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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29] 권도(權濤)의 학문과 덕행 추모위해 창건한 ‘완계서원(浣溪書院)’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8-03 15:54:19
  • 수정 2022-08-03 18:3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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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1614년(광해군 6)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권도(權濤)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키 위해 창건해 위패를 모신 완계서원은, 1788년(정조 12)에 ‘완계(浣溪)’라고 사액됐고 그 뒤 권극량(權克亮)을 추가 배향했다. 1871년(고종 8)에 훼철됐다. 그 후 1883년(고종 20)에 강당을 중수했고, 1985년에 중건했다.


‘동계선생문집책판’은 서원에 보관해 왔으나 도난 등의 문제점이 있어 5~60년 전부터 선생의 13대 종손인 권진혁(權珍赫)씨가 선생의 생가인 단계리 585번지의 별묘인 영모당에 보관해 오고 있다.





주벽-권도(權濤, 1575~1644)는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정보(靜甫), 호는 동계(東溪)이다. 아버지는 사포서별좌(司圃署別坐) 세춘(世春)이고, 어머니는 상산김씨(商山金氏)로 담(湛)의 딸이다. 정구(鄭逑).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1601년(선조 34) 진사시에 합격했고, 1623년(인조 1) 승정원주서에 제수됐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한림(翰林)으로 왕을 공주까지 호종(扈從)한 공으로 원종훈(原從勳)이 돼 성균관전적에 제수됐다. 1625년에는 홍문관부수찬에 제수됐고, 1628년 유효립(柳孝立)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영사원종공신(寧社原從功臣) 1등에 책록됐다. 



1631년 원종의 추숭(追崇)을 극력 반대한 일로 남해로 유배됐다가 1640년에는 사간원대사간에 제수됐다. 죽은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됐고, 도천서원 (道川書院)에 제향됐다. 저서로는 ‘동계문집’ 8권이 있다.

 

권극량(權克亮, 1584~1631)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임(士任), 호는 동산(東山)이다. 아버지는 약(瀹)이고, 어머니는 함안조씨(咸安趙氏)로 충의공(忠毅公) 종도(宗道)의 딸이다.



어려서는 체격이 크고 기상이 뛰어나 사람들로부터 크게 될 인물이라는 평을 받았다. 아버지가 일찍 죽고, 9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가족들과 함께 약 8년 동안 회덕.성주 등지로 피난 다니다가 17세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회덕에 있을 때 이윤우(李潤雨)에게 학문의 도리를 배웠고, 고향에 돌아와서는 다시 장현광(張顯光)을 찾아가 학문의 요체를 터득했다. 그 뒤 별시(別試)에 나아가 초시에 1등으로 합격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복시에 응시하지 않았다.




진주의 서굴촌에 조그마한 집을 지어 성인의 유상(遺像)을 모셔놓고 잠명고훈(箴銘古訓)을 독송하면서 분향묵좌(焚香默坐)로 수행해 사람들이 그를 동산처사(東山處士)라고 불렀다. 또한, 하동에 향약을 만들어 풍속교화에 힘썼다.


1627년(인조 5)에는 영릉참봉(英陵參奉)에 임명됐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는 시에도 능했고, 조위한(趙緯韓) 형제 등과 경의(經義)를 강론한 적이 있다. 두릉서원(杜陵書院).완계서원(浣溪書院)에 제향됐다. 저서로는 ‘동산선생문집’ 3권이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묘우(廟宇).신문(神門).정당(正堂).문루(門樓).고사(庫舍) 등이 있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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