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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17] 기도와 수행, 복지와 문화공동체 대한불교조계종 제 24교구 본사 '선운사'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09-18 15:54:56
  • 수정 2024-04-02 03: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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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 일주문, 산문을 지나 길을 따라가면 일주문이 나온다. 일주문(一柱門)은 사찰이 시작되는 것을 알리는 알림의 문으로 부처님을 향한 진리는 하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자료사진[박광준 기자] 선운사는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도솔산(兜率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이다.


도솔산은 선운산(禪雲山)이라고도 하고, 조선 후기 선운사가 번창할 무렵에는 89개의 암자와 189개에 이르는 요사(寮舍)가 산중 곳곳에 흩어져 있어 장엄한 불국토를 이루기도 했다.


도솔산 북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선운사는 김제의 금산사(金山寺)와 함께 전라북도의 2대 본사로서 오랜 역사와 빼어난 자연경관, 소중한 불교문화재들을 지니고 있어 사시사철 참배와 관광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특히 눈 내리는 한겨울에 붉은 꽃송이를 피워내는 선운사 동백꽃의 고아한 자태는 시인.묵객들의 예찬과 함께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선운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신라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고승 검단(檢旦, 黔丹)선사가 창건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첫 번째 설은 신라의 진흥왕(재위기간 540∼576)이 만년에 왕위를 내주고 도솔산의 어느 굴에서 하룻밤을 묵게 됐다. 이때 미륵 삼존불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꿈을 꾸고 크게 감응해 중애사(重愛寺)를 창건함으로써 이 절의 시초를 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곳은 신라와 세력다툼이 치열했던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에 신라의 왕이 이곳에 사찰을 창건했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시대적.지리적 상황으로 볼 때 검단선사의 창건설이 정설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검단스님의 창건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본래 선운사의 자리는 용이 살던 큰 못이었는데 검단스님이 이 용을 몰아내고 돌을 던져 연못을 메워나가던 무렵, 마을에 눈병이 심하게 돌았다. 그런데 못에 숯을 한 가마씩 갖다 부으면 눈병이 씻은 듯이 낫곤 해, 이를 신이하게 여긴 마을사람들이 너도나도 숯과 돌을 가져옴으로써 큰 못은 금방 메워지게 됐다. 이 자리에 절을 세우니 바로 선운사의 창건이다. 검단스님은 "오묘한 지혜의 경계인 구름[雲]에 머무르면서 갈고 닦아 선정[禪]의 경지를 얻는다"해 절 이름을 '禪雲'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또한 이 지역에는 전쟁 난민이 많았는데, 검단스님이 불법(佛法)으로 이들을 선량하게 교화시켜 소금을 구워서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가르쳐주었다. 마을사람들은 스님의 은덕에 보답키 위해 해마다 봄.가을이면 절에 소금을 갖다 바치면서 이를 '보은염(報恩鹽)'이라 불렀고, 자신들이 사는 마을이름도 '검단리'라 했다. 선운사가 위치한 곳이 해안과 그리 멀지 않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염전을 일구었던 사실 등으로 미루어보아, 염전을 일구어 인근의 재력이 확보됐던 배경 등으로 미뤄 검단스님이 사찰을 창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 대웅보전


대웅전/사진출처-문화재청 

선운사의 본전(本殿)으로서 신라 진흥왕 때 세운 것으로 전하고,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 성종 3년(1472)에 중건해 임진왜란 때 전소됐다가 광해군 5년(1613)에 다시 지은 것이다. 건물의 평면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긴 장방형 평면을 이루고 있고, 전체적으로 기둥 옆면 사이의 간격이 넓고 건물의 앞뒤 너비는 좁아 옆으로 길면서도 안정된 외형을 지니고 있다. 


현재 공사중인 대웅전다포계(多包系) 맞배지붕에, 벽의 양 측면에는 풍우를 막기 위해 널판으로 풍판(風板)을 대었다. 막돌로 허튼 쌓기를 한 얕은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을 세웠다. 정면의 모든 칸에는 빗살 창호를 달았으나 후면에는 중앙 칸에만 창호를 달고 양 측면의 협칸에는 교창(交窓)을 달았다. 동쪽 면은 모두 벽체로 처리하고 서쪽 면에는 외짝 출입문을 달았다. 내부는 통칸으로서 불벽(佛壁)을 한 줄로 세워 그 앞에 불단을 만들었고, 불단 위에는 흙으로 빚은 소조(塑造) 삼세불을 봉안하고 삼존 사이에는 근래에 조성된 보살입상을 협시로 세웠다.


고창 선운사 대웅전_내부 불상/사진출처-문화재청 

삼존은 중앙의 비로자나불을 주존(主尊)으로 해, 왼쪽에 아미타불과 오른쪽에 약사불을 모셨다. 삼존불상 뒤의 후불벽화는 1688년(숙종 14)에 조성한 것으로, 중앙의 비로자나불회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회상도.약사회상도가 각각 자리 잡고 있다. 천장에는 사실감이 돋보이는 커다란 운룡문(雲龍紋)이 그려져 있고, 안쪽 천장에는 우물 정(井)자 모양을 한 우물천장을 설치해 구름.학.연꽃 등으로 장엄했다. 내부 벽에는 산수.비천.나한 등을 벽화로 장식했고, 닫집과 중앙의 불단 등은 비교적 간략하고 단순한 모습이다. 이 건물은 미술사적으로 조선 후기의 뛰어난 건축기술과 조형미를 지니고 있다.


# 팔상전



팔상전(八相殿)은 석가모니의 행적 가운데 극적인 여덟 장면을 그림으로 나타낸 팔상 탱화(幀畵)를 봉안하는 곳으로, 이 곳에도 1706년의 중건 때 함께 봉안한 팔상 탱화가 있었으나 현존하지 않고, 현재는 1900년에 새로 조성된 팔상 탱화 중 2점이 남아 있다. 석가 여래 좌상도 근래에 새로 조성한 것이며, 본존 뒤의 후불 벽화 역시 1901년에 조성된 것이다.


# 산신각



산신각(山神閣)은 영산전 뒤쪽, 팔상전(八相殿) 옆에 위치하고,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 지붕 건물로, 1614년에 조성된 이후 여러 번의 중수가 있었다. 산신각은 불교가 도입되기 이전부터 전해 오던 토착 신앙이 불교가 도입되면서 서로 융합되어 새롭게 산신 신앙으로 등장한 것으로 우리 나라에만 나타나는 신앙 형태이다.


# 영산전



영산전(靈山殿)은 대웅보전의 서쪽에 위치하고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 지붕 건물로, 2단의 높은 축대 위에 조성된 영산전의 원래 이름은 장육전(丈六殿)이었다. 1471년 처음 조성될 때는 2층 전각 형태로 조성되었으나 1614년에 중건하면서 단층으로 바뀌었고 1821년과 1839년에 다시 중수했다. 장육전이라 이름은 내부에 봉안된 불상이 1장 6척이나 되는 큰 불상이었기 때문이고, 거대한 불상을 봉안키 위해서 2층의 누각 건물로 조성했던 것이다.


# 관음전



관음전(觀音殿)은 대웅보전의 뒷편 동쪽에 위치하는 정면, 측면 각 3칸의 맞배 지붕 건물로, 최근에 조성한 천수천안관세음보살상과 천수천안관세음 탱화, 그리고 오른쪽 벽에는 1991년에 조성한 신중 탱화가 있다. 전에 모셨던 보물279호 지장보살상은 지장보궁에 봉안되어 있다.


# 명부전



명부전(冥府殿)은 저승의 유명계(幽冥界)를 나타낸 전각으로, 원래는 지장보살을 봉안한 지장전과 시왕(十王)을 봉안한 시왕전이 별도로 있었던 것을 17세기 이후에 두 전각을 결합했다.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공포는 초익공 형식을 사용했는데 연봉이 달린 쇠서나 봉황두 형태의 초각 등에서 조선후기의 장식적 경향이 나타난다. 전면의 중앙 3칸에는 분합문을 설치했고, 양쪽 협칸은 상단에 띠살 형태의 창, 하단에 판장문 형태로 마감했다.


# 만세루



정면 9칸 측면 2칸 규모의 강당건물로서, 고려시대에 지어진 건물이지만 19세기 말에 중건된 익공계(翼工系) 구조의 맞배지붕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절의 창건 당시부터 건립돼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고, 현재도 700년이 된 두 개의 아름드리 기둥이 남아 있어 옛 자취를 느끼게 한다. 넓은 평면에 비해 높이가 낮고 비규격적인 누(樓) 형식으로 돼 있고, 정면의 중앙칸(御間)은 폭이 390cm로서 양쪽 협간(夾間)에 비해 2배 정도 넓다. 자연석 기단에 기둥은 일부 배흘림이 있는 기둥을 사용했고, 자연목을 다듬지 않은 채 껍질만 벗겨 쓰기도 했다. 중앙 칸의 양쪽을 제외하고는 모두 판벽으로 처리했고, 내부의 서쪽 앞 두 칸씩은 칸막이로서 2층 구조를 만들어 종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대들보 위에는 낮은 동자주를 얹었고 기둥 윗부분에는 작은 나무토막들을 포개 쌓았다. 특히 뒷면이 대웅전과 마주보면서 개방된 것은 설법을 위한 강당의 기능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전면의 판창(板窓)을 열면 대웅전의 앞마당에서부터 강당을 포함한 공간이 막힘없이 트이게 되어 통풍과 전망을 아울러 배려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바닥은 우물마루로 했다.


# 천왕문



천왕문(天王門)은 앞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 지붕 건물이다. 2층 누각 건물이었는데 현재는 1층으로 됐고, 4천왕상이 있다. 선운사 사천왕상 발 밑에는 일반적인 악귀와는 달리 남방증장천왕 아래에는 음녀가 있고, 서방 광목천왕 발밑에는 탐관오리가 있어 한국적인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 도솔암


선운사 육층석탑/사진출처-문화재청 도솔암(兜率庵)은 선운사를 나와 등산로를 따라 난 산길을 약 2㎞ 올라가면 깎아지른 절벽이 건너다 보이는 절경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정확한 창건 연대를 알 수 없지만 선운사의 연혁을 전하는 여러 기록에 따르면 선운사와 함께 창건됐다고 한다. 조선 후기까지 도솔암은 상도솔암(上兜率庵), 하도솔암(下兜率庵), 북도솔암(北兜率庵)의 세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상도솔암은 지금의 도솔천 내원궁을 말하고, 하도솔암은 마애불이 있는 곳, 북도솔암은 지금의 대웅전이 있는 자리를 일컫는다. 이처럼 각각의 독립적인 암자였던 것이 근세에 와서 도솔암 하나로 통합됐다. 


# 참당암


참담암 대웅전/사진-문화재청 선운사 산내암자 참당암의 중심건물로서 신라시대 의운화상(義雲和尙)이 창건하였다는 기록이 전하며, 그 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현존하는 건물은 조선시대의 것이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매 칸마다 4분합문을 달았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돼 있고, 지붕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해 짠 다포양식의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다. 


고창 선운사 참당암 대웅전_내부 불상/사진-문화재청 앞면에 짜인 공포는 전형적인 18세기 다포양식인 반면 뒷면 공포는 굽면이 곡선이다. 석가여래를 본존으로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이 협시한 삼존불을 봉안하고 있고, 1900년에 후불탱화로서 영산회상도를 조성했다. 이 건물은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음에도 여전히 고려시대 건축 부재(部材)의 양식을 지니고 있어 이채로우며, 조선 후기의 빼어난 건축미를 지니고 있다.


# 육층석탑/전북유형문화재 제 29호


선운사 대웅전 앞마당에 자리하고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화강암으로 만들었고, 방형의 축대 안에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정사각형의 돌 윗변을 둥글게 처리한 하대석을 얹었다. 그 위에 다시 방형의 중석(中石)을 세우고 중석의 네 귀는 우주(隅柱)로 조각했다.갑석(甲石)은 방형으로 돼 있다. 아랫면은 수평으로 다듬고 중앙에는 1단의 받침을 새겼고  윗면은 약간의 경사를 이룬 채 중앙에 1단의 옥신(屋身) 괴임이 있다. 각 층의 옥신은 하나의 돌로 만들고 네 귀마다 우주를 조각했고, 추녀는 수평을 유지한 채 하늘을 향해 약간 반전되어 있고 낙수면의 경사는 완만한 편이다.


선운사 육층석탑/사진출처-문화재청 전체적으로 탑신의 2층 옥신 높이가 급격히 줄어들고 3층 옥개석 역시 2층에 비해 폭이 좁아져 체감률이 심한 편이고, 3층 이상부터는 동일한 체감률로 이뤄져 있다. 6층의 옥개석 위에 노반이 있고 노반 위에 복발(覆鉢)이 남아 있고, 그 위에 팔각의 귀꽃으로 각출된 보개(寶蓋)를 얹어 놓았다. 사적기에는 조선 성종 때 행호선사(幸浩禪師)가 홀로 우뚝 솟은 이 9층 석탑을 보고 사찰의 중창을 도모하였다고 적고 있어, 현재의 탑은 성종 이후 3층이 유실된 것으로 추측된다.


# 범종/전북유형문화재 제 31호


선운사 천왕문 2층에 걸려 있는 조선 후기의 범종이다. 종신(鍾身)의 높이는 103㎝, 구경(口徑) 93㎝, 견경(肩徑) 56㎝이며,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를 포함한 전체의 총 높이는 129㎝이다. 이 범종은 한국 범종의 특징인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용통이 없는 대신 윗면에 1개의 구멍을 뚫었고, 용뉴는 2마리 용으로 만들었다. 어깨부분에는 2줄의 선을 둘렀는데 선 안쪽으로 명문(銘文)을 새겼다. 몸체 중앙에는 3개의 돌출된 선을 둘러 위와 아래로 구분해 놓았고, 윗부분에는 연화당초문대(蓮花唐草紋帶)로 사각형 유곽대를 만들었고, 그 안에 가운데가 돌출된 모양의 유두를 9개씩 뒀다.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서 있는 보살을 양각하고, 머리 위로 8개의 작은 원을 만들어 원 안에 범자(梵字)를 하나씩 새겨 넣었다.


선운사 범종/사진출처-문화재청 용추는 머리부분이 외방을 향한 쌍두용(雙頭龍)을 투각했고, 복잡한 세부처리는 주조한 다음 동편(銅片)을 잘라 부착시키는 수법을 사용했다. 이 범종에는 음각된 '茂長縣禪雲寺大鍾重六百五十斤 嘉慶二十三年戊寅九月日 改鑄 都片手 嶺南 權東三 副 李命還…'이라는 명문이 있다. 이를 살펴보면 순조 18년(1818)에 도편수 권동삼과 부편수 이명환에 의해 개주(改鑄)됐고, 이때 선운사 주지인 처영(處英)스님이 도감으로서 주조를 감독했음을 알 수 있다.


# 고창 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高敞 禪雲寺 東佛庵址 磨崖如來坐像)


고창 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출처 : 문화재청 선운사 도솔암으로 오르는 길 옆 절벽에 새겨진 마애여래좌상으로, 머리 주위를 깊이 파고 머리 부분에서 아래로 내려가면서 점차 두껍게 새기고 있다.


평판적이고 네모진 얼굴은 다소 딱딱하지만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가느다란 눈과 우뚝 솟은 코, 일자로 도드라지게 나타낸 입술 등으로 얼굴 전체에 파격적인 미소를 띠고 있다. 목에는 3개의 가느다란 주름이 있기는 하지만 상체와 머리가 거의 맞붙어서, 상체 위에 머리를 올려 놓은 것처럼 보인다. 상체는 사각형인데 가슴이 넓고 평판적이어서 양감없는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고창 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옷주름은 선을 이용해 형식적으로 표현했고, 평판적인 가슴 아래로는 치마의 띠매듭이 선명하게 가로질러 새겨져 있다. 무릎 위에 나란히 놓은 두 손은 체구에 비해서 유난히 큼직하고 투박해 사실성이 떨어지는데 이는 월출산에 있는 마애여래좌상과 비슷한 고려 특유의 마애불 양식이다. 층단을 이뤄 비교적 높게 돼 있는 대좌는 상대에 옷자락이 늘어져 덮여 있고, 하대에는 아래를 향하고 있는 연꽃무늬를 표현다.


이 불상은 고려 초기의 거대한 마애불 계통 불상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다. 특히 가슴의 복장에서 동학농민전쟁 때의 비밀기록을 발견한 사실로 인해 더욱 주목받고 있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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