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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23] 세계문화유산 영축총림 통도사(1)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09-24 16:57:38
  • 수정 2024-04-02 03: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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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도사의 창건 내력, 이름, 가람배치의 특징

통도사 전경/사진출처-양산시[박광준 기자] 통도사가 깃들인 큰 산은 취서산, 그 산의 남쪽 기슭이다. 취서산(鷲棲山, 1,058m). 최소한 중앙지도사에서 나온 '한국도로지도'에는 그렇게 씌어 있다. 조선 중종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이 산의 이름은 취서산이다. 하지만 이 절의 사격과 주소를 드러내는 일주문의 현판에는 ‘취서산 통도사’가 아닌 ‘영취산(靈鷲山) 통도사’이다. 이 글씨는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쓴 것이라고 한다. 


본래 영취산은 인도의 옛 마가다국에 있는 산으로 석가모니가 '법화경'을 설(說)한 곳으로 유명하다. 그 모양이 꼭 독수리 머리같이 생겼다고 해 ‘영취산’이다. 취서산 역시 ‘독수리가 깃들인다’, ‘독수리가 산다’는 뜻 아닌가. 이런 마당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절이니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석가모니가 직접 설법한 산의 이름을 빌어다 높여 부르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흥선대원이 쓴 '영취산 통도사'또한 일주문의 주련에는 ‘佛之宗家’(불지종가)라는 글자도 씌어 있다. 통도사를 불보사찰이라 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이다. 통도사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해간다.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보리수 아래에서 입멸한 석가모니의 시신을 화장해 거둔 진신사리 여덟 가마 네 말 중의 일부가 모셔져 있다. 이 석가모니의 진신사리, 곧 불보(佛寶)가 통도사에 모셔진 역사는 매우 깊다. 이는 통도사 창건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삼국유사' '자장정율’(慈藏定律, 자장이 계율을 정하다)조와 ‘전후 소장사리’(前後所藏舍利)조 등에 그 내용이 비교적 소상히 적혀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통도사를 창건한 스님은 자장율사다. 자장율사는 진골 귀족 출신으로 태어나 부모를 여읜 뒤 출가해, 고골관)이라는 지독한 고행을 했다. 왕이 “취임하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면서 재상 자리를 강권했음에도 “내 차라리 단 하루를 살더라도 계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파계를 하고 백 년 동안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면서 단호히 거절할 정도로 자장율사는 구도를 향한 결심이 굳었다고 한다. 



선덕여왕 5년(636)에는 멀리 당나라에 유학해 환대를 받았고 선덕여왕 12년(643)에 석가모니의 머리뼈와 어금니와 사리 100알과 부처가 입던 붉은 깁에 금점이 있는 가사 한 벌을 가지고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신라의 가장 높은 승직인 대국통에 올라 수행자의 규범을 바로잡았다. 


당시 자장율사에게 계를 받고 불법을 받든 이가 열 집에 여덟아홉이나 됐고 머리를 깎고 중이 되기를 청하는 이가 해마다 달마다 늘어갔다고 전한다. 이에 자장율사는 통도사를 세우고 계단(戒壇)2)을 만들어 사방에서 오는 사람들을 받아들였다. 자장율사가 지은 절과 탑은 모두 10여 곳에 이른다. 특히 황룡사 탑, 태화사 탑, 통도사 계단에는 당나라에서 가져온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고 한다.


통도사의 창건에 대한 내력이 이처럼 소상함에도 통도사의 창건연도는 불분명하다. 다만 옛 문헌들이 모두 입을 모아 통도사는 선덕여왕 때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고, 자장율사의 귀국이 선덕여왕 12년이고, 선덕여왕이 재위한 기간이 이후로 3년 뒤인 646년까지인 것을 감안하면, 통도사의 창건은 선덕여왕이 마지막으로 재위한 646년을 넘어설 수가 없다는 것이 다수의 의견이다. 



그렇다면 통도사라는 이름에는 어떤 뜻이 있을까?. 우선 하나는 “산의 모양이 석가모니가 직접 불법을 설한 인도 영취산과 통한다”고 해서 통도사라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승려가 되려는 사람은 모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이 금강계단을 통해서 계를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또 세번째는 “모든 진리를 통달하여 일체 중생을 계도한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언제부터 누가 이런 해석을 내렸는지 알 수는 없지만, 모두 통도사의 창건 의도를 그대로 드러낸 해석으로 보인다.


이렇듯 창건의 단초가 된 것이 금강계단인 만큼 통도사의 가람배치 역시 금강계단을 중심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통도사는 금강계단의 위치를 비롯한 전체 가람배치가 무척 독특하다. 통도사는 동서로 흐르는 내를 따라 같은 방향으로 길게 누운 모양으로, 평지에 가까운 경사면에 들어서 있다. 동서로 늘어서 있는 일주문.천왕문.불이문에 이르는 축이 주축이 되고, 이 주축상에 직교하면서 각기 독립된 것처럼 보이는 영역이 세 곳 존재한다. 상.중.하로전이다.


통도사 금강계단 전경통도사 가람배치의 특징을 이루는 첫번째 공간인 하로전은 천왕문을 들어서서 불이문에 이르기까지 펼쳐지는 공간으로, 이 공간의 중심 영역은 남향하고 있는 영산전이다. 또 각각 좌우에 약사전과 극락보전이 있고, 그 앞에 만세루가 포진해 가운데에 마당을 만들어낸다. 마당 가운데에는 삼층석탑이 있다.


두번째는 중로전으로, 불이문을 넘어서 세존비각에 이르는 공간으로, 이 공간을 독립적으로 놓고 보면, 두 개의 영역으로 다시 나뉜다. 하나는 동서로 흐르는 주축에 직교해 일렬로 늘어선 관음전과 용화전과 대광명전이고, 또 하나는 세존비각과 관음전.용화전.대광명전이 이루는 축 사이를 비집고 차례로 들어서 있는 개산조당과 해장보각이다. 개산조당 앞에는 1920년에 세운 오층석탑이 서 있다.


하로전과 중로전에 이어지는 상로전 영역에는 역시 통도사의 가장 핵심 공간이 되는 대웅전과 금강계단이 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놓고 보면,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사리탑인 금강계단이 대웅전 뒤편에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고, 대웅전을 ㄷ자형으로 둘러싸고 명부전.나한전.삼성각.산령각과 일로향각이 들어서 있다.



원시불교인 사리신앙에서부터 계율학, 법화신앙, 미륵신앙, 관음신앙, 화엄신앙, 정토신앙, 약사신앙 등등 마치 불교 신앙의 종합 백화점인 양 불교의 다양한 신앙 형태들이 통도사 내에 각각의 전각으로 표현돼 있을 뿐만 아니라 세 영역 하나하나가 모두 독립된 사찰을 이뤄도 손색이 없을 만큼 치밀하다. 


얼핏 수십 동의 건물이 이리저리 흩어져 다소 산만한 듯 보이기도 하지만 건물 집합의 규칙을 새겨가면서 경내를 돌아보면 건물 하나하나와 건물과 건물을 잇는 동선의 흐름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세 개의 건물 영역이 각기 독립적인 동선을 가지면서도 서로 유기적으로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내를 살펴볼 때에는 건물 수십 동으로 이뤄진 통도사가 창건 당시에도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상로전 영역만 보더라도, 대웅전은 남아 있는 기단의 수법으로 보아 사찰 창건 당시인 신라시대부터 어떤 형태로든 건물이 조성됐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명부전은 고려 공민왕 18년(1369)에, 응진전은 조선 숙종 3년(1677)에, 산령각은 영조 37년(1761)에, 삼성각은 고종 7년(1870)에 창건돼 현재의 상로전은 창건 이래 계속 변모를 거듭해왔을 터이기 때문이다.


양산 통도사 불이문_편액/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년(646)에 자장율사가 지은 절로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이다. 통도사의 세번째 문으로 해탈문이라고도 불리는 불이문은 고려 충렬왕 31년(1305)에 처음 지은 후, 조선 후기에 다시 지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모든 것이 평등하고 차별이 없음을 불이(不二)라 하며, 불이문은 이러한 불이법문(不二法門)을 상징하는 것이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화려한 팔작지붕 건물이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짜임새가 있고 견실한 건물이다. 문에 걸려있는 ‘원종제1대가람’이라고 쓴 현판은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직접 쓴 것이라고 전해진다.현재 경내에 있는 주요 법당 13개를 건축된 시대별로 구분해보면, 창건 당시인 신라시대부터 있었으리라 생각되는 건물은 대웅전과 대광명전, 영산전뿐이다. 명부전.용화전.극락보전.약사전.가람각은 고려시대에, 그리고 나머지 나한전.삼성각.산령각.관음전.해장보각 등은 조선시대 건물이다. 통도사의 상로전.중로전.하로전이라는 독특한 영역배치는 창건 당시부터 고려된 것이 아니라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중창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통도사의 가람배치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일주문.천왕문.불이문을 잇는 중심축, 곧 상로전.중로전.하로전을 잇는 중심축이 활처럼 휘어져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배치로 인해 절은 더 깊은 공간감을 갖게 된다. 일주문에서 천왕문에 이르는 50m의 진입로가 미세하게 휘어져 있지 않고 직선이었다면 현재와 같이 멀고 깊게 느껴지는 거리감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천왕문에서 대웅전에 이르는 약 150m의 거리 가운데에 세운 불이문 역시 같은 효과를 노린 배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곡선은 중로전의 관음전.용화전.대명광전을 잇는 축에서도 나타난다. 이와 같은 가람배치는 우리나라 절에서는 드물지 않게 드러나는 사려 깊은 건축 감각이다. 통도사에서는 이와 같은 유연한 축선이 특히 유용하게 활용, 강조됐다./다음호에 계속(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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