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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42] ‘조선학문의 으뜸 고을 성주’ ‘청천서원’ 外(2)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8-13 16:47:04
  • 수정 2022-08-15 11:4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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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천서원


1729년(영조 5) 사림에 의해 김우옹(金宇顒을 봉향(奉享)키 위해 청천서원(晴川書院)을 창건했다. 고종 때 대원권의 서원 훼철령에 의해 훼철된 후, 김우옹의 후손인 김호림(金頀林)이 종택의 사랑채를 고쳐 청천서당으로 중건했다. 


청천서원 전경 서원이 창건된 이후에는 회연서원(檜淵書院)과 함께 성주를 대표하는 서원으로서 사림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고, 서당으로 중건된 이후 1910년 봄에 주손인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이 교육구국운동으로서 서당을 수리해 성명학교(星明學校)라 부르고 후진의 양성을 위한 교사(校舍)로 활용하기도 했다. 


1992년에는 대가면 칠봉리 산중턱에 유림과 후손들의 힘으로 위치를 옮겨 현재의 건물로 복원됐다. 서원은 널찍한 마당에 산뜻한 나무 건물로 들어서 있고 현판글씨는 백범 김구 선생의 친필이다. 




서원정면에는 연못과 구름다리, 갖가지 모양의 바위와 꽃나무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청천서원에서 나와 고가들이 즐비한 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청천서당이 나온다. 청천서당은 일제강점기에 성명학교 교사로 사용되면서 애국계몽운동의거점이 되기도 한다. 청천서당은 현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 덕암서원


이 서원은 경산이씨(京山李氏)의 3현(賢) 삼익재(三益齋) 이천배(李天培).백천(白川) 이천봉(李天封).학가재(學稼齋) 이주를 존모(尊慕)해 현종 13년(1672)에 사림에서 덕암사(德巖祠)를 건립한 것에서 연유한다. 



1994년 4월 16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됐다.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유월리에 있다. 1672년(현종 13)에 건립했고, 이후 몇 차례 중수했다. 


1868년(고종 5)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가 1876년 덕암서당으로 중건했고, 1928년 중수했다. 지금의 서원 명칭은 1998년 정부와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묘우(廟宇), 내삼문, 동·서재 등을 건립해 ‘교남지(嶠南誌)’에 의하면 덕암사는 효종 때 건립됐다고 기록돼 있는 것으로 보아 덕암서당의 시초는 덕암사라 추정되고, 고종 때 서당으로 개칭한 것 같다.



서원에 제향된 이천배와 이천봉은 형제 사이로 함께 한강(寒岡) 정구(鄭逑)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천봉은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성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다. 


이주는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백인당을 세워 후진교육에 힘쓰는 한편 동규(洞規)·향약(鄕約)을 정비하기도 했다.



서원의 배치구성은 토석담을 두른 장방형 곽 전면에 서원을 출입하는 대문에 해당하는 솟을삼문인 건명문(建明門)이 있고, 북쪽에 강당과 그 앞으로 동.서재가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상량문은 성주목사 성종인(成種仁)이 지었다. 화강암으로 된 장대석 기단 위에 건물을 세웠고,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처마는 홑처마이며, 지붕은팔작지붕이다. 서당의 출입문격인 건명문은 솟을대문이며, 건명문에서 남동쪽에 서당이 자리한다. 지금도 뒤쪽에 사당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처음에 사(祠)로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천봉은 호가 백천(白川)으로, 정구(鄭逑:1543~1620)의 문인이고, 정묘호란때 의병을 모았고, 관직을 멀리하고 문집에 전념했다. 이주는 호가 학가재(學稼齋)로, 가장(家狀), 동규(洞規), 향약을 정비했고, 8촌형 이윤과 함께 백인당(百忍堂)을 세워 후학을 양성하였다.


# 오암서원


오암서원은 조선 중엽의 유학자인 최항경(崔恒慶)과 두 아들 최은, 최린 부자를 추모키 위해 1734년(영조 10) 사림에서 그의 고거(故居)인 오암(鰲巖)에 운암서원(雲岩書院)을 세워 제향하다가, 1741년 서원정리령으로 훼철됐철됐다. 


1781년(정조 5) 사의 공론(公論)이 다시 일어 사우와 강당을 세우고 오암서원이라 편액했으나,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다시 훼철됐다. 그 뒤 1918년에 후손들이 서원터에 서당을 세워 교육의 장으로 삼고, 1977년에 강당 등을 중수했고, 2002년에는 후손 창곤(昌坤)이 효덕사(孝德祠)를 건립하고, 2009년 열곤(烈坤) 등 후손들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오암정(鰲巖亭)를 건립하는 등 서원의 원역(院域)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사림의 공의(公議)를 얻어 삼부자(三父子)를 향사(享祀)하고 있다.



최항경(1560~1638)의 자는 덕구(德久), 호는 죽헌(竹軒), 본관은 영천(永川)으로 한(漢)의 후손이며, 정(淨)의 아들이다. 그는 경기도 고양(高陽)에서 태어났으나, 어릴 때 성주의 법산(法山)으로 이주해 한강 정구의 문인으로 학문이 드러났고, 1605년(선조 38)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향리에서 학문과 후진양성에 매진했다. 회연서원의 초대 원장(院長)을 역임하고, 제용감정(濟用監正)에 증직(贈職)됐다.


최은(1583~1656)은 항경의 장자로서 자는 사행(士行), 호는 관봉 또는 나광자(懶狂子)이다. 한강 정구의 문인으로 1633년(인조 11)에 생원이 되고 학덕(學德)이 뛰어나 장예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에 증직됐다.


최린(1597~1644)은 은의 아우로 자는 사발(士發), 호는 매와(梅窩) 혹은 치광자(癡狂子)이다. 한강 정구의 문인으로 1633년(인조 1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36년 병자호란시 남한산성이 포위되자 형과 함께 의병으로 활동했고, 이후 평생토록 청나라 연호(年號)를 쓰지 않았다. 만년에 성리학(性理學) 연구와 후진교육에 힘썼다.


건물은 국도 33호선 수륜면과 고령군 경계지점의 우측 산록 아래에 동남향해 위치하고 있고, 대지를 3단으로 조성해 좌측 상단에는 묘우인 효덕사(孝德祠)를 동향해 배치하고, 중단에는 강학공간(講學空間)인 강당을, 하단에는 재숙(齋宿)을 위한 재사(齋舍)와 오암정(鰲巖亭), 화장실로 구성됐다. 



본당인 강당은 규모가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남향해 위치하고, 구조는 중앙에 3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 1칸씩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으로 온돌방 전면에 툇마루를 둬 대청과 서로 연결했다. 


또 견치석을 높게 쌓은 기단(基壇) 위에 원형의 화강암 초석(礎石)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고, 강당의 앞쪽 좌측에 남서향한 솟을대문을 둬 출입하고 있다. 


묘우인 효덕사는 3칸의 맞배지붕집으로 정면에 내삼문(內三門)을 두고 연접해 토석담장을 둘러 구획했고, 서원 밖에 동향해 위치한 재사(齋舍)는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으로 중앙에 1칸 마루를 두고 좌우측에는 온돌방 각 1칸씩과 부엌을 뒀다. 또 재사의 우측에 위치한 오암정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사각기둥을 세웠고, 온돌방 1칸과 2칸의 마루를 뒀다.


# 안산서원(安山書院)


안산서원은 성주이씨(星州李氏) 중시조(中始祖)인 농서군공 이장경(李長庚)을 위시한 현조(顯祖) 22인을 제향(祭享)하는 서원으로, 처음에 월항면 인촌리 선석사(禪石寺)에 영정(影幀)을 봉안하는 사당(祠堂)이 있었는데, 이장경 묘소가 왕실에서 조성한 세종대왕자태실(世宗大王子胎室)의 도국(圖局)안에 있어 1444년 묘소를 옮기면서 영당(影堂)도 지금의 장소인 벽진 자산리 안산(安山) 안봉사(安峯寺)의 영당에 봉안했다.



사림의 공의(公議)에 의해 서원이 건립돼 1680년(숙종 2) 안산서원(安山書院)으로 사액(賜額)됐으나, 1871년(고종 8)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돼 안산재(安山齋)로 됐다. 그 후 후손들이 여러 차례 건물을 중건 중수해 오다가 2005년 정부의 지원을 받아 대대적으로 정비한 후 서원으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은 벽진면 자산리 옛 안산촌의 산록에 남향해 위치하고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본당과 동.서재가 일곽을 이루고, 그 우측으로 일각문과 영당(影堂)이 구분돼 일곽을 이루고 있다. 또 그 전면에는 부속건물과 관리사가 위치하고 있다. 



본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으로 중앙에 2칸 마루를 두고, 양 측면에 각 1칸 씩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 구조이고, 동.서재는 각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중앙에 마루를 양 측면에 온돌방을 뒀다. 영당은 서원 동쪽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모두 통마루로 돼있다. 


서원에 제향(祭享)된 인물은 李長庚, 李百年, 李千年, 李萬年, 李億年, 李兆年, 李麟起, 李承慶, 李褒, 李元具, 李仁復, 李仁任, 李仁敏, 李崇仁, 李稷, 李濟, 李師厚, 李智活, 李恒, 李晁, 李稶, 李光迪.


# 도천서원(道川書院)



도천서원은 조선 영조 원년(元年) 유림이 발의해 처음 가천면 창천리 사뢰촌(思瀨村)의 동쪽 기슭에 건립하고 등암(藤庵) 배상룡(裵尙龍)을 제향(祭享)했으나, 나라의 서원정리령에 의해 훼철됐다. 그 후 정조 10년 병오년(丙午, 1786)에 나라의 금령(禁令)이 풀려 정조 15년 신해년(辛亥, 1791)에 대가면 도남리(지금 道南齋의 북쪽)에 중건하고 등암 배상룡과 아우 괴재(愧齋) 배상호(裵尙虎)를 배향했으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다시 훼철된 후 복원하지 못하고 영당(影堂)만 보존되고 있었으며, 후에 후손들이 서원터 남쪽에 도남재(道南齋)를 건립했다. 현판(懸板)이 현재 안동 국학진흥원에 보관돼 있다.



배상룡(1574-1655)의 자는 자장(子章), 호는 등암(藤庵), 본관은 성산(星山)으로 사재감정(司宰監正) 덕문(德文)의 손자이고, 경상우수사 설(楔)의 아들이다. 그는 정구와 장현광의 문인으로 학문과 행의가 드러났다. 특히 효성이 지극해 사림이 추중(推重)했다. 



스승인 한강과 여헌의 별세 때는 제자로 심상(心喪) 3년하고, 서원건립과 문집발행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여러 차례 그의 공거문(公車文;應試, 應製, 疏章 등의 시문)이 뽑혔으나 아버지가 비명으로 하세(下世)하자 과거에 응하지 않고 은거하여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에만 힘썼다. 1637년(인조 15) 천거로 선교랑(宣敎郞)이 내려졌으나 받지 않았고, 1774년(영조 50年) 통훈대부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증직됐다.



배상호(1594-1632)의 자는 계장(季章), 호는 괴재(愧齋)로 상룡(尙龍)의 아우이다. 형과 함께 정구와 장현광의 문인으로 1624년(인조 2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해 태학(太學)의 강청(講廳)에서 임금의 후의를 받았고, 학문과 덕망이 뛰어나 성균관(成均館)에서 장의(掌議)를 지내는 등 유소(儒所)의 여러 임직(任職)을 역임했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관(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에 증직됐다./사진출처-문화재청, 성주군청


# 암포서원 



본래 선조를 제사하기 위한 사당과 교육을 겸한 서당으로 출발했으나, 1569년 (선조 2) 국학의 제도에 따라 선현을 제사하고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건물의 중건과 함께 그 명칭을 서원으로 변경했다. 



1871년(고종 8) 음력 3월 20일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전국에 사액서원 47개소만 남기고 통폐합할 때 훼철됐다. 1960년 5월 29일 정면4칸 측면2칸의 한옥으로 복원했고, 복원된 건물이 퇴락해 사당 1동은 문화재적 가치보존을 위해 존치키로 하고, 그 외 건물은 경내에 이전 중건했고, 2007년 5월 13일 성주향교 유림 및 각 문중대표 주관으로 낙성고유식을 거행했다. 


건물의 공간적인 구성은 풍수지리학적 지형지세에 따라 서원의 우측으로 사당을 배치했고, 서원(書院).사당(祠堂).단목(壇木).단정(壇井) 등이 있다.


# 삼봉서원 



삼봉서당은 조선후기 대표적인 유학자의 한 사람인 한주 이진상을 기리기 위해 지역의 문인과 유림이 1897년 건립한 서당이다. 1977년 증건했고, 1986년 증축이 이뤄 졌다. 서당은 삼봉산의 산기슭에 동향해 강당과 사당, 동,서재, 고직사, 장판각 6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상단에는 정면 5칸의 강당과 정면 3칸의 사당이 있고, 강당을 중심으로 1단 낮은 전면 좌우에 정면 3칸 규모의 성존실과 경거재가 있다. 또한 성존실의 뒤쪽에는 고직사가, 강당의 오른쪽에는 장판각이 위치하고 있다. 


한주 이진상은 본관이 성산, 자는 여뢰, 호는 한주이며, 한고 이원호의 아들이자 공조판서를 지낸 응와 이원조의 조카이다. 그는 유학 경서와 사서에 밝고, 문장, 제도로부터 산수, 의약, 복서 등에 이르는 모든 분야에 능통했고, 모두 85책의 저서를 남겼다. 


특히 그의 학문은 이승희, 곽종서, 허유, 이정모, 윤주하, 장석영, 이두훈, 김진호 등 주문팔현으로 알려진 문인이 중심이 돼 형성된 한주학파에 의해 계승 발전됐다./사진출처-문화재청, 한국관광공사, 성주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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