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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27] 남명 조식이 학문 닦던 곳 ‘산청 덕천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8-03 15: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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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경남 산청군 시천면 원리에 있는 덕천서원은 남명 조식(1501∼1572)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그가 학문을 닦던 곳에 세운 서원이다. 

 

덕천서원은 1576년(선조 9)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식(曺植)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해 위패를 모셨다.

 




1576년(선조 9)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최영경, 하항 등 사림(士林)들이 그가 강학하던 자리에 건립한 서원이고 조식유적지(사적 305) 내에 있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됐다가 1602년(선조 35)에 중건됐다. 1609년(광해군 1) 현판과 토지, 노비 등을 하사받아 덕천(德川)이라는 이름으로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됐다. 

 

덕천서원은 강우유맥 남명학파의 본산이 됐고 인조반정 등으로 정치적 풍파를 겪었다. 흥선대원군에 의해 철폐됐다가 1930년대에 다시 복원됐다. 유적지 경내에는 덕천서원과 함께 산천재(山天齋).세심정(洗心亭).조식묘 등이 있다.

 



조식은 1501년(연산군 7) 삼가현(三嘉縣:지금의 합천군)에서 출생했다. 이황과 함께 당시 영남유학의 쌍벽을 이뤘던 대학자로 실천적인 성리학을 중시했다. 일체의 벼슬을 마다하고 현재의 산청군 시천면인 덕산(德山)에서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다가 1572년(선조 5년) 7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덕산 입구의 입덕문(入德門)을 지나면 수령이 400년이 넘는 은행나무가 서 있는 덕천서원에 이른다. 입구의 홍살문을 지나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에 맞배지붕을 올린 솟을삼문인 시정문(時靜門)을 들어서면 정면에 강당인 경의당(敬義堂)이 있고 그 앞쪽으로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좌우에 배치돼 있다.

 



숭덕사는 3칸으로 된 사우(祠宇)로서, 조식의 위패와 최영경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경의당은 5칸으로 된 강당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돼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장소로 사용된다. 동서 양재는 유생들이 공부하면서 거처하는 곳이고, 고사는 향례 때 제수(祭需)를 장만하면서 보관하는 곳이다.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공부하면서 거처하던 곳이고 경의당은 서원의 각종 행사와 유생들의 회합 및 토론장소로 사용되던 곳으로 ‘德川書院’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서원의 중심 건물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으로 중앙에 대청이 있고 그 양쪽으로 툇마루와 난간이 달려있는 2개의 작은 방이 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3월 초정(初丁 : 첫 번째 丁日)과 9월 초정에 향사를 지내고, 양력 8월 10일 남명제(南冥祭)를 행하고 있다. 제품은 4변(籩) 4두(豆)이다. 이 서원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9호로 지정돼 있고, 유물로는 조식의 수묘사성현병풍(手描四聖賢屛風) 외 문집 약간이 있다. 재산으로는 전답 900평, 임야 10정보 등이 있다.

 



지금은 서원의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의 기능만 남아있다

 

경의당 뒤쪽의 신문(神門)을 지나면 사당인 숭덕사(崇德祠)가 나온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에 맞배지붕집으로 중앙에는 조식의 위패, 오른쪽에는 그의 제자인 최영경(崔永慶)의 위패를 모셔 놓았다. 덕천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3월과 9월의 첫 정일(丁日)에 제사를 지내고 매년 양력 8월 18일에는 남명선생의 탄생을 기념하는 남명제가 열린다.

 

1974년 2월 16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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