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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41] ‘조선학문의 으뜸 고을 성주’ 서원 ‘회연서원’ 外(1)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8-12 04:55:52
  • 수정 2022-08-12 05:2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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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코로나19로 인해 잠정적으로 여행을 중단됐던 본지가 다시 한국의 서원을 준비했다. 현재까지 확인한 바 전국에 대략 500여 개의 서원들이 흩어져 있다. 이러한 서원들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면서 한국의 서원들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갖기를 기대해 본다. 이번 호와 다음 호에는 경북 성주군에 소재하고 있는 서원을 살펴본다.<편집자주>


# 회연서원



회연서원은 조선 선조 때의 대유학자이며 문신인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위해 그의 사후인 인조 5년(1627) 제자들이 뜻을 모아 세운 서원이다.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51호.


서원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선조 16년(1583)에 정구가 회연초당(檜淵草當)을 세우고 인재를 양성하던 곳으로, 숙종 16년(1690) 현판.서적.토지.노비 등을 하사받아 국가로부터 서원으로서 권위를 인정받은 사액서원이 됐다. 고종 5년(1868)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됐다가 1970년대에 복원했고, 매년 음력 2월과 8월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희연서원 전경 

서원의 주향(主享)인 한강 정구는 외증조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도학을 전수하고, 그 기반 위에 퇴계학과 남명학을 통합해 새로운 학통을 세워 실학의 연원을 확립했고, 우주 공간의 모든 것을 연구대상으로 삼아 경서, 병학, 의학, 역사, 천문, 풍수지리 등 모든 학문에 관심을 가졌다. 


회연서원 향현사(鄕賢祠)특히 예학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대학자였던 그는 평소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국가의 부름을 거절하지 못해 부득이 관직에 나올 경우에는 주로 외직을 맡아 선정을 베풀었고, 내직으로 우승지(右承旨), 공조참판(工曹參判), 대사헌(大司憲) 등을 역임했다. 사후에 문목(文穆)의 시호(諡號)가 내려졌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됐다.


경내의 건물로는 구(舊)사당, 강당, 동.서재, 신(新)사당, 전사청(典祀廳), 현도루(見道樓) 등이 있고, 정구가 직접 조성한 서원 앞뜰의 백매원(百梅園)에는 신도비(神道碑)가 서 있다. 그 밖에 한강 정구와 관련된 유물, 유품이 전시돼 있는 유물 전시관과 향현사(鄕賢祠), 관리사가 있다. 



사당에는 한강 정구를 주향(主享),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를 종향(從享)으로 모시고 향현사에는 신연(新淵) 송사이(宋師頤), 용재(容齋) 이홍기(李弘器), 육일헌(六一軒) 이홍량(李弘量), 모재(茅齋) 이홍우(李弘宇), 동호(東湖) 이서(李) 등 한강 정구와 동년배로서 지역민들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들의 위판이 봉안돼 있다.


# 문곡서원


홈실 도산마을에 위치하고 있는 1750년(영조 26)에 세워진 서원으로서 이견간(李堅幹)을 향사해 오다가 1871년(고종 8)에 훼철돼 문곡서당으로 보존해 오던중 1989년에 복원했다. 


문곡서원 

1996년 봄에 유림의 정론으로 고려 충혜왕때 수문전대제학(修文殿大提學)을 지낸 이대(李玳)와 형조참판을 지낸 이군상(李君常)을 배향(配享)하고 있고, 유림에서 매년 춘추에 향사하고 있다.


이견간(고려 원종~1330)의 자는 직경(直卿), 호는 국헌(菊軒), 본관은 벽진(碧珍)으로, 벽진장군(碧珍將軍) 총언의 후손이다. 그는 고려 충렬(忠烈), 충선(忠善), 충숙왕(忠肅王) 3대에 걸쳐 벼슬이 통헌대부, 민부전서, 집현전대제학, 지밀직사사, 홍문관사 등을 역임했다. 


문곡서원 전경

고려 충숙왕 4년(1317)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상주객관(常州客館)에서 지은 두견시(杜鵑詩)는 천하에 명성을 떨쳐 그를 세상에서 산화선생(山花先生)이라 불렀다. 시호(諡號)는 문안(文安)이고, 밀양의 용안서원(龍安書院)에 제향(祭享)됐다.


# 도암서원(道巖書院)


도암서원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한리학관(漢吏學官)을 지낸 송계(松溪) 권응인(權應仁)을 향사(享祀)키 위해 향내 사림이 1800년경에 선남면 문방리에 건립한 서원으로,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거 훼철된 후 복원되지 못했다. 서원의 위치와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고, 송계문집(松溪文集)에 좌랑(佐郞) 이규진(李奎鎭)이 지은 상량문(上梁文)이 수록돼 있다.


권응인(1517~?)의 자는 사원(士元), 호는 송계(松溪),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희맹(希孟)의 아들로, 그는 성주 선남면 오도리 출신으로 재주가 뛰어났다.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벼슬은 한리학관(漢吏學官)을 지냈다. 


1562년(명종 17) 문장이 능한 일본 사신이 왔을 때 시재(詩才)가 뛰어나 특명으로 선위사(宣慰使) 일행으로 이를 맞았다. 당시 송대(宋代)의 시풍(詩風)이 유행하던 문단(文壇)에 당나라 후기의 시풍을 받아들여 큰 전환기를 가져왔고, 시평(詩評)에도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저서(著書)로 송계시집(松溪詩集)과 송계만록(松溪漫錄)이 전하고 있다.


# 옥천서원 


이 서원은 조선중기 인물인 이사룡(李士龍)을 제향키 위해 건립한 것이다. 서원은 숙종 18년(1692) 성주목사 안방준(安邦俊)과 관내의 사민(士民)들에 의해 그가 살았던 곳인 월항면 인촌리 작촌에 충렬사(忠烈祠)로 처음 건립된 것에서 연유하고, 정조 20년(1796) 사액됐다. 



그 후 충렬사는 옥천충렬사(玉川忠烈祠) 또는 옥천서원(玉川書院)으로 불려지다가 고종 8년(1872)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됐고, 1919년 직계후손들의 집성촌이 있는 현 위치에 중건됐다. 이사룡(李士龍, 1595~1641)은 본관이 성산(星山), 자는 사중(士中)으로 조선중기의 무인이다. 그는 인조 18년(1640) 청나라가 명나라를 치기 위한 원병으로 징발돼 동북지방의 전투에 출전했고, 다음 해의 접전에서 임진왜란 당시 입은 명의 은혜를 생각해 전투에 임하여 명군에 공포(空砲)를 쏘다가 발각돼 처형됐다. 


옥산서원 

이후 그는 의사(義士)로 불리게 됐고, 정조 17년(1793) 성주목사에 추증되고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서원은 산록 경사지에 위치한 관계로 부지를 4단으로 조성했고 앞쪽으로 강당인 충의재와 동.서재가 자리하고, 뒤쪽에 사당인 충렬사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방법을 취하고 있다. 


옥산서원 충렬사 또한 강당 우측에는 서원이 훼철됐다가 중건되기 이전 사당의 역할을 대신했던 가묘(家廟)의 일곽이 자리하고 있다. 옥천서원은 건축적인 측면에서 사당과 가묘가 일곽 내에 공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원의 변화된 양상을 살필 수 있을 뿐 아니라, 제향 주인공인 이사룡이 조선후기 숭명배청사상의 중요한 하나의 동기를 부여하고 있는 매우 주목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 운양서원 


운양서원은 여희림(呂希臨)의 위패를 봉안한 서원으로써 그가 1553년에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뒤 언제인지는 모르나 천곡서원 향현사(鄕賢祠)에 위패를 모시고 추앙됐다. 


운양서원 전경 

이 서원의 첫 이름은, 연봉산(延鳳山) 밑에 자리 잡았기에 연봉서원(延鳳書院)이었다. 내 이름이伊川(이천)이요, 동산이름이 운곡산(雲谷山)이라, 이천운곡(伊川雲谷) 네글은 전답자에서,川谷(천곡) 두글자를 따서 정구(鄭逑)가 이황(李滉)에게 품해, 천곡서원(川谷書院)으로 바꾸게 된 것이라 한다. 1874년에 서원이 다시 세워지면서 운양서원이라 했다.


원정은 처음 천곡서원(川谷書院) 동별사(東別祠)인 향현사(鄕賢祠)에 제향(祭享)됐다. 1868년(고종 5)에 서원 철훼령으로 서원이 훼철됐다가, 1874년 사림의 힘으로 운양서원(雲陽書院)이 세워져, 다시 명덕사(明德祠)에 위패를 모시고 춘추향사가 이뤄지고 있다. 


운양서원 강당 여희림(1481~1553)의 자는 대지(大之), 호는 원정(圓亭), 본관은 성산(星山)으로 성종 때의 원종공신 선공감역(繕工監役) 우창(遇昌)의 아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도형(都衡), 이광(李光) 등과 함께 공부했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과거를 단념하고 사림으로 지내다가 중종 2년(1507)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1517년 영상(領相) 정광필(鄭光弼)의 천거(薦擧)로 왕자 복성군(福城君)의 사부(師傅)가 됐다. 



1518년 현량과(賢良科)가 설치되자 형 희단(希端)과 함께 천거됐으나 응시하지 않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화(禍)를 면했다. 1522년 복성군 유배시 사부를 지냈던 것으로 기장(機張)과 함평(咸平)에 유배됐고, 1538년 등용돼 지평(持平)에 올랐다. 그 뒤 귀향해 수촌리에서 남전향약(藍田鄕約)을 시행키 위해 월회당(月會堂)을 일으켜서 남전향약의 첫 보급자가 됐다.


서원은 벽진면 운정리 우복실마을 뒤편, 산록이 감싸안은 곡내에 남향해 위치하고 있다. 건물은 토석담장을 두른 솟을삼문 내에 강당을 중심으로 전면 양측에 동재(益智軒)와 서재(敦禮齋)가 위치하고, 강당의 동쪽에 별도로 구획해 사당인 명덕사(明德祠)가 있다. 



강당은 화강석 기단을 높게 쌓아 계단을 뒀고, 그 위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ㄷ자형 팔작지붕으로 중앙 3칸에 마루를 놓고 좌우에 각각 측면 2칸의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 구조다. 기둥은 전.후열에만 두리기둥을 놓았다. 동.서재는 정면이 각 3칸의 맞배지붕으로 모두 방을 뒀고, 또한 사당은 정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내삼문(內三門)안에 위치하고 있고, 기와가 노후해 모두 동(銅)기와로 교체했다.


향사일은 음력이월 마지막 정일(丁日)과, 음력팔월 마지막 정일(丁日)에 향사한다.


# 천곡서원(川谷書院)


천곡서원은 벽진면 수촌리에 있었던 서원으로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 1516~1568)이 사림의 공의(公議)를 모아 폐사지(廢寺址)인 지장사(智藏寺) 터에 1558년(명종 13) 창건하고, 목사 황준량(黃俊良)이 이를 이어 공사를 마쳤다. 


처음에는 영봉서원(迎鳳書院)이라 편액(扁額)하고 문열공(文烈公) 이조년(李兆年), 문충공(文忠公) 이인복(李仁復)과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을 봉안(奉安)했으나, 문목공(文穆公) 한강 정구가 와룡고사(臥龍故事)를 인용(引用)해 퇴계(退溪) 이황(李滉)에게 품의(稟議)해 천곡서원(川谷書院)으로 개칭(改稱)하고 정자(程子:程), 주자(朱子:朱熹)와 김굉필(金宏弼)의 위패(位牌)를 모셨다. 


1624년 사액(賜額)되고 1607년 중액(重額)됐고, 그 후 인조 계해년(癸亥, 1623)에 조정에 요청해 문목공 정구를 종사(從祀)했고, 임오년( 1643)에 문강공(文康公) 여헌 장현광을 종사(從祀)케 했다.


창건 당시 건물의 규모는 50 여칸으로 정당(正堂)을 성정당(誠正堂), 동재를 극복재(克復齋), 서재를 경의재(敬義齋)라 하고 문루(門樓)를 고명루(高明樓)라 했고, 풍영당(風詠堂)을 뒀다. 


또 별사(別祠)로 충현사(忠賢祠)를 둬 문열공 이조년.문충공 이인복을 향사하다, 계유년(癸酉, 1633)에 충익공(忠翼公) 정곤수(鄭崑壽)를, 병오년(丙午, 1666)에 문충공(文忠公) 이숭인(李崇仁)을 병향(竝享)했다. 


향현사(鄕賢祠)를 둬 지지당(止止堂) 김맹성(金孟性), 행정(杏亭) 도형(都衡), 원정(圓亭) 여희림(呂希臨), 충숙공(忠肅公) 송희규(宋希奎), 칠봉(七峰) 김희삼(金希參), 대암(臺巖) 홍계현(洪繼玄)을 제향(祭享)했으나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 서원의 기문(記文)은 퇴계 이황이 지었다.(다음호에 계속)/사진-문화재청, 한국관광공사, 성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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