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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28] 문익점 추모위해 창건한 산청군 '도천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8-03 15:4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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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도천서원은 경상남도 산청군 신안면에 있는 조선전기 문익점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으로, 1401년(태종 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문익점(文益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키 위해 창건, 위패를 모셨다. 1554년(명종 9)에 ‘도천(道川)’이라고 사액돼 사액서원으로 승격됐고, 1612(광해군 4)년에 중건했다.




1787년(정조 11)에 복액하고 그 뒤 권도(權濤)를 추가배향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됐다가 광복 후 유림에 의해 복원됐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3칸의 내삼문(內三門), 4칸의 강당(講堂), 각 5칸의 좌우 서재(書齋), 기타 창고와 고사(庫舍) 등이 있다. 사우의 중앙에는 문익점의 위패가, 오른쪽에는 권도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강당은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들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장소로 사용되고, 고사는 고자(庫子)들이 거처하면서 향례 때 제수(祭需)를 마련해 두는 곳이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3월 초정(初丁:첫 번째 丁日)과 9월 초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고, 제품(祭品)은 4변(籩) 4두(豆)이다. 재산으로는 전답 4,500평, 임야 10정보 등이 있다.


문익점의 본관은 남평(南平). 첫 이름은 익첨(益瞻). 자는 일신(日新), 호는 삼우당(三憂堂). 강성현(江城縣: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 출생. 문숙선(淑宣)의 아들이다.






문익점은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해 김해부사록(金海府司錄)과 순유박사(諄諭博士) 등을 지냈다.


1363년 사간원 좌정언(司諫院左正言)으로 있을 때 서장관이 돼 계품사(啓禀使) 이공수(李公遂)를 따라 원나라에 갔다. 때마침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던 고려 사람 최유(崔濡)가 원나라에 와 있던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옹립하고 공민왕을 몰아내려 하고 있었다. 실제로 원나라는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봉했고, 최유는 원나라의 군사 1만 명을 얻어 요동(遼東)까지 진군해 왔으나 1364년 1월 최영(崔瑩) 등에게 패했다.



‘고려사’열전 문익점전에 의하면, 정치적 격동기에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문익점은 원에 체류한 채 덕흥군 편에 붙었으나 덕흥군이 패배하자 고려로 귀국했다. 문익점이 실제로 덕흥군을 지지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다. 원나라에서 귀국할 때 그는 종자(從者) 김룡(金龍)을 시켜 밭을 지키던 노파가 막는 것을 무릅쓰고 목화 몇 송이를 따서 그 종자를 붓대 속에 넣어가지고 돌아와 장인 정천익(鄭天益)에게 나눠 주고 함께 시험 재배를 했다.





처음에는 재배기술을 몰라 한 그루만을 겨우 살릴 수 있었으나 3년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성공해 전국에 목화씨가 퍼지도록 했다. 그러나 목화씨를 어떻게 제거하고 실을 어떻게 뽑을지 모르던 중 때마침 정천익의 집에 머물던 중국[元] 승려 홍원(弘願)에게 물어 씨를 빼는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 만드는 법을 배워 의복을 짜서 입도록 했다.


이처럼 문익점은 정천익과 함께 목화 종자의 도입, 시험재배 성공, 종자의 전국적 보급, 목화섬유를 이용한 의료제조 등 그 공로는 참으로 컸다. 조식(曺植)은 문익점의 그 공을 기려 훗날 “백성에게 옷을 입힌 것이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후직씨와 같다(衣被生民 后稷同).”는 시를 지어 찬양한 바 있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자 그는 곧 전의주부(典儀主簿)가 됐고, 창왕 때는 좌사의(左司議)로 왕 앞에서 강론을 하기도 했다. 이때 이준(李遵) 등이 사전(私田)을 다시 세우도록 함은 옳지 않다고 상소한 바 있는데, 문익점은 병을 핑계로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문익점은 이색(李穡).이림(李琳).우현보(禹玄寶) 등과 더불어 사전 혁파를 비롯한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전제개혁을 반대했던 것이다. 문익점은 이 사건으로 조준(趙浚)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사후 조선 태종 때 참지정부사(參知政府事) 강성군(江城君)에 추증(追贈)됐고, 1440년(세종 22) 영의정과 부민후(富民侯)에 추증됐고 시호는 충선공(忠宣公)이다. 또한 그의 고향 단성의 도천서원(道川書院)과 전라남도 장흥의 월천사우(月川祠宇)에 사당이 세워졌다.



또, 문익점과 정천익이 처음 목화를 시험 재배했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는 문익점면화시배지(文益漸棉花始培地)가 사적 제108호로 지정됐고, 여기에 삼우당선생면화시배사적비(三憂堂先生棉花始培事蹟碑)가 세워져 있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지고 와 재배에 성공하고 이를 가공해 의복을 짓게 된 경로를 밝힌 기록은 조식이 쓴 ‘목면화기(木棉花記)’에 있고, 이 책은 규장각도서에 있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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