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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25] 세계문화유산 영축총림 통도사(3)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09-24 22:13:41
  • 수정 2024-04-02 03: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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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로전 영역

# 불이문에서 바라본 중로전 영역


불이문을 들어서면 중로전 영역으로, 중로전은 대광명전, 용화전, 관음전, 개산조당 등 수많은 건물로 이뤄져 있는데 막상 불이문에 들어서면 중로전 영역보다는 상로전의 중심건물인 대웅전이 바로 보인다.


불이문은 약 1.5m 되는 석축 위에 올라선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집으로, 정면 3칸에는 모두 판문을 달아 출입하게 했고, 측면은 벽체로 마감하고, 뒷면에는 벽체도 문도 달지 않았다. 얼핏 단조롭게만 보이는데 일단 내부에 들어서서 천장을 보고 나면 이 불이문이 한껏 정겹게 느껴진다. 대들보가 놓이지 않은 중앙에 호랑이와 코끼리가 서로 마주보면서 이마로 종보를 떠받들고 있는 모습 때문이다. 양쪽 대들보 위에 ㅅ자 모양의 솟을합장재를 짜넣은 것도 독특하다. 이 솟을합장형 대공은 주심포 건물에서는 흔하지만 다포계 건물에서는 드문 방식이다. 


# 통도사 불이문


불이문일주문과 천왕문에 이어 경내로 들어가는 마지막 문으로, 불이문에 들어서면 세속의 모든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해 해탈문이라 부르기도 한다. 불이문은 일주문과 천왕문에 이어 경내로 이끄는 세번째 문이면서 마지막 문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으로 불이문에 들어서면서 곧장 취서산을 뒤로 이고 있는 대웅전을 마주보게 된다. 둘 사이의 거리 또한 그리 멀지 않다. 중로전만의 독특한 건물 배치법 때문에 불이문을 통과해 중로전에 들어서면 곧장 대웅전으로 향하지 못하게 돼 있다.


일단 중로전의 중심축은 남북 방향으로 통도사의 주축인 동서축에 직교한다. 관음전과 용화전과 대광명전이 남북을 축으로 해 차례로 들어서 있는데, 중로전의 중심건물인 대광명전 쪽으로 갈수록 건물 크기도 점차로 커지지만 축선도 동쪽으로 약간 휘어져 중로전의 영역은 스스로 확장하는 듯한 생명력을 갖게 된다. 불이문과 함께 중로전의 경계가 되는 세존비각과의 사이에 관음전.용화전.대광명전처럼 일렬로 늘어선 개산조당.해장보각.장경각 역시 관음전과 용화전, 대광명전과는 반대, 곧 서쪽으로 약간 휘어져 있어서 확장되는 느낌이 더 짙다.


# 관음전


관음전중로전의 중심에 놓인 관음전.용화전.대광명전 축에서 가장 앞쪽에 자리잡고 있는 관음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집이다. 주존불로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있고, 법당 안에는 관음상 벽화가 여럿 있다. 


관음전 앞의 석등은 높이 2.4m이다. 방형 지대석 위에 안상을 새긴 팔각 하대석이 놓였는데 윗부분은 연꽃으로 장식돼 간주를 받치고 있다. 간주는 사각이면서도 옆 모서리를 깎아내고 중앙에 가락지를 끼운 듯 또는 대나무의 마디인 듯 돋을새김 장식을 해 단조롭지 않게 모양에 변화를 주었다. 간주 위에는 사각의 창을 사방으로 큼지막하게 낸 화사석을 놓았는데, 간주와 화사석 사이에 사각에 가까운 연화받침을 끼웠다. 팔각의 지붕돌 아랫면 화사석이 놓이는 부분에는 낮은 단을 조각해 지붕돌을 받치는 것 같은 효과를 냈다. 조형이나 장식수법으로 보아 눈길을 확 잡아끄는 석등은 아니지만, 고려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 관음전 앞 석등


관음전 앞 석등 

높이 2.4m의 자그마한 석등으로, 간주석 중앙에 대나무의 마디인 듯한 돋을새김으로 변화를 줬다. 관음전 뒤쪽의 용화전은 석가모니 다음, 곧 석가모니의 출현으로부터 56억 7천만 년이란 세월이 흐른 미래세계에 출현하실 미륵불을 모시고 있는 법당이다. 미륵불은 현재 도솔천에서 미륵보살의 신분으로 명상에 잠겨 있는데, 성도(成道) 후에는 지상에 내려와 세 번의 설법을 통해 남은 중생들을 모두 구제하도록 예정된 분이다. 이 설법을 ‘용화삼회’(龍華三會)라 부르고 미륵불이 출현할 곳 또한 ‘용화수’라는 나무 밑이므로 법당의 이름을 용화전이라고 한다.


# 용화전


용화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집이고 안에 모신 미륵불 좌상은 크기가 2m에 이른다. 건물 측면 어칸에도 문짝을 달았다. 내부에는 대형 벽화 7폭을 비롯해 공포와 공포 사이 포벽에도 여러 가지 그림이 그려져 있다. 특히 배경으로 그려진 식물들의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다. 


용화전

미륵불을 모신 건물이다. 통도사에 용화전을 세운 것은 고려 공민왕 때라고 하나 현재의 건물은 영조 원년(1725)에 중건된 것으로, 용화전 앞에는 형태가 매우 독특한 석조물이 있다. 이른바 ‘봉발탑’(奉鉢塔)이라 부르는 것이다. 네모난 지대석 위에 둥근 복련대를 놓고 그 위에 네 귀퉁이의 모를 죽인 사각기둥을 세우고, 다시 그 위에 둥근 앙련대를 놓아 받침대를 만든 뒤 뚜껑 덮인 밥그릇(바리때) 같은 것을 올린 모습인데, 이는 불교 교리상 매우 상징적인 석조물이다. 부처님의 제자인 가섭존자가 석가여래의 발우(鉢盂, 공양을 받는 그릇)와 가사를 가지고 인도의 계족산에서 미륵불을 기다린다고 하는 것에서 유래한다. 이 봉발탑이 바로 그때에 전해질 발우이다. 봉발탑은 도솔천에서 성도를 위해 명상에 잠겨 있는 미륵불의 출현을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이 담긴 석조물이다. 용화전에 모셔진 분이 미륵불인 것을 생각할 때, 용화전 앞에 놓인 봉발탑은 그 위치가 매우 적절한 것이라 생각된다. 다만, 봉발탑이라는 현재의 공식 명칭에 대해서는 사리를 모신 것이 아닌 이상 탑이라는 명칭이 불합리하며, ‘봉발대’ 또는 ‘석조봉발’이라는 명칭이 적당하다는 이견들이 있다.


# 봉발탑


용화전 앞에 있는 봉발탑부처님의 제자인 가섭존자가 석가여래의 발우와 가사를 가지고 미륵불을 기다린다는 교리에 따라 만든 상징물이다. 봉발탑의 높이는 2.6m에 달하고 하대석이 원형인 것을 제외하고는 대좌에 조각된 연꽃이라든지 간주석의 모습은 관음전 앞의 석등과 많이 닮아 있다. 용화전이 초창됐던 고려 공민왕 18년(1369)에 함께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관음전 앞의 석등과 함께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봉발탑으로서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는 국내에서 유일하지만, 대석과 바리때가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것인지는 아직 의문이다. 봉발탑은 현재 보물 제471호로 지정돼 있다.


관음전, 용화전 등의 축을 거치면서 바닥 면이 조금씩 높아지고 건물도 조금씩 커지는 분위기의 중로전에서 중심이 되는 건물이 바로 대광명전이다. 이곳에 빠르면 건물 자체가 높아지고 커졌을 뿐만 아니라 역사도 깊어진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집인 대광명전은 관음전과 용화전보다 이른 시기, 곧 통도사 창건 당시 초창된 건물로 알려져 있다. 현재의 건물은 영조 원년에 중수됐다.


# 대광명전


대광명전 중로전의 중심건물로 영조 원년에 중수됐다.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상을 모시고 있다. 비로자나불은 불가에서는 진리요 우주의 본체인 법신불(法身佛)이다. 후불탱화로는 영조 35년(1759)에 조성된 법신 후불탱화가 있다. 본래는 보신(報身) 노사나불과 화신(化身)인 석가여래를 각각 한 폭씩 그린 ‘비로자나삼신 불화’가 걸려 있었으나 이들은 성보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법신 후불탱화는 가로 3.15m 세로 4.6m 크기이고, 보신.화신 후불탱화는 모두 가로 1.76m, 세로 3.8m 크기이다. 이 ‘비로자나삼신 불화’는 현재 보물 제1042호로 지정돼 있다. 용화전은 내부의 단청과 벽화가 잘 보존돼 있고, 안쪽의 공포가 매우 화려하다. 


# 세존비


세존비각중로전의 맨 끝 서쪽 편에는 사방 한 칸의 작은 팔작지붕집인 비각이 금강계단 옆에 바짝 붙어 있다. 여기까지가 중로전이다. 이 작은 비각은 숙종 32년(1706) 계파(桂坡) 스님이 금강계단을 중수하면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소장하게 된 내력을 자세히 밝힌 비를 세우고 지은 세존비각(世尊碑閣)이다. 안에 있는 비석의 높이는 약 2.5m이고 폭은 1m 정도인데, 밀양의 표충비처럼 간혹 눈물을 흘린다고도 한다. 가운데에 도깨비상을 조각하고 양쪽에 단순하고 귀염성 있는 꽃무늬를 조각한 비석받침이 우선 호감이 가고, 천장에서 비석을 내려다보는 용의 모습도 눈길을 끈다. ‘사바교주석가여래영골부도비’(裟婆敎主釋迦如來靈骨浮圖碑)라는 비명을 가지고 있다. 비문은 채팽윤(蔡彭胤, 1669~1731)이 썼는데,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셔온 일과 임진왜란 시기에 사명대사가 석가모니 사리를 보호하기 위해 둘로 나눠 금강산에 있는 서산대사에게 보냈더니 서산대사가 하나는 묘향산에, 다른 하나는 현재의 계단에 모시도록 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 개산조당


개산조당 세존비각 안에 있는 작은 비로 자장율사가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셔온 일과 임진왜란 때 사리를 보존하기 위한 일들이 기록돼 있다. 세존비각 뒤쪽으로 비좁은 공간을 비집고 들어와 중로전 영역에 또 하나의 축을 만드는 일련의 건물이 있다. 개산조당(開山祖堂)과 해장보각(海藏寶閣)이다. 개산조당은 해장보각에 딸린 출입문이다. 이들 두 건물은 영조 3년(1727)에 창건돼 여러 차례 중수됐고, 현재는 고종 4년(1867)에 크게 손보아진 뒤의 모습이다. 개산조당은 솟을삼문 형식인 출입문이 확실하다. 법당의 이름인 ‘개산조당’이라는 현판이 붙은 것은 현재 해장보각이 통도사의 개산조인 자장율사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 또한 자장율사의 영정이 모셔진 건물에 해장보각이라는 현판이 붙게 된 데에는 '삼국유사'에 이미 기록된 바와 같이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가져온 대장경을 통도사에 봉안’했던 것과 관련돼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장율사의 영정 주위에는 '고려대장경'도 함께 모셔져 있다. 현재 도서관으로 이관, 봉안돼 있다. 해장보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집이고, 외벽에 그려진 민화풍의 까치 호랑이 그림이 친숙하게 느껴진다. 내부에 모셔진 자장율사의 영정은 가로 1m, 세로 1.7m에 이른다. 


사찰에서는 보기 드물게 솟을삼문으로 이뤄진 건축물로 자장율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해장보각의 출입문이다.


# 자장율사 진영


자장율사 진영 통도사를 처음 창건한 개창주 자장 스님의 진영으로, 남동향한 개산조당과 해장보각 뒤쪽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집인 장경각이 있다. 장경각에는 통도사 인근의 운흥사(雲興寺)가 구한말 폐사되면서 그곳에 있던 주요한 목판장경들이 옮겨와 있다. 개산조당 앞쪽에 놓인 오층석탑은 1920년에 건립됐고 전체 높이 6m, 1층 몸돌에 인왕상이 하나씩 조각돼 있다./다음호에 계속(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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