영상주목사를 겸직했다. 같은 해 철성부원군으로 진봉됐다. 1414년 영길도도순문사를 거쳐, 이듬해 6월에 예조판 서로 있다가 12월에 대사헌이 됐다. 이어 참찬을 거쳐 1416년 3월에 판한성부사, 5월에 병 조판서가 됐다. 1417년 판우군도총제와 찬성을 거쳐 이듬해 우의정에 올랐다



1419년(세종 1) 영경연사를 겸했고, 1421년 1월에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같은 해 12월에 좌의정으로 승진됐고, 우의정 정탁과 함께 도성수축도감도제조가 돼 8도의 정부 32만 5,000여명을 징발, 1422년 1월부터 두 달에 걸쳐 그때까지 토성으로 있던 도성 성곽을 석성으로 개축했다. 


1425년에 등극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저서로는 ‘용헌집’ ‘철성연방집’이 있고 시호는 양헌이다. 이주(?~1504)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주지요, 호는 망헌이며 좌의정 원의 증손으로, 현감 평의 아들이다. 



선생은 김종직 선생의 문인으로 1488년(성종19) 별시에 을과로 급제해 검열을 거쳐 정언을 지냈다.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때 김종직 선생의 문인으로 몰려 진도로 귀양갔다가, 1504년 갑자사화 때 전에 궐내에 대간청을 설치할 것을 청한 일이 있다는 이유로 김굉필 선생 등과 함께 사형됐다. 성품이 어질며 글을 잘했고, 시에는 성장의 품격이 있었고, 정언으로 있을 때에는 직언으로 유명했다. 도승지에 추증됐다.


# 도계서원



도계서원은 숙종13년(1687) 옥봉(玉峯) 권위(權暐) 선생(先生)을 제향키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대원군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가 1928년에 복설해 매년 3월, 9월 중정일에 향사하고 있다. 사당은 모현사(慕賢祠)요 동재는 상의재(尙義齋)이다.


# 경광서원



경광서원은 금계리 동편 사천(沙川) 위에 옛부터 유정사(有定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사림에서 선조1년(1568)에 서당을 건립했다. 이어서 현종3년(1662) 경광정사라고 이름을 바꾼 뒤 백죽당 배상지, 용재 이종준 두 선생의 위패를 봉안했다. 


다시 인조27년(1649) 춘파이사(春坡里社)를 창건해 용재 이종준, 경당 장흥효 두 선생을 모셨다. 숙종12년(1687) 서원으로 승격돼 경당 선생의 위패를 옮겨서 백죽당, 용재 두 선생과 함께 제향했다. 대원군 서원철페령으로 훼철됐다가 1873년 단소를 설립해 향사해 왔다. 1978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설돼 매년 9월 중정일(中丁日)에 제향하고 있다./사진출처-문화재청.안동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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