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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39] 지산 조호익을 배향하는 ‘도잠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8-10 16: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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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영천은 학자를 많이 배출해 그들을 배향하는 서원이 많은 곳으로 정몽주와 박인로를 종사하는 임고서원과 도계서원을 비롯한 크고 작은 서원이 많다. 특히 지산 조호익을 배향하는 도잠서원은 조선시대의 국가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의 진면목인 실천궁행의 역할을 다한 곳 중의 하나이다.


도잠서원은 1612년 모사리에서 건립됐고, 1613년 (광해군5) 조호익의 위패를 봉안해 지봉서원이라 했다가, 1678년 현 위치인 대창면 용호리로 이건했고, 도잠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 지역의 유생들에게 학문을 강론해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했다.



고종때 훼철된 후 1914년에 다시 복원했다. 서원의 구조는 외삼문을 들어서면 동재인 희안재, 서재인 봉원재, 중앙에는 강당인 회만당이, 사당인 성모묘는 강당 뒷 편에 있고, 숙종이 내린 사제문에서 "내가 깊이 사모한다"(우여심모.寓予深慕)고 해 병와 이형상이 묘우이름을 지은 것이다.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1545~1609)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사우(士友) 호는 지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증조부가 중종때 청백리로 녹선된 치우는 사옹원정이고, 조부는 예조정랑을 지낸 효연이고, 그의 부는 윤신이다.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서 학문영역 중 예학과 역학에 뛰어났다. 



일평생 주역을 공부하면서 운명하는 순간에도 "내가 없어서 서운해 할 것"이라고 자부할 정도로 주역을 애독했고, 임란시 평양성을 탈환할 시에는 친구인 서애 유성룡이 평양성 탈환여부를 묻자 그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해주면서 "내가 서애 때문에 점쟁이가 된 기분"이라고 말했다.



1576년 경상도도사 최황에게 반항한 죄로 강동에 유배돼 배소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이 지역에서 문풍을 크게 진작시켜서 선조임금으로부터 관서부자(關西夫子)라는 편액을 하사받기도 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풀려나 소모관이 돼 중화.상원 등지에서 전공을 세워 녹피(鹿皮)를 하사받았고, 대동법시행에 큰 역할을 했던 잠곡 김육은 그의 문인이다.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영천의 도잠서원, 성천의 학령서원 등에 제향됐다. 문집으로 ‘지산집’외 ‘주역석해’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일찍이 중형 광익(취원당)과 함께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 학문에 정진했고 조모는 송재공의 따님으로 퇴계선생의 사촌누님이었다./서진-영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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