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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21] 도편수의 슬픈 사랑이 깃든 강화 '전등사(2), 전설속 전등사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09-22 18:45:22
  • 수정 2024-04-02 03: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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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에 이어 


[박광준 기자] # 은행나무



전등사에는 두 그루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수령이 5백 년이 넘는 나무들로, 한 나무는 노승나무, 다른 한 나무는 동승나무로 불리는가 하면 암컷, 수컷으로 불리기도 한다. 은행나무는 암컷과 수컷이 서로 마주보고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 그런데 전등사 은행나무는 꽃은 피어도 열매가 맺지 않는다고 한다. 이 신기한 나무들에 대해 전해지고 있는 전설이 있다. 


강화도령 철종 임금 때의 일이다. 조정에서는 전등사에 은행을 스무 가마나 바치라고 요구한다. 전등사 은행나무는 기껏해야 열 가마밖에 열매를 맺지 않는데 스무 가마를 요구하니 관리들의 횡포가 이만저만 심한 게 아니었다.이 지시를 듣게 된 동승이 노스님께 고했다.


“스님! 정말 관가에서 너무들 하는 것 아닙니까요?”

“허허,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얘야, 그렇다고 그 사람들을 미워해선 안 되느니라. 참아야 하느니…….”노스님은 이렇게 타일렀지만 자신도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은행 스무 가마를 내놓을 수도 없었고 관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더욱 더 불교를 탄압할 것이 분명했다. 노스님은 하는 수 없이 백련사에 있는 추송 스님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추송 스님은 도력이 높기로 소문이 난 분이었다.


며칠 후 추송 스님이 전등사에 나타났다. 곧 전등사 일대에 ‘전등사 은행나무에서 은행이 두 배나 더 열리게 하는 기도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추송 스님의 3일 기도를 지켜보았다. 그 중에는 관리들도 섞여 있었다.


“어떻게 은행이 두 배나 많이 열린단 말인가?”

“맞아! 추송 스님이 제 아무리 정성을 드려도 소용없는 짓이겠지.”사람들은 저마다 이렇게 수군거렸다.



이윽고 기도가 끝나는 날이었다. 갑자기 추송 스님의 기도를 지켜보던 관리들의 눈이 얻어맞은 것처럼 퉁퉁 부어버렸다. 


“이제 두 그루의 나무에서는 더 이상 은행이 열리지 않을 것이오.”추송 스님이 기도를 끝내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로 그때 때 아닌 먹구름이 전등사를 뒤덮더니 비가 무섭게 내렸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일제히 땅에 엎드렸다. 얼마 후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을 땐 추송 스님은 물론 노스님과 동자승까지 모두 사라졌다. 사람들은 보살이 전등사를 구하기 위해 세 명의 스님으로 변해 왔다고 믿게 됐다. 그 때부터 전등사 은행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았다.


# 나부상


전등사의 대표적인 건물인 대웅보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전등사 대웅보전이 세상에 더욱 유명하게 된 것은 대웅보전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裸婦像) 때문이다.



대체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신성한 법당에 웬 벌거벗은 여인인가 하고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나부가 아니라 원숭이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다. 원숭이는 사자나 용과 마찬가지로 불교를 수호하는 짐승으로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의 사찰에 모셔지기 때문이지만 전등사 대웅전의 조각상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나부상이라는 데 의견이 더 많다.


이 나부상과 관련해서는 유명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전등사는 160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가운데 여러 차례 화재를 겪고 이 때문에 대웅보전도 여러 번 중건됐다. 그 중 지금의 나부상이 만들어진 것은 17세기 말로 추측된다. 


당시 나라에서 손꼽히는 도편수가 대웅보전 건축을 지휘하고 있었다. 고향에서 멀리 떠나온 그는 공사 도중 사하촌의 한 주막을 드나들면서 그곳 주모와 눈이 맞았다. 사랑에 눈이 먼 도편수는 돈이 생길 때마다 주모에게 모조리 건네주었다.


오른손을 올린 전등사 대웅전 처마밑의 나부상 

양 손을 올린 전등사 대웅전 처마밑의 나부상 “어서 불사 끝내시구 살림 차려요.”

“좋소. 우리 그림 같은 집 한 채 짓고 오순도순 살아봅시다.” 도편수는 주모와 함께 살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대웅보전 불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사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그 주막으로 찾아가보니 여인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며칠 전에 야반도주를 했수. 찾을 생각일랑 아예 마시우.” 이웃집 여자가 말했다. 도편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여인에 대한 배반감과 분노 때문에 일손이 잡히지 않았고 잠도 오지 않았다. 그래도 도편수는 마음을 다잡고 대웅전 공사를 마무리했다. 


공사가 끝나갈 무렵 대웅전의 처마 네 군데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지붕을 떠받치는 조각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전등사 대웅보전에 얽힌 전설이다. 이 나부상이 더욱 재미있는 것은 네 가지 조각이 제각각 다른 모습이라는 점이다. 옷을 걸친 것도 있고 왼손이나 오른손으로만 처마를 떠받든 조각도 있고 두 손 모두 올린 것도 있기 때문이다.


환하게 웃고있는 나부상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 나부상 이 전등사 대웅전의 나부상은 희랍의 시지프스 신화를 연상케 한다. 그런가 하면 부처님을 모신 성스러운 전각이지만 그런 조각상을 세운 당시 도편수의 익살과 풍자, 그런 파격을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전등사 스님들의 자비로운 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과연 그 대웅전을 중건했던 도편수나 스님들은 무슨 뜻으로 나부상을 올려놓았던 것일까?단순히 사랑을 배신하고 욕심에 눈 먼 여인을 징계하고자 하는 뜻만은 아닐 것이다. 도망간 여인이 잘못을 참회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라는 염원도 들어있는 것이다. 


또 그런 조각상을 보게 될 후대의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본받으라는 뜻도 담겨 있으리라. 그렇기에 전등사 대웅보전의 나부상은 보면 볼수록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 삼랑성/단군의 세아들이 쌓은 삼랑성



남한에는 단군과 관련된 유적이 두 곳밖에 없다. 그런데 그 두 곳이 모두 강화도에 있다. 단군께서 나라의 안녕과 백성들의 평안함을 기원하면서 하늘에 제사를 드리던 참성단(전국체육대회의 성화를 이곳 참성단에서 밝히는 이유도 단군과 관련된 이유에서다.)과,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삼랑성이 그것이다.


삼랑성의 원래 이름은 발이 세 개 달린 솥을 엎어놓은 모습이라는 정족산성(鼎足山城)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단군의 아들과 관련된 삼랑성이란 이름으로 부르기를 더 좋아한다.


그 옛날 단군께서는 세 아들이 있었다. 마니산에 참성단을 쌓은 단군은 정족산에 성을 쌓기로 생각했으나, 큰 규모의 공사이기에 간단히 되는 것은 아니었다. 단군은 항상 생각을 기울여 끊임없는 꿈만이 젖어 있었다.



"정족산에 성을 쌓아 외부에서 침입하는 적을 막아야만 했다. 여러 가지로 생각했으나 좀처럼 좋은 방법이 없었다. 너희들 좋은 방책은 없겠느냐" 단군은 어느 날 세 왕자에게 의논을 했다. 


어이하려는지 자신 있게 답을 한다. "크게 염려하지 마십시오. 저희 세 사람이 힘을 합쳐 반드시 훌륭한 성을 쌓아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에 단군께서는 "성을 쌓으려면 많은 돌과 흙을 운반하지 않으면 안 될터 인데..?" 이에 대해 아들들은 "하늘의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저희가 힘을 합치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생각 합니다"라고 말하자 "그러면 너희들에게 일임한다."


세 왕자는 재빨리 다음날 아침부터 성 쌓기를 시작했다. 시작하고 보니 뜻밖에 응원하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전국 각처에서 구름같이 큰 남자들이 공사장으로 모여들었다. 



"단군의 왕자들은 스스로 축성하기 시작했다는 말을 듣고 재빨리 달려왔습니다." 입에서 입으로 동일한 말을 하면서 나타난 사람들은 가지런히 체격 좋은 사람들과 근력이 두드러진 장사들이었다. 주변에 있는 산으로 나갔으리라 생각했는데 큰 바위를 주먹으로 두드려 쪼개 내여 적당한 돌을 만들어 이쪽 산으로 던지는 것이었다. 그 돌은 하나하나가 들어맞는 중량으로 보이는 즉시 성벽이 되어 진다. 


공사는 점점 박차를 가해 진척됐는데 겨우 한 달도 못돼 난공사인 산성이 이뤄 졌다. 이에 단군은 "어찌되었던지 참으로 훌륭히 쌓아 올렸다. 이로써 베개를 높이하고 잘 수 있겠다. 너희들의 충성은 후세 자손들까지 반드시 말로 이어질 것이다" 단군은 공사에 관계한 장사들에게 두터운 인사를 베풀고 세 왕자에게는 정족산의 봉우리를 각각 하나씩 안겨주고 성을 지키도록 했다. 


이리하여 세 왕자들은 축성하고 각기 세 봉우리를 지킴으로써 이 성을 삼랑성이라 부르게 됐다고 전해진다. 강화도 남단 정족산 산등성이를 따라 단군의 세아들 부소(扶蘇).부우(扶虞).부여(扶餘)가 쌓았다는 삼랑성(三郞城)이 있는데 전등사(傳燈寺)는 이 성의 동북쪽에 위치해 있다. 현재 이 성의 문(동문,남문)들이 전등사의 출입구로 사용되고 있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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