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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32 전남 영광군 편] 조선시대 중기의 학자.의병장인 강항 배향한 서원 ‘내산서원’ 外
  • 이승준
  • 등록 2022-08-06 23:03:27
  • 수정 2022-12-26 10:4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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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코로나19로 인해 잠정적으로 여행을 중단됐던 본지가 다시 한국의 서원을 준비했다. 대략 500여 개의 서원들이 전국에 흩어져 있다. 이러한 서원들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면서 한국의 서원들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갖기를 기대해 본다. 이번 호에도 전남 영광군에 소재하고 있는 서원에 대해 살펴본다.<편집자주>


# 내산서원



조선시대 중기의 학자이자 의병장인 강항(姜沆:1567∼1618)을 배향한 서원으로, 1977년 10월 20일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됐다. 


1635년(인조13)에 용계사(龍溪祠)라는 이름을 사액받고, 1702년(숙종28)에 중수했다. 그후 흥선대원군의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가 1974년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 현재의 위치로 옮겨 다시 세워졌다. 최근 들어 임진왜란 400주년 재조명사업의 일환으로 1992년부터 연차적으로 유적지 정비사업을 했다.



낮은 야산을 배경으로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고, 외삼문과 용계사(사당)를 중심축으로 외삼문, 내산서원, 내삼문, 사당 순으로 배치해 전학후묘의 형식을 따랐다. 주변의 산기슭에는 강씨문중의 무덤이 여러 개 있고, 서원 뒤쪽으로 돌아 산을 올라가면 강항과 두 아내의 무덤이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맞배지붕으로 아담하고 소박하다. 서원은 정면 4칸, 측면 3칸에팔작지붕이다. 외삼문은 근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내산서원 장서각에는 ‘강감회요’ 목판과 ‘수은집’ ‘운제록’ ‘문선’ ‘간양록’의 필사본 등이 보관돼 있다.



강항은 강희맹의 5대손으로 1593년(선조26)에 전주 별시문과에 급제해 교서관 박사, 성균관 전적을 거쳐 형조좌랑에 이르렀다. 정유재란 때 이순신(李舜臣)의 휘하로 들어가고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다가 왜군을 만나 투신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 가족이 모두 일본으로 압송됐다. 



강항은 일본에서의 유폐생활 중 일본의 역사, 관제, 지리 등을 알아내어 ‘부중견문록(賦中見聞錄)’을 작성, 본국으로 보냈고 일본에 주자학을 전했다. 1600년(선조 33) 유배에서 풀려 귀국했으나 그의 충절을 알아주는 이가 없자 자신을 죄인으로 자처하면서 귀향해 후학 교육에 전념했다. 


# 이흥서원 



이흥서원은 사평공 강학손 등 진주강씨사평공파 선조 5위를 배향하고 있는 서원으로 이흥사, 경앙문, 모현당, 숭의문, 팔룡당 등이 있다.


강당인 모현당은 원래 1800년(정조 24)에 이흥재로 건립됐으나, 모현당의 중수기와 상량문을 볼 때 1918년 중수, 1933년 증축 중수 한 뒤 1958년에 다시 증수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는 1940년대 초부터 이흥학원이 개설돼 1951년까지 운영했고, 한국전쟁 때는 인민위원회 사무실로도 사용된 적이 있다.



정면 8칸, 측면 4칸의 3고주 7량가 팔작지붕으로, 중앙 2칸에 대청이 있고, 대청 좌우로 방이 2칸씩 구성되는 등 강당으로는 매우 큰 규모를 보이고, 건물 곳곳에서 근현대적인 장식기법이 확인되는 등 역사.건축적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 계송서원





전남 영광군 영광읍 계송리에 있는 계송서원은 1966년(병오) 향내유림의 발의로 하동 정간, 미산 정례손 등의 절의를 추모키 위해 현소재지에 사우를 창건하고, 처음 이를 도내사라 제액해 제향해 오다가 후에 계송서원이라 개액했다. 향사는 음력 춘 2월 20일, 추 8월 20일에 모신다./사진출처-문화재청, 영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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