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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25] 정소 등의 유풍을 기리는 '곡수서원[曲水書院]'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8-02 15:00:48
  • 수정 2022-08-02 15: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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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곡수서원은 전라남도 순천시 조례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서원으로, 정소(鄭沼)[1518~1572], 정자(鄭滋)[1515~1547], 조대성(趙大成)[1520~1566]의 유풍을 기리는 곳이다.


정소의 자는 중함(仲涵)이고, 호는 청사(菁莎)이며, 송강 정철(鄭澈)의 둘째 형이다. 정소는 12세에 형 정자(鄭滋)와 함께 김안국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18세에 생원과 진사 시험에 합격했다. 



1545년(인종 원년) 을사사화 때 부친과 형이 화를 입어 유배되자 정소는 과거시험과 관직을 단념하고 순천으로 와서 청사정자를 짓고 학문을 강론하면서 살았다. 정소는 순천에서 친교했던 배숙(裵璹), 허엄(許淹), 정사익(鄭思翊)과 함께 ‘승평사은(昇平四隱)’이라 불린다. 율곡 이이가 정소의 묘지명을 지었고, 정소가 남긴 글로는 ‘임청대비음기(臨淸臺碑陰記)’가 있다.



정자는 정소의 형으로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역임했다. 정자는 을사사화 때 윤원형(尹元衡) 일파에 의해 광양(光陽)에 유배됐고, 1547년(명종 2)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돼 경원(慶源)으로 이배되던 도중에 죽었다.




조대성의 본관은 옥천(玉川)이고, 자는 성지(成之)이고, 호는 매창(梅窓)이다. 조대성은 이항(李恒)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정소와 친교가 두터웠다. 명종 때 여절교위(勵節校尉), 정조 때 호조좌랑에 추증됐다.


조구년(趙龜年).유책(柳策).임진상(林鎭商) 등이 1712년(숙종 38)에 발론해 정소가 거주했던 청사헌[순천부 성남 지막동(順天府 城南 止幕洞), 현재 순천시 저전동] 자리에 청사사를 건립했다. 1827년(순조 27) 청사사를 중건하면서 청사서원(菁莎書院)으로 개칭했다. 1868년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가, 1958년에 현 위치인 순천시 조례동에 사우를 재건하면서 곡수서원이라 개칭했다.




곡수서원은 산을 배경으로 전저후고(前低後高)[앞이 낮고 뒤가 높음]의 남향이고 앞에서부터 외삼문, 강당, 내삼문, 사당이 일축(一軸)으로 자리하고 있다. 외삼문(外三門)을 들어서면 마당을 지나 ‘곡수서원’이라는 현판이 달린 정면 4칸 측면 3칸의 강당이 있고, 강당 뒤편으로 계단을 올라 내삼문을 지나면 정면 3칸 측면 1칸의 사당이 있다. 곡수서원 입구 왼쪽에 관리소가 있다.


곡수서원은 영일정씨 청사공파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매년 3월 1일과 9월 1일에 분향하고, 3월 10일에 석채례(釋菜禮)를 개최한다.


곡수서원은 사화 때 의리를 지키고 순천 지역에서 학풍을 진작시켰던 선비들을 배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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