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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34] 포은 정몽주 선생의 정신 깃든 ‘임고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8-08 06: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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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고서원 전경 [이승준 기자] 임고서원(臨皐書院)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역사인물인 포은(圃隱) 정몽주 선생을 추모키 위해 조선 명종(明宗) 8년(1553)에 노수(盧遂), 김응생(金應生), 정윤량(鄭允良), 정거(鄭?) 등의 사람들을 창솔해 부래산(浮來山)에 창건을 시작해 다음 해인 1554년에 준공했고,명종으로 부터 사서오경과 많은 위전(位田)을 하사받은 사액서원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돼 선조 36년(1603) 현 위치에 이건(移建)해 재사액(再賜額) 받았고, 인조 21년(1643)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을 배향하고, 정조 11년(1787)에는 지봉(芝峰) 황보인(皇甫仁)을 추배했고 고종 8년(1871)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으나 고종 16년(1879)에 존영각(尊影閣)을 건립해 영정을 봉안했다.




1965년에 복원해 포은 선생만 복향하고 1980년부터 1999년까지 1차 성역화사업을 마치고 2001년 지봉(芝峰) 황보인(皇甫仁)을 다시 배향했고, 묘우는 문충사(文忠祠), 내삼문은 유정문(由正門), 강당은 흥문당(興文堂),동협은 경의협(敬義夾), 서협은 명성협(明誠夾), 동재는 수성재(修省齋), 서재는 함육재(涵育齋), 문루는 영광루(永光樓)이고, 경내 심진각(尋眞閣)과 전사청(典祀廳) 포은 선생 신도비(神道碑).단심가비(丹心歌碑), 백로가비(白鷺歌碑) 등이 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담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 선생의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이다.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개성에 5부학당(學堂)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하고 ‘신율(新律)’을 간행, 법질서의 확립을 위해 노력했다.


정몽주의 초명(初名)은 몽란(夢蘭)인데, 그의 어머니가 그를 임신했을 때 난초 화분을 품에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뜨리는 꿈에 놀라 깨어나 그를 낳았기 때문에 지은 이름이다.


또 정몽주가 아홉살 때 어머니가 낮에 검은 용이 뜰 가운데 있는 배나무로 올라가는 꿈을 꾸다 깨어나 밖으로 나가 보니 그가 올라가 있었다.



그래서 몽룡(夢龍)이라고 고쳤고, 그가 관례를 치를 무렵 아버지의 꿈에 ‘중국의 학자 주공선생이 나타나 아들이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면서 몽주(夢周)로 고쳤다.


정몽주는 태어나면서부터 재주가 남달랐고, 어깨 위에 북두칠성 모양의 검은 점이 일곱개나 있었다고 한다.


포은 정몽주선생은 성리학이 고려와 조선에 뿌리내리는데 큰 역할을 함으로 동방이학의 조종으로 존숭받는 학자이다.



고려 말 국운이 기울어 가는 고려를 버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한 이성계, 정도전 등의 개국세력을 상대로 고려왕조를 지키려다 개성의 선죽교에서 이방원 일파에게 피살된 인물로 후세에 충절의 표상으로 추앙받고 있다.


문집에는 ‘포은집(圃隱集)’이 있고, 충절의 시조 ‘단심가(丹心歌)’와 많은 한시가 전해지고 있다.



선생은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3년 동안 부모님의 여막을 지켜 효행을 실천했는데 이때 행한 삼년상은 우리나라 유교식 상례의 표준이 됐다.


이러한 포은 정몽주 선생의 충절, 학문, 사상, 효행을 기리기 위해 임고서원이 세워졌고, 그 가치가 인정돼 경상북도 기념물 제 62호로 지정됐고, 포은 정몽주 유허비 또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272호로 지정됐다./사진출처-영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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