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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19] 선교율, 차(茶)와 범패의 근본도량 ‘쌍계총림 쌍계사’(2)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09-20 23:23:06
  • 수정 2024-04-02 03: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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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사 일주문

금강문지난호에 이어 


[박광준 기자] ‘삼신산 쌍계사’라는 현액이 걸려 있는 화려한 다포집인 일주문을 지나면 곧바로 문수.보현 동자(문수동자는 사자를 타고 보현동자는 코끼리를 탔다)를 모신 맞배집 금강문이 나온다. 여기서 조금 더 들어가면 역시 맞배집인 천왕문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누문인 팔영루(八詠樓)와 마주치게 되고, 팔영루를 통과하면 대웅전에 들어서게 된다. 이들 건물은 모두 일직선상에 가깝게 놓여 있으나, 산비탈을 이용한 낮은 층단이 계속되고, 또한 중간중간에 다른 건물들이 비대칭적으로 들어서 있다.



팔영루 앞에 서 있는 쌍계사 구층석탑은 1990년에 세운 새 탑으로, 스리랑카에서 가져온 석가 진신사리 등을 봉안하고 있는데,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을 닮았다.


팔영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2층 누마루이다. 진감선사 혜소(眞鑑國師 慧昭, 774~850)가 중국에서 불교음악을 공부하고 돌아와 쌍계사 팔영루에서 우리 민족의 정서에 어울리는 범패(梵唄)1)를 만들어냈다. 팔영루라는 이름도 진감선사가 섬진강에서 뛰노는 물고기를 보고 팔음률로서 범패를 작곡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이뤄진 2층 누각으로, 아래층은 기둥만 세워져 트여 있고 2층은 누마루로 돼 있다.


팔영루의 왼쪽에 경내의 주축을 이루는 일주문.팔영루.대웅전 영역에서 비껴나 부축을 이루는 일련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경내 주축과 계곡을 사이에 두고 청학루로 열리는 금당 영역이 그것이다. 육조정상탑(六祖頂相塔)을 모신 탑전인 금당, 팔상전 등이 여기에 있고, 쌍계사가 처음 문 열었을 때의 터로 추정된다. 일직선상이 아니라 높이를 달리해 서로 맞물리게 배치된 건물들이 상승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쌍계사 내에는 대웅전(보물 제500호), 진감선사 부도비(국보 제47호), 쌍계사 부도(보물 제380호), 적묵당(경남 문화재자료 제46호), 팔상전 영산회상도(보물 제925호) 같은 지정 문화재를 비롯해 명부전 앞의 마애불, 대웅전 앞의 석등, 각 전각의 탱화 등 많은 문화재가 있다. 특히 현판과 주련 들이 눈길을 끈다.


일주문의 현판 ‘삼신산 쌍계사’ ‘선종 대가람’이라는 글씨는 해강 김규진(海崗 金圭鎭, 1868~1933)의 것이고, 팔영루의 현액은 누구의 글씨인지 알 수 없다. ‘대웅전’ ‘천왕문’ ‘명부전’ ‘적문당’ 등의 글씨도 모두 눈여겨볼 만하다.


명부전

글씨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것은 진성여왕 1년(887) 최치원이 글을 짓고 쓴 진감선사 부도비이다. 대웅전 앞에 정면이 아닌 측면으로 서 있는 모양새가 일직선축의 단조로움에 변화를 준다. 부도비는 문장으로 보거나 서체로 볼 때에도 매우 우수해 국보로 지정돼 있다. 마멸이 심해 육안으로 식별하기는 힘들지만, 다행히도 영조 때 만들어놓은 목판이 전해지고 있어 내용을 알 수 있다.


진감선사 부도비대웅전 오른쪽의 명부전 앞 큰 바위에는 마애불이 있다. 바위의 한 면을 사각으로 움푹 파내고 그 안에 여래형의 조상을 두껍게 양각해 감실 안에 불상을 앉힌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불상은 육계와 함께 머리가 큰 편이고, 법의도 두툼하고, 옷주름은 무릎 앞부분말고는 뚜렷하지가 않다. 두 손은 소맷부리에 넣고 단전 앞에 끌어 모아 뭔가를 받드는 듯하고, 스님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소박한 인상을 가졌다. 감실 위에 한자로 ‘나무아미타불’이라 쓰여 있다. 높이는 1.35m 정도이며,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하동 쌍계사 마애여래좌상 마치 감실 안에 부처님을 모신 것처럼 바위 한면을 움푹 들어가게 파고 그 안에 부처님을 두툼하게 조각했다.


쌍계사 소속 암자로는 국사암.칠불암.불일암 등이 있다. 쌍계사에서 불일폭포로 가는 길에 오른쪽의 야트막한 언덕을 넘으면 국사암이 나선다. 국사암은 삼법스님이 머물렀던 곳이고, 진감선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가 살아 나무가 됐다는 천년 넘은 느릅나무가 있다. 


칠불암은 가락국의 일곱 왕자가 성불했다는 고찰로, 한 번 불을 때면 한 달 반 동안이나 따뜻했다고 하는 구들이 있는 아자방터가 있다. 불일암 가는 동안에는 지리산의 유일한 거폭으로 사철 마르지 않는다는 불일폭포가 있다. 보조국사의 시호를 딴 불일암은 신라의 원효,의상이 도를 닦고 고려 때 보조국사가 머물렀다.


한편, 쌍계사는 차와 인연이 깊은 곳으로, 매표소 가까이 계류가에 1981년에 세운 ‘차시배추원비’(茶始培追遠碑)가 있고, 화개에서 쌍계사로 이어지는 벚꽃길에도 ‘차시배지’(茶始培地) 기념비가 있다.


차시배지 기념비

김대렴이 처음 차를 전한 뒤 진감선사가 차밭을 크게 조성해 널리 번식시킨 것을 기념키 위해 세운 비이다. 비 뒤로는 차밭이 펼쳐져 있다.


차는 신라 선덕여왕 때 당나라에서 처음 들어왔고, 흥덕왕 3년(828) 김대렴(金大簾)이 당나라에서 차나무 씨를 가져와 왕명으로 지리산 줄기에 처음 심었다고 한다. 김대렴이 차를 심은 이후 진감선사가 쌍계사와 화개 부근에 차밭을 조성.보급했다고 한다. 


팔영루 옆의 계단을 밟고 올라서면 앞마당에 이르게 된다. 앞마당 또한 산비탈을 이용한 계단식으로 조성돼 대웅전에 이르는 길은 사뭇 장엄하고 신성하다.



그리 크지 않은 건물이지만 경내의 제일 깊고 높은 자리에 지어져 웅장함과 위엄을 느끼게 한다. 막돌로 쌓은 높은 석축 위에 올라선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크지 않은 다포계 팔작집이다. 기둥은 배흘림 없이 높게 세워지고 활주를 두고 있고, 평방 위에 배치한 공간포는 중앙의 3칸은 2개씩, 좌우 협칸은 1개씩이다. 건물 내부는 우물마루, 우물천장, 불단 위에 닫집을 만들고 그 밑에 용과 연화를 늘어뜨리는 등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건물 중앙 3칸은 양 끝 칸보다 좀 넓고, 중앙 3칸에는 각각 사분합의 빗살문과 그 위에 교창을 달았고, 양 끝 칸에는 변화를 주어 양 끝 협칸에는 2분합문으로 井자 살문을 달았다.


대웅전 영역에서 한 가지 더 눈여겨볼 만한 것은 담장이다. 대웅전 서쪽의 나한전 끝부분부터 그 아래 터에 건축된 효성각을 두르는 담장인데, 대웅전 쪽과 나한전 사이에는 나한전 쪽으로 절반만 담을 쌓아 왕래와 시선 차단이라는 이중 효과를 얻고 있다.


효성각 꽃담장

대웅전 왼쪽 효성각을 둘러싼 담장. 기와 조각으로 꽃잎을 만들고 도자기 조각으로 꽃심을 박아 질박하면서도 화려한 꽃담장을 만들었다. 효성각을 둘러싼 담장은 막돌과 흙을 섞어가면서쌓았다. 중간중간 암기와조각으로 꽃잎을 만들고 도자기의 동그란 굽다리로 꽃심을 박았고 조각난 기와로 ‘水’ 또는 ‘木’ 같은 글씨를 만들어 박은 모습이 퍽 애교스럽다.


신라 말의 명승 진감선사는 전주 금마(지금의 익산) 사람으로 속성이 최씨이다. 어머니 고씨가 “제가 어머니의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한 뒤 사라진 스님 꿈을 꾼 뒤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태어나면서 울지도 않았다는데 사람들은 ‘일찍부터 소리 없고 말없는 깊은 도의 싹을 타고났다’고들 했다.


20세에 이르기까지 부모를 오랫동안 봉양할 뜻이 간절했으나, 상을 당하자 “길러준 부모 은혜는 힘으로 갚았으나 오묘한 도리는 어찌 마음으로 구하지 아니하랴. 박과 오이가 덩굴에 매인 것처럼 내 어찌 젊은 나이에 한 구석에 박혀 있으리오”하고는 애장왕 5년(804)에 세공사(歲貢使)의 배에 의탁해 당나라로 가 신감대사(神鑑大師)를 만나 계를 받았다.


흥덕왕 5년(830)에 귀국해 지리산 화개에 이르러 일찍이 삼법화상이 일궜던 옥천사를 중창해 대가람을 이뤘고, 문성왕 12년(850) 77세를 일기로 입적하기까지 쌍계사에 머물렀다.


그가 입적한 뒤 진성여왕 1년(887)에는 부도비, 곧 대공탑비(大空塔碑, 국보 제47호)가 세워졌는데, 현재 귀부.이수.비신이 완전히 남아 있고, 전체 높이가 3.63m에 달한다.


귀부.이수.비신이 완전히 남아 있는 부도비로 최치원의 사산비명 중의 하나로 유명하다. 신라 말기에 나타나는 부도비의 양식에 따라 귀부의 머리는 용머리로 만들어졌으나, 생김이 부자연스럽고 목도 짧다. 등에는 큼직한 육각 귀갑문을 둘렀고, 네 발은 작은 편이다. 등 중앙에 있는 비신받침은 높지 않고 측면에 구름무늬가 조각됐고 윗면에는 비신을 받치는 굄이 조각됐다. 비석은 검은 대리석이다.


진감선사 부도비이수는 산(山) 모양으로 운룡문이 힘차게 조각돼 있고, 앞면 가운데에 제액이 있어 ‘해동고진감선사비’(海東故眞鑑禪師碑)라는 전서체 글씨가 쓰여 있다. 이수 꼭대기는 앙화 위에 보주를 얹어 마무리했다.


비문은 고운 최치원이 글을 짓고 쓴 것으로 우리나라 4대 금석문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고,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2) 가운데 하나이다. 모두 2,417자의 해서체 글씨가 2㎝ 정도의 크기로 한자 한자 짜임새 있게 새겨져 있다. 


최치원이 직접 짓고 해서체로 쓴 글씨로 글자가 매우 짜임새 있게 새겨져 있다. 현재 비신의 손상이 커서 보조 철틀로 겨우 모양이 유지되고 있고, 글씨의 마멸도 심해 육안으로 내용을 알 수 없을 지경이나, 다행히 영조 1년(1725)에 전문을 목판에 옮겨 새긴 것이 보존돼 있다.


진감선사의 일대기와 업적 등이 적혀 있다. 다음은 비문 가운데 쌍계사를 중창하는 대목이다.


“드디어 기이한 지경을 두루 선택하여 남령(南嶺)의 산기슭을 얻으니 높고 시원함이 제일이었다. 사찰을 창건하는 데 뒤로는 노을 진 언덕을 의지하고 앞으로는 구름이 이는 시내를 굽어보니 안계(眼界)를 맑게 하는 것은 강 건너 먼 산이요, 귀를 서늘하게 하는 것은 돌 구멍에서 솟는 여울이다. 더욱이 봄에 피는 시내의 꽃과 여름에 그늘지는 길 옆의 솔이며 구렁을 비추는 가을의 달과 봉우리를 덮는 겨울의 눈들이 사시 변하고 만상(萬像)이 빛을 번갈으며 백 가지 울림 소리가 어울려 읊조리고, 수천 개의 바위들이 다투어 빼어났다. 일찍이 서토(西土, 중국을 일컬음)에 놀던 자가 와서는 모두 보고 깜짝 놀라 이르기를 ‘혜원(惠遠)의 동림사(東林寺, 경치가 뛰어났던 중국의 절)를 바다 건너 옮겨왔구나. 연화세계는 범인의 상상으로 비겨 볼 바 아니로되 항아리 속에 별천지가 있다더니(한나라 비장방[費長房]이라는 사람이 신선을 따라 항아리 속에 들어갔더니 그 속에 금옥누각의 별천지가 있었다는 고사에서 인용) 정말인가 한다’ 했다. 대(竹)로 홈을 만들어 시냇물을 끌어다가 축대에 돌아가며 사방으로 물을 대고 비로소 이름하여 옥천(玉泉)이라고 현판을 붙였다.”


금당영역의 옆으로 난 계단을 따라 350m쯤 올라간 산등성이에 있다. 부도는 기단부 위에 탑신부.상륜부를 차례로 올려놓은 팔각원당형의 통일신라 시대 작품으로 높이 2.05m이고, 보물 제380호로 지정돼 있다.


쌍계사 부도 진감선사의 부도라고도 추정하나 아직까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기단부는 상대석과 하대석이 앙련과 복련으로 이뤄진 장구형이다. 


기단부 위에 탑신부를 놓기 전에 몸돌을 받치기 위한 팔각 굄돌을 놓았다. 구름무늬를 굵게 조각해 빈틈없이 가득 채운 높직한 굄돌이다. 몸돌은 제짝이 아닌 듯 다른 부재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고, 장식이 전혀 없다. 지붕돌은 팔각으로 처마가 길게 빠졌고, 끝부분에 큼직한 귀꽃이 장식돼 있다. 몸돌과 맞닿은 부분에 각형 받침이 낮게 조각돼 있고, 지붕돌 윗면에는 굵은 기둥처럼 팔각의 모서리가 솟아 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굵은 구름무늬가 조각돼 있다.


상륜부에는 지붕돌을 축소해 놓은 것 같은 모양의 보개가 있고 그 위에 높직한 기둥과 커다란 보주를 장식했다.


이 부도를 진감선사 부도비와 짝을 이루는 부도로 보고 그 제작시기를 헌강왕 11년(885) 무렵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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