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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40] 경주여행 경주 최부자의 시조 최진립의 용산서원(龍山書院)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8-10 16:2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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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용산서원(龍山書院)은 조선의 무신인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 1568∼1636)을 제향하는 곳이다. 그의 고택은 인근에 경주 최부자 집으로 유명한 충의당(忠義堂)으로 처음 흠흠당(欽欽堂)으로 부르던 건물을 1760년경에 수리하면서 충의당으로 현판을 바꿨다.


용산서원은 1699년(숙종25) 경주부윤 이형상(李衡詳)이 최진립 장군을 향사키 위해 지역 유림과 함께 건립 했다.




‘용산서원(龍山書院)’ 편액은 조선 고유의 서풍이라 할 동국진체(東國眞體)의 개척자인 이서(李敍, 1662∼1723)의 글씨이고, 이때 기문은 이서의 이복동생이자 ‘성호사설(星湖僿說)’의 저자 성호 이익(李瀷)이 지었다.


편액에 새겨진 부드러우면서도 활달하고 기운찬 글씨가 눈길을 시원하게 해준다. 이 편액은 검은 바탕에 흰 글씨이고, 특이하게 틀 부분을 녹색으로 칠했다.




1711년에는 '숭렬사우(崇烈祠宇)'의 묘액이 내려졌고, 원호도 용산서원이라 했다. ‘숭렬사우(崇烈祠宇)’의 글씨도 이서(李敍)의 글씨라 한다. 이 편액은 용산서원 편액과 반대로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되어 있다. 이는 임금이 내린 편액이기 때문이다. 왼쪽 끝에 작은 글씨로 ‘승정후 육십칠년 구월 일 사액 ’崇禎後 六十七年 九月 日 賜額’이라는 글귀가 있다.



본래 1695년 잠와를 제향 할 사당을 세우려고 하다가 흉년으로 중단했고, 1699년에야 건립했다. 이듬해에 사당에 잠와 위판이 봉안됐고, 1701년 강당인 민고당과 호덕재(好德齋), 유예재(遊藝재) 등이 완공됐다. 숭렬사우에 부기(附記)된 내용인 ‘승정후 육십칠년’은 1694년인데 당시는 서원이 건립되기 전이다.


사액결정은 1694년에 있었고, 이서의 편액 글씨도 그때 썼으나 사당이 건립되기 전이라 사당이 건립된 후인 1711년에 사액 편액을 만들어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이다.


숭렬사우1870년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 됐고, 현재의 건물은 1924년에 중건된 것으로 이전에는 청풍루(淸風樓), 서원청(書員廳)등 여러 건물이 더 있었다.


용산서원은 전면에 강당인 민고당(敏古堂)을 배치하고, 그 뒤쪽에 단을 올려 숭렬사우(崇烈祠宇)를 둔 전학후묘(前學後墓)의 구조로 되어 있다. 경내 건물로는 사우(祠宇), 신문(神門), 민고당(敏古堂), 전사청(典祀廳), 식강문(植綱門), 고사(庫舍), 포사(庖舍), 유사실(有司室), 신도비각(神道碑閣) 등이 있다.


신도비각숭렬사우는 정면3칸, 측면 1칸이며, 민고당은 정면4칸, 측면2칸의 규모로 중앙의 2칸은 마루를 두고, 양쪽 협실 흥인재(興仁齋)와 명의재(明義齋)로 돼 있다.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2월 하정(下丁: 세번째 丁日)과 8월 하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고, 제품은 4변(籩) 4두(豆)이다. 유물로는 문헌 500여 권과 잠와실기(潛窩實記) 목판본 200여 점이 보관돼 있다./사진출처-문화재청,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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