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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18-안동시 편(3)] 퇴계 선생이 왕래하면서 강학하던 서재에서 비롯된 ‘창열서원’ 外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7-27 13:08:06
  • 수정 2022-08-01 23:3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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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코로나19로 인해 잠정적으로 여행을 중단됐던 본지가 다시 한국의 서원을 준비했다. 대략 500여 개의 서원들이 전국에 흩어져 있다. 이러한 서원들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면서 한국의 서원들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갖기를 기대해 본다. 이번 호에도 지난호에 이어 안동시에 소재하고 서원에 대해 살펴본다.<편집자주>


# 창렬서원 


창렬서원은 사육신 중 한 사람인 단계 하위지 선생의 학문과 충절을 추모키 위해 창건했다. 1804(순조 4)년에 창열사를 지어 선생의 위패를 봉안했고, 1809년(순조 9)에 안동시 서후면 송야리에 창건했다.



그 뒤 사림의 중의로 안동시 서후면 이개리로 이건해서 춘추향을 받들어오다가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됐다. 1989년에 사림과 후손들에 의해 현 위치에 복설돼 매년 음력 9월 2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창열사, 4칸의 숭열당, 3칸의 성안재, 2칸의 전사청, 3칸의 신문, 3칸의 유의문 등이 있다. 사당인 창열사에는 단계 선생의 위패가 봉안돼 있고 강당인 숭열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3로 돼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장소로 사용된다. 


성인재는 기숙사로 향사 및 원내의 행사시에 제관과 유림들이 기거한다. 신문은 사당의 대문으로 향 사시 제관의 출입문으로 사용되고, 유의문은 서원의 대문이다. 



하위지(1412~1456) 선생은 군수 담의 아들로 자가 천장, 중장이고 선산 출신을로 본관은 진 주이다. 어릴때부터 남들이 얼굴을 모를 정도로 형 강지와 함께 학문에 전짐했다고 한다. 


1453년(세종 17)에 생원이 되고, 1438년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집현전 부수찬에 임명됐다.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자 세종이 약을 내려 고향에 가서 치료하게 하고, 경상감사에게도 전지해 그의 구료를 하게 했다. 


1444년 집현전 부교리가 돼 ‘오례의주’의 상정에 참여했다. 1446년 동복현감으로 있던 형 강지가 모함을 당해 전라 감옥에 갇혀 병이 위독하자 관직을 사임하고 전라도로 내려가서 형의 병을 간호했다. 그 뒤 1448년 집현전 교리로 복직되고, 이듬해 춘추관의 사관으로 ‘고려사’의 개찬에 참여했다.



1450년(문종 즉위년) 세종때부터 왕을 보좌해 훌륭한 치적을 쌓은 관계로 문종이 즉위하자 장령에 임명됐다. 선생의 강직한 기개는 이때부터 펴져지기 시작했다. 선생은 대간의 직분으로 권세에 굴함이 없이 직언을 꺼리지 않았다. 한때, 대신들의 실정을 적극 공격하다가 왕과 대신들로부터 반격을 받았으나 승지 정이한과 정창손 선생 등의 비호로 무사하기도 했다. 


1453년 (단종 1) 장령에서 집의로 승진했다. 같은 해 문종때 ‘역대병요’와 병서의 수찬에 참여했던 집현전 학사를 수양대군이 앞장서서 가자 시킬 것을 논계하자 이를 반대했다.

선생은 서적의 수찬 사업은 집현전 본래의 업무이므로 하등 가자될 이유가 없음을 들어 자신이 가자되는 것을 반대했다. 또한 이 일을 수양대군이 나서서 처리하는데 대해서도 반대했다. 즉, 관직을 내리고 상을 주는 것은 국가의 공기이므로 경솔히 시행할 수가 없다고 주장했고, 따라서 종신의 신분으로 사은을 베풀려는 수양대군의 처사 는 매우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선생은 자신의 직책이 의리상 불가하다고 청해 집현전 직제학에 전보됐다. 그러자 사직을 한 뒤 신병을 치료키 위해 경상도 영산의 온정에 내려갔다. 그 뒤 1454년 집현전 부제학으로 다시 복직되자 대궐 옆에 있는 불당이 왕실에 이롭지 못함을 들어 이를 훼철할 것을 주장했다. 



한편, 이해에 ‘세종실록’을 편찬하는데 편수관으로 참여했고, 경연에서 시강관으로 왕에게 경사를 강론했다. 이듬해 집현전 부제학에서 예조참 판에 승진됐고, 곧이어 세자우부빈객을 겸하게 됐다. 세조의 즉위 후 선생에게 교서를 내리 는 등 잇단 부름을 받아 예조참판에 임명됐다. 그러나 선생의 본뜻은 진실로 단종을 위하는 일에 있었기 때문에 세조의 녹을 먹는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세조가 즉위한 해부터의 봉록은 따로 한 방에 쌓아두고 먹지를 않았다 한다. 


세조의 강권정치에 맞서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추국의 명을 받기도 했다. 즉, 세조가 즉위하자 왕권강화책으로 종전부터 시행하던 의정부 본래의 권한인 서사제를 폐지시키고 육조의 관장사무를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직접 왕에게 상계하는 육조직계제를 시행해 의정부의 권한을 축소시켰다. 이러한 세조의 조처에 고대 주나라 제도를 들어 의정부 서사제의 부활을 강력히 주장했던 것이다. 1456(세조 2)년에 사예 김질의 고변으로 단종복위 운동이 탄로나 선생도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국문을 받게 됐다. 


선생은 국문을 받으면서 세조에게 이르기를 "이미 나에게 반역의 죄명을 씌웠으니 그 죄는 마땅히 주살하면 될텐데, 다시 무엇을 묻겠단 말이 요" 했다. 선생은 국문과정에서 성삼문 선생등이 당한 작형을 당하지는 않았으나, 사육신 등 여러 절신과 함께 거열형을 당했다. 



선생이 처형되자 선산에 있던 두 아들 호와 박도 연좌돼 사형을 받았다. 작은 아들 박은 어린 나이였으나 죽음앞에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한다. 그는 금부도사에게 어머니와 결별하기를 청해 이를 허락하자 어머니에게 "...죽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아버님이 이미 살해 되셨으니 홀로 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시집갈 누이동생은 비록 천비가 되더라도 어머님은 부인의 의를 지켜 한 남편만을 섬겨야 될 줄로 압니다..."고 하직한 뒤 죽음을 받자 세상 사람들이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하면서 감탄했다 한다. 


뒤에 남효온 선생은 ‘추강집’의 ‘육신전’에서 선생의 인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한 바가 있 다. 


"그는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하였으며, 말이 적어 하는 말은 버릴 것이 없었다. 그리고 공손하 고 예절이 밝아 대궐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렸고, 비가 와서 길바닥에 비록 물이 고 였더라도 그 질펀한 길을 피하기 위하여 금지된 길로 다니지 않았다 한다. 또한, 세종이 양성한 인재 가 문종 때에 이르러 한창 성하여졌는데, 그 당시의 인물을 논할 때는 그를 높여 우두머리 로 삼게 된다"고 평했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됐다. 노량진의 민절서원, 영월의 창절사, 선산의 월암서원 등에 제향됐다. 시호는 충열이다. 


# 서산서원 




서산서원은 조선영조 47년(1771)에 목은(牧隱) 선생의 학덕을 추모키 위해 목은영당(牧隱影堂)인 서산사(西山祠)를 세웠고, 1976년 사림(士林)의 공의로 서원으로 승격해 목은 선생을 배향하고 선생의 10대손 수은(睡隱) 이홍조(李弘祚, 1595∼1660) 선생을 종향(從享)했다.


묘우인 숭덕사는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으로 이색 영정을 보관하고 있고 이색을 주향(主享)으로 하고, 이홍조의 위패를 봉안했다. 강당인 명교당은 서원의 각종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 장소로 사용되는데, 가운데 마루를 두고 양옆에 협실을 배치했다. 




향사 때에 동북쪽 방은 대신(臺臣)들이 사용하고 서쪽 방은 유사들과 집례, 축관이 사용했다. 향사 때 사용하는 제물은 장만해 전사청에 보관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고종 5)에 훼철됐다가 1962년에 후손들이 복원했다.


# 사빈서원


사빈서원은 청계 김진(靑溪 金璡)과 그의 아들 5형제의 유덕을 추모하고 후학을 양성키 위해1685년(숙종 11)에 사림과 자손들의 공의로 세워진 사빈서원이다.



묘호는 ′경덕사′라 했다. 1709년(숙종 35) 동구밖 사수가로 이건해 ′사빈서원′이라 했다가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고 1882년(고종 19) 사림과 후손들에 의해 복설됐으나 현재는 강당과 주사만 남아있다. 임하댐 건설로 인해 임하면 사의리에서 1987년 현위치로 이건했다.


강당은 정면6칸, 측면2칸의 제법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자연석 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그위에 원주와 각주를 혼용해서 세웠는데 중앙 대청은 정면 4칸으로 매우 넓게 했다.



대청을 중심으로 해서 좌우에 통칸 온돌방이 드리워져 있어 일반적인 강당 평면형식이다. 우물마루 상부는 5량가로 구성돼 있고 박공지붕이다. 건물 정면에는 ′경덕사′라는 편액이 있는데 이것은 묘우의 현판을 강당에 옮긴 것으로 보인다.


주사는 정면 5칸, 측면 5칸의 ㅁ자형 와가로서 전체는 남서향해 배치했다. 대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이 되는데 대문칸이 중앙에 배치되지 않고 좌측으로 한칸 물려 배치시키고 있다.



정면 좌측 협칸은 위치와 출입문으로 보아 마구였던 것으로 생각되고, 우측협칸도 좌측과 동일하게 판벽으로 처리했으나 우물마루를 깔아 현재 수납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어 그 방의 위치가 특이하다.


안마당 뒤쪽에 안채에 상당하는 공간이 있는데 정면에 대청을 두고 대청 좌우에 안방과 웃방을 모두 2통칸으로 해 대칭으로 배열했다. 안방 머리쪽에는 도장방인 듯 싶은 방을 설치해 출입은 대청에서만 가능케 했다.



안방과 웃방은 마당쪽으로 한칸 늘여 마당에서 직접 출입도 가능케 했고, 우측 웃방 아래에는 부엌을 뒀고 우측도 좌측과 동일하게 배치시키고 있다. 안채 대청 상부는 5량가로 종량위에는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았다.


강당은 많은 변형과 중수 등의 흔적이 있으나, 주사는 안동지방의 평면양식인 ㅁ자평면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고 변형이나 개수의 흔적은 보이지 않아 원형보존이 양호한 편이다.


# 안동 화천서원




안동 화천서원은 문경공(文敬公)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선생(先生)의 학덕을 기려서 유림들이 현 위치에 세운 서원이다. 



정조10년(1786)에 건립해 9월에 겸암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자인 동리(東籬) 김윤안(金允安, 1560~1620)공과 종손자(從孫子)인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 1598~1674)공을 배향시켜 100여 년 이상 춘추로 향사를 지내오다가 대원군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됐다. 



서원의 훼철을 아쉬워하던 후손들은 1966년부터 기금을 모아 사림들의 공론으로 1996년 5월 2일 복설 고유를 거행했다.


# 청성서원


청성서원은 조선 중기의 학자 송암 권호문(1532~1587)선생을 추모하는 서원으로 건립돼 매년 춘추향사를 지내고 있다. 서원에는 강당.동재.서재.정도문(正道門).청풍사(淸風祠).전사청(典祀廳).신문(神門) 등 모두 7동의 건물이 있다.



1608년(선조 41) 사림의 발의로 연어헌지(鳶魚軒址)에 창건했고 1612년(광해군 4)에 권호문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享祀)를 지내다가 1767년(영조 43)에 풍산읍 막곡리로 옮겼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1909년 다시 지었다.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은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연이어 부모를 여의자 3년씩 여막(廬幕)을 지키며 관계 진출을 단념하고, 청성산(靑城山) 기슭에 무민재(無悶齋)를 짓고 살았다. 만년에 덕망이 더욱 높아져 찾아오는 문인들이 많았고, 류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 등에게 학행(學行)으로 높이 평가받았다.


매년 2월과 8월 하정일에 향사를 올린다. 


# 임천서원


임천서원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명신인 학봉 김성일(1538-1593) 선생을 추모키 위해 조선 인조 12년(1634) 옥동에 건립했다.



이 서원은 1607년(선조 40)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김성일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키 위해 창건해 위패를 모셨다. 1618년(광해군 10)에 ′임천′이라 사액돼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해 왔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가 1908년에 복원했다.



이 서원의 경내 건물로는 숭정사, 홍교당, 동재, 서재, 신문, 전사청 등이 있다. 숭정사는 정면 3칸 건물에 맞배지붕 양식이고 홍교당은 15칸에 팔작지붕이다. 동재와 서재는 각 4칸이고 팔작지붕이다. 그리고 신문과 전사청은 4칸이며 맞배지붕이다


고종 5년(1868) 서원 철폐령에 따라 철폐돼 김성일 선생은 호계서원에 배향됐다. 고종 31년(1894) 현 위치에 본 서원이 재건됐고 1979년 보수정화됐다.



학봉 김성일의 본관은 의성이고 자는 사순이며 호는 학봉이다. 선생의 아버지는 진이다. 선생은 이황 선생의 문인인데 1556년(명종 11)에 아우 복일과 함께 도산의 이황 선생을 찾아 ‘서경’ ‘역학계몽’ ‘심경’ ‘대학의의’ 등을 익혔고, 1564년에 진사가 돼 성균관에서 수학했다. 그후 다시 도산에 돌아와 이황 선생에게서 수학하고, 그로부터 요순 이래 성현이 전한 심법을 적은 병명을 받았다./사진출처-문화재청, 안동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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