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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65] 인적이 드문 고령 김면 장군 유적지 ‘도암서원(道巖書院)’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08-25 12:3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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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도암서원은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에 있었던 조선후기 김면과 이기춘을 추모키 위해 창건했다. 


1666년(현종 7)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면(金沔)과 이기춘(李起春)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키 위해 월등리에 창건해 위패를 모셨다. 1670년에 칠등리로 이건했고,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됐다. 



훼철되기 전의 경내 건물로는 묘우(廟宇).신문(神門).강당.동재(東齋).서재(西齋).주소(廚所) 등이 있었다. 1903년 도암서당(道巖書堂)이 건립되고, 1975년 도암재(道巖齋)를 건립해 문중의 재실로 사용하다가 2002년 3월 27일에 도암서원을 복원해 매년 음력 3월 초10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김면은 경상북도 고령 출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지해(志海), 호는 송암(松庵). 아버지는 경원부사 김세문(金世文)이고, 어머니는 김해 김씨로 판관 김중손(金仲孫)의 딸이다. 조식(曺植)과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명종 때 효도와 청렴으로 천거돼 참봉에 임명됐으나 사퇴했다. 선조 즉위 초년 유현(儒賢)을 뽑아 육품직에 승진시켰는데, 조목(趙穆).성혼(成渾).정구(鄭逑) 등과 함께 유일(遺逸)로 천거돼 공조좌랑에 임명됐지만 역시 사퇴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에 조종도(趙宗道).곽준(郭䞭).문위(文緯) 등과 함께 거창과 고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금산과 개령 사이에 주둔한 적병 10만과 우지(牛旨)에서 대치하다가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지례(知禮)에서 적의 선봉을 역습해 크게 승리를 거뒀고, 이 공으로 합천군수에 제수됐다. 




그 뒤 무계(茂溪)에서도 승리를 거둬 9월에는 첨지사(僉知事)에 임명되고, 11월에는 의병대장의 교서를 받았다. 당시 호남관찰사에게 군사와 군량을 요청했으나 회답이 없자 스스로 무기를 수선하고 병사를 격려해 전투에 임했고, 호남과 영남의 의병장들과 함께 4도로 진병하고자 했으나 그 약속이 이행되지 못하자 혼자 군사를 이끌고 고령.지례.금산.의령 등을 수복했다. 


왕이 그 공적을 장하게 여겨 이 군사들에게 근왕(勤王)할 것을 명했으나, 백성들이 통곡하면서 보호를 청하고 관찰사 김성일(金誠一)이 장계를 올리니 본도에 머물러 수호하라는 교서가 내려졌다.




1593년 1월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돼 충청도.전라도 의병과 함께 금산에 주둔하면서 선산(善山)의 적을 격퇴시킬 준비를 갖추던 도중, 갑자기 병에 걸리자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여러 장수가 그의 유명(遺命)을 받들어 신창(新倉)까지 돌아온 뒤에야 그의 죽음을 알리니, 군사들이 통곡하고 백성들이 매우 애통해했다. 



관찰사 김성일이 장계를 올려 보고하니, 왕이 애도하면서 예관을 보내 치제(致祭)하게 하고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兵曹判書 兼 知義禁府事)를 명했다. 강직한 절의를 지니고 있었고, 문장보다 성현의 본지(本旨)를 마음에 새기어 실천에 힘썼고, 특히 이정(二程: 정호(程顥)와 정이(程頤))의 글을 좋아하고 본받으려 했다. 


저서로는 ‘송암실기(松庵實紀)’가 있다. 상훈과 추모고령의 도암사(道巖祠)에 제향됐고, 1607년 선무원종공(宣武原從功)에 기록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됐다.

1988년 9월 23일 김면장군유적(金沔將軍遺蹟)으로 김면장군의 묘소, 신도비(神道碑), 도암사(道巖祠), 도암재(道巖齋), 도암서당(道巖書堂)을 일괄해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됐다./사진-고령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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