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한국의 전통사찰 22] 도편수의 슬픈 사랑이 깃든 강화 '전등사(3), 전등사 둘러보기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09-22 20:44:48
  • 수정 2024-04-02 03:20:19

기사수정

지난호에 이어


[박광준 기자] 지난 1.2호에서는 전등사의 변천과정과 전설 속의 전등사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번호에서는 전등사편으로 마지막 3편으로 전등사의 이모저모를 살펴본다.<편집자주>


# 대웅보전



보물 제178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규모는 작지만 단정한 결구에 정교한 조각 장식으로 꾸며져서 조선중기 건축물로서는 으뜸으로 손꼽힌다. 특히, 건물 내부 불단위에 꾸며진 닫집의 화려하고 정치한 아름다움은 건축공예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보마다 용틀임으로 장식되면서 용두가 네 귀퉁이에서 돌출해 나오면서 천장 주변으로는 연, 모란, 당초가 화려하게 양각되고 중앙 우물 반자 안에는 보상화문이 가득 채워져 있다. 


더욱 희귀한 것은 물고기를 천장에 양각해 놓아 마치 용궁인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닫집 왼쪽 천장에는 양쪽에 용두장식을 하고 몸체에 용틀임을 한 작은 용가(龍架)의 배 부분에 아홉 개의 방울을 달아 놓고 끈을 달아 불단까지 늘여놓아 이를 잡아 흔들면 아홉 개의 방울이 동시에 울어 구룡토음의 장관을 이루게 했던 적도 있었다. 


강화 전등사 대웅전 내부/문화재청 내부에 있는 유물로는 석가여래 삼존과 1880년에 그린 후불탱화, 1544년 정수사에서 개판한 '법화경' 목판 104매가 보관돼 있다. 현재의 건물은 1621년(광해군 13)에 지은 정면 3칸, 측면 3칸 형식의 목조 건물로, 정면 3칸은 기둥과 기둥 사이를 같은 길이로 나눠 빗살문을 단 형식이다. 


좌우 옆면은 벽이나 앞 1칸에만 외짝으로 문이 있다. 기둥은 대체로 굵은 편이고 모퉁이 기둥은 높이를 약간 높여서 처마 끝이 들리도록 했다. 대웅보전의 외관상 특징을 살펴보면, 나부상, 동물 조각, 연꽃 조각 등을 통해 곡선이 심한 지붕과 화려한 장식이 그러한 특징을 잘 보여 준다.


# 약사전



보물 제179호로 지정된 약사전은 대웅보전 서쪽에 위치하는 건물로 대웅보전과 거의 같은 양식의 건물로, 조선 중기 다포계열의 정면 3칸, 측면 3칸 단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장대석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기둥을 설치했고, 정면 각 기둥 위에는 공포를 배열하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공간포(기둥과 기둥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공포)를 설치했다. 


강화 전등사 약사전 내부 가구와 천장/문화재청 내부 천장은 중앙 부분에 우물천장을 두고 주위에는 빗천장을 만들었고, 거기에 돌아가면서 화려한 연화당초문을 그려 놓았다. 대웅보전과 함께 지붕을 수리했다는 기록 말고는 다른 기록이 없어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건물의 겉모습이나 내부 장식도 대웅보전과 비슷하다.


# 명부전


약사전 옆의 서남쪽에 세워진 명부전도 정확한 창건 연대는 밝혀지지 않는다. 명부전에는 지장보살상을 비롯해, 시왕.귀왕 등 모두 29존상이 모셔져 있다. 대개 명부전은 지장전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죽은 이를 재판하는 시왕이 있는 곳은 명부전, 지장보살을 모셨을 경우에는 지장전이라고 부른다. 


명부전 전경이 전각은 죽은 사람들이 49일이 지나 재판을 받을 때까지 그들의 넋을 위해 치성을 드리는 곳이다. 지장보살은 모든 중생이 극락을 가기 전까지는 결코 성불하지 않겠노라는 원을 세운 보살로, 그래서 지장보살은 녹색의 머리를 깎고 주장자를 짚은 채 지옥 문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처럼 명부전에는 부처님 원력으로 극락왕생을 기원하면서, 제사의 공덕으로 극락을 가라는 정성어린 마음이 담겨 있다.


# 삼성각



삼성각은 산신, 독성(나반존자), 칠성 등 삼성(三聖)을 모신 건물로, 본래 삼성은 중국의 도가 사상과 관련이 있는 성인들이지만 이 땅에 불교가 전래하면서 불교 사상과 융합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대조루



전등사의 남동쪽으로는 멀찌감치 강화해협이 내려다보인다. 강화해협은 일명 ‘염하’라고도 부르는데 이 염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전등사 대조루이다. 전등사의 남문이나 동문으로 올라와 두 길이 합치는 지점에 빠르면 2층 건물이 보이고 1층 이마에는 ‘전등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이 건물이 바로 전등사의 불이문 구실을 하는 대조루이다. 지금의 대조루는 1932년에 중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건물 자체가 주변 경관과 잘 어울리면서 전등사의 여러 건물 중에서도 아주 소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대조루에서 대웅전을 바라볼 때의 시선은 25도쯤 위쪽으로 향하게 된다. 대웅전의 석가모니불을 가장 존경하는 시선으로 보게 하는 각도로, 이런 부분까지 섬세하게 고려해 지어진 건물이 대조루이다. 대조루에는 1726년 영조 임금이 직접 전등사를 방문해서 썼다는 ‘취향당’이라는 편액을 비롯해 추사가 쓴 ‘다로경권’ 등 많은 편액이 보관돼 있다. 본래 대조루는 기도를 하거나 법회를 열던 공간이었으나 지금은 불교 서적과 기념품 등을 파는 곳으로 사용되고 있다. 인천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돼어 있는 건물이다.


# 정족사고


사고란 고려 및 조선시대에 나라의 역사 기록과 중요한 서적 및 문서를 보관한 전각을 일컫는 말로, 옛 선조들은 특히 사고 안에 따로 역대 왕조실록을 보관한 곳을 사각(史閣)이라 해서 그 보존에 힘을 썼다. 실록이 처음으로 사찰에 보관됐던 것은 고려 때인 1227년(고종 14)의 일이다. 이때 고려 왕실에서는 합천 해인사에 사고를 마련해 실록을 보관했다. 조선시대에는 궁궐의 춘추관과 충청도 충주, 경상도 성주, 전라도 전주에 사고를 설치했다. 이것으로 춘추관 외에 이들 충주.성주.전주의 사고를 3대 사고라 해서 여기에 역대 실록을 분산 보관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춘추관과 충주 및 성주의 사고가 소실된 반면 전주의 사고만 유일하게 보존돼 그곳의 실록 등을 한때 내장산으로 옮겼다. 1606년(선조 39), 명종까지의 실록이 여러 벌 복원되자 묘향산에 사고를 설치해 전주 사고본을 옮겼다. 


강화 정족산사고지/문화재청 또한 오대산, 태백산, 적상산에도 사고를 마련해 새로 간행한 실록을 보관했다. 1628년(인조 6), 조정에서는 강화 마니산에 새로 사고를 설치해 묘향산 사고에 보관했던 전주본을 옮겼다가, 1660년(현종 1) 강화 정족산에 사고를 마련해 마니산 사고에 있던 전주본을 이곳에 비장했다. 이처럼 실록 등 국가의 귀중한 사서는 소실 등의 피해를 막기 위해 중앙과 지방에 분산해 보관했다. 그러다 구한말인 1908년, 정족.태백.오대.적상산 등 4대 사고의 장서들은 규장각의 관할 하에 뒀다. 이렇게 보면 세계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도 수난을 많이 겪은 셈이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과 교훈을 생명처럼 여겼던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정성은 오늘날까지 한민족의 문화적 역량을 한껏 보여주고 있다. 


강화 정족ㅅ산사고지/문화재청 본래의 정족산 사고는 1931년 무렵 주춧돌과 계단석만 남긴 채 없어졌다. 다만 사고에 걸려 있던 ‘장사각’과 ‘선원보각’이라는 현판만 전등사에 보존되어 있어 당시의 실상을 알려주고 있다. 폐허가 됐던 장사각 건물은 1999년 복원돼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조선왕조실록은 한 왕조의 역사적 기록으로는 가장 긴 시간에 걸쳐서 작성됐고, 가장 풍부하면서도 엄밀한 기록을 담고 있다. 또한 국왕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조선인들의 일상적인 생활상을 자세히 보여 주고, 세계에서 유일하게 활자로 인쇄됐고, 보관과 관리에도 만전을 기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에 따라 조선왕조실록은 1973년 12월 31일에 국보 제151호로 지정됐고, 1997년 10월 1일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됐다.


# 종루


전등사 철종_종신전등사에는 보물 제393호로 지정된 전등사 범종과 근래에 만들어진 범종 등 두 개의 종이 있다. 이 두 범종을 보관키 위해 종각과 종루로 이름을 달리해 두 개의 범종각을 세웠다. 현재 대조루 옆의 종루에는 보물로 지정된 범종이 있었으나 2004년에 명부전 앞의 종각으로 옮기고 지금은 일반 범종이 보관돼 있고 조석 예불 때 사용된다.


# 남문



전등사의 출입구는 두 군데에 있다. 전등사 사거리 쪽에서 주차장으로 진입하자마자 나오는 출입구가 동문이고 동문에서 약 500미터쯤 남쪽으로 진행하면 남문 주차장이 있다. 본래 삼랑성(정족산성)에는 동서남북 네 개의 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동문과 남문만 이용된다. 이 가운데 문루(門樓)가 있는 곳은 남문이 유일하고며 남문의 문루를 ‘종해루’라 부른다. 이 종해루를 지나 50미터쯤 올라 좌측을 보면 전등사 역대 조사들의 부도가 세워진 부도전이 보인다.


# 양헌수비



인천기념물 제36호로 지정된 양헌수승전비는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양헌수(1816~1888) 장군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1873년(고종 10)에 건립된 것이다. 이 때는 아직 양헌수 장군이 살아있을 때였지만 대원군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은 뒤 외침을 물리친 것을 널리 알리기 위해 기념비를 세운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양헌수 장군은 1838년(헌종 4)에 무과에 급제한 이래, 병인양요 때 공을 세워 한성부좌윤으로 특진됐고 중군을 거쳐 어영대장.금위대장.형조판서.공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시호는 충장공이며 저서로는 '하거집(荷居集)'이 있다.


# 삼랑성


삼랑성(남문)전등사 일대를 에워싸고 있는 삼랑성은 국가사적 제130호로 지정돼 있다. 이 성은 고대 토성의 흔적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단군의 세 아들인 부여.부우.부소가 쌓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후 토성 자리에 표면이 거친 할석(割石)으로 성을 쌓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정족산성 동문삼랑성은 성 안팎을 할석으로 겹축했고 할석 사이마다 할석 부스러기로 쐐기를 많이 사용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해발 222m인 정족산의 정상에서 동향한 계곡을 포용하고, 동남향한 계곡에 수구와 남문이 있다. 북문은 북벽의 서쪽에 치우쳐 산봉우리 사이의 안부에 있고, 서문도 서남쪽 안부에 있고, 동문은 남문의 북쪽으로 해발 107m의 봉우리 북쪽 안부에 있다. 성벽이 꺾어 도는 곳마다 10여 개의 곡성을 이루면서,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치성(雉城)이 마련되기도 했다.


# 부도전



전등사에 주석했던 역대 조사들의 부도를 모셔둔 곳으로 남문을 50미터 쯤 지난 왼쪽 산기슭으로 부도전이 세워져 있다.


# 고려가궐지


고려가 몽골의 침략을 받아 강화로 도읍을 옮겼을 때인 1259년에 세워진 궁궐터이다. 당시 고려 조정에서는 부처님의 가피로 왕실의 안녕을 꾀하고 나아가 국난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임금의 임시 거주처를 마련하게 했다. 그래서 전등사 경내에 고려의 가궐을 세우고 한때는 임금이 머물면서 대불정오성도량을 열었다. 그러나 39년의 항쟁 끝에 고려 조정은 다시 개경으로 환도를 했고 강화도에 남았던 고려의 문화유산은 몽골군에게 마구 불태워지거나 훼손되고 말았다. 



전등사 적묵당 옆 산기슭에 있던 가궐도 이때 폐허를 면치 못했다. 풍문으로만 남았던 고려 가궐지가 발굴돼 세상에 알려진 것은 지난 2000년의 일이었다. 동양고고학연구소 소장이고 선문대학교 교수인 이형구 박사팀이 고려 가궐지를 발굴해 건물지를 실측하고 수많은 문화재를 수습해 학계에 보고한 결과 전등사 경내의 고려 가궐지가 공식 확인된 것이다.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궁궐이야기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