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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26] 세계문화유산 영축총림 통도사(4)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09-25 14:40:43
  • 수정 2024-04-02 03: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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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로전 영역

지난호에 이어 


[박광준 기자] 통도사의 근원이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석가모니의 진신사리였던 만큼 뭐니뭐니해도 통도사를 가장 통도사답게 하는 공간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과 금강계단에 참배할 공간으로 마련한 대웅전이 들어선 상로전 영역이다.

 

불이문통도사에서 가장 중심되는 곳으로 대웅전, 응진전, 명부전, 삼성각 등으로 이뤄져 있다. 중로전을 지나 상로전 영역에 들어서면 처음으로 마주하게 되는 것이 대웅전이다, 전통사찰의 법당 대부분이 정면이라고 하면 대개 한 면이게 마련인데, 대웅전은 사방이 모두 정면이 된다. 남향하고 있는 금강계단 앞쪽에 대웅전이 지어진 까닭에 대웅전의 정면 역시 남쪽이 돼야 하지만, 동서로 뻗은 통도사의 주축선을 따라서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을 지나 상로전 영역에서 첫 대면하게 되는 대웅전은 남쪽 면이 아닌 동쪽 면이 되는 까닭에 대웅전의 동쪽 면 역시 정면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입지조건에 맞추다보니 지금과 같이 사방이 정면이 되는 독특한 형태의 건물이 된 것이다.

 

# 대웅전

 


상로전의 중심건물로 丁자형의 특이한 외관을 하고 있다. 현재의 건물이 세워진 것은 인조 19년(1641)부터 인조 22년(1644)이다. 자장율사에 의해 통도사가 창건될 때 초창됐으나 여러 차례 다시 지어지거나 손보아지면서 내려오다가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에 타 다시 지어졌다. 그러나 대웅전을 화사한 꽃밭으로 만드는 기단만은 창건 당시의 것으로 여겨진다. 기단은 지대석을 놓고 귀기둥과 버팀기둥을 세운 뒤 그 사이에 연꽃이 조각된 면석을 끼우고 윗면에 갑석을 놓아 마무리했다.

 

기단 위에 놓인 대웅전은 매우 크고 높고, 남쪽 면이 3칸, 동쪽 면이 5칸인 다포식 팔작지붕집이다. 하지만 여느 팔작지붕과는 달리 지붕의 북쪽을 제외한 삼면에 합각이 생기는 丁자 모양으로 만들었다. 丁자형 지붕의 중앙에는 큰 절집임을 상징하는 찰간대(刹竿臺)를 세웠고, 활주가 건물의 네 귀퉁이에서 지붕을 떠받치고 있다. 지붕 처마 끝에 기와를 고정하기 위한 용도의 백자를 설치한 것까지 감안하면 대웅전은 건축적인 배려가 매우 많은 건물이다.

 

대웅전은 건물의 외형도 독특하지만, 금강계단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다른 법당과 달리 내부에 불상을 모시지 않고 있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석가모니의 신체를 모셔놓고서 석가모니를 모방한 불상을 따로이 마련할 이유는 없다.

 





이처럼 대웅전은 통도사 가람배치의 특수성과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라는 용도 때문에 동서남북 각 면이 모두 다른 표정을 갖게 되고, 결국은 이로 인해 건물도 더욱 웅장해 보인다. 건물의 동서남북 표정을 각각 살펴보면, 우선은 각 면의 현판 내용이 다르다. 금강계단을 직접 대하는 북쪽에는 ‘寂滅寶宮’(적멸보궁), 남쪽 면에는 ‘金剛戒壇’(금강계단), 동쪽은 ‘大雄殿’(대웅전), 서쪽에는 ‘大方廣殿’(대방광전)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금강계단이라 함은 영원히 절대로 깨어지지 않는 금강과도 같이 계율을 지킨다는 뜻이고, 대웅전은 대웅, 곧 석가모니불을 모신 전각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진리요 우주의 본체인 법신불이 상주하는 도량이라는 뜻으로서 대방광전이란 말을 쓴 것이다.

 

# 대웅전의 꽃창살


대웅전이란 현판이 걸린 동쪽 면은 5칸이며 칸과 칸 사이의 간격은 모두 같다. 칸마다 분합문을 달았다. 퇴칸의 문이 모두 단정한 빗살창인 데 비해 어칸의 문은 격자빗살창에다가 갖가지 꽃무늬 장식물을 붙여 매우 화려하게 해놓았다. 

 

양산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_꽃살문/사진출처-문화재청  丁자형의 특이한 대웅전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건물답게 매우 화려하게 꾸며졌다. 그중 하나인 꽃창살이다. 또, 지붕의 합각면이 금강계단 쪽으로 치우쳐 있다. 그런가 하면 금강계단이란 현판이 걸린 남쪽 면은 지극히 정상적인 팔작지붕의 합각면이 나타난다. 3칸으로 이뤄져 있고, 칸마다 문을 달았다. 퇴칸에 비해 넓은 어칸은 사분합문이다. 창문은 모두 빗살무늬이고, 어칸의 위치에 자리한 계단 소맷돌의 장식은 동쪽 면에 비해 좀 소홀해진 느낌이 들지만 전체적으로는 균형잡힌 시원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현판의 글씨는 일주문과 마찬가지로 흥선대원군의 작품이다.

 

# 대웅전 돌계단의 소맷돌

 

대웅전 돌계단연화문/사진출처-문화재청  현재의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 다시 지어진 것이나 기단을 이루고 있는 부분은 초창 당시의 것으로 여겨진다. 그중 화려한 꽃장식이 돋보이는 돌계단의 소맷돌이다. 대웅전 건물을 한 바퀴 도는 기분으로 걸음을 옮겨 모퉁이를 돌면 대방광전이란 현판이 달린 서쪽 면이다. 바닥이 높아진 까닭에 동쪽 면이나 남쪽 면에서 보았던 기단부 자체가 낮아져 장식이나 계단은 없어졌고, 5칸이지만 금강계단 쪽의 퇴칸인 두 칸은 문을 달지 않고 벽체로 마감했다. 어칸과 남쪽 퇴칸 모두 이분합문을 달았다. 퇴칸은 격자무늬로 장식했고 어칸은 격자와 빗살문을 혼합했다. 동쪽과 남쪽 면에 비해 화려하고 웅장한 맛은 뒤지지만 수수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게다가 앞쪽에 작은 연못까지 마련돼 있다.

 

# 구룡지

 

이 작은 연못은 ‘구룡지’(九龍池)로 통도사의 창건설화에 등장하는 의미 있는 장소이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자장 스님이 중국에 유학해 종남산 운제사 문수보살상 앞에서 기도드리고 있을 때였다. 문수보살이 나타나 가사 한 벌과 진신사리 100알, 머리뼈와 손가락뼈, 염주, 경전 등을 주면서 이르기를 “그대의 나라 남쪽 취서산 기슭에 독룡(毒龍)이 살고 있는 못이 있는데, 그 용들이 비바람을 일으켜 곡식을 상하게 하고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대가 용이 사는 연못에 금강계단을 쌓고 이 불사리와 가사를 봉안하면 삼재(三災)를 면하게 되어 만대에 이르도록 불법이 전하리라” 했다. 그 후 자장율사가 귀국해 선덕여왕과 함께 취서산을 찾아가서 독룡들이 산다는 이곳 못에 이르러 용들을 위해 설법을 해 물러나게 한 뒤 못을 메우고 계단을 쌓았다는 것이다.

 

구룡지구룡지는 자장율사가 처음 통도사를 창건할 때 독룡이 살고 있었다는 전설이 깃든 의미 있는 장소로, 금강계단에 잇닿아 있는 북쪽 면은 접근할 수 없는 공간이기 때문에 내부를 볼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 건물 안에서 금강계단이 바라다보이도록 유리창을 냈다.

 

겉보기보다 훨씬 더 화려하고 규모가 큰 대웅전에 들어서면, 우선 금강계단 쪽을 향하고 있는 수미단의 규모와 화려함, 모란과 국화, 연꽃 등이 한가득 피어난 높직한 층단천장, 공포와 보에 빈틈없는 단청, 포벽을 장식한 벽화 등에 숨이 꽉 막힌다. 우아함을 잃지 않으면서 한껏 화려하다. 내부의 구조는 얼핏 복잡해 보이지만, 중앙 1칸의 고주를 중심으로 해서 금강계단 쪽에 2×3칸의 장방형 구조가 3×3칸의 방형 건물에 덧붙여진 丁자형 구조다. 대웅전은 금강계단에 모셔진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참배키 위한 공간이라는 역할에 충실하고, 또 그런 참배 행위를 매우 신성하고 경건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건축, 장엄된 것이다.

 

# 금강계단

 

통도사 금강계단 전경/사진출처-문화재청 현재의 금강계단은 대웅전 북쪽에 확보된 널찍한 마당에 장방형의 울타리를 두르고 그 안에 지대석을 깔아 만든 방형의 이중기단의 중앙에 앙련과 복련으로 만든 대좌를 놓고 그 위에 석종형 부도를 모신 모습이다. 울타리는 한 변의 길이가 13.7m이고, 하층기단은 한 변의 길이가 약 9.8m 높이가 0.82m, 상층기단은 한 변의 길이가 약 7m 높이가 0.4m 크기이다. 대좌의 지름은 1.5m 정도, 그리고 부도는 높이가 1.5m 정도이다. 울타리 안의 하층기단 네 모서리에 사천왕상이 각기 하나씩, 그리고 울타리 바깥 정면 양쪽에 신장상이 조각된 석물이, 중앙에는 석등과 간주가 놓여 있다. 폭 0.96m 길이 12.9m의 길쭉한 장방형 석조물에 돋을새김된 신장상은 움직임이 동적이긴 하지만 세부 묘사가 다소 간소화됐다는 느낌이 든다. 하층기단 모서리에 서 있는 사천왕상 역시 표정이 굳어 있고 비례가 조화롭지 못하다. 사천왕상의 크기는 높이 1.12m 정도이고 폭은 0.43m이다.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모셔온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곳으로, 화려한 석문과 석조 담장으로 둘러싸인 곳 너머 사리가 담긴 석종형 부도가 보인다. 

 

통도사 금강계단 하층 기단 금강계단은 창건 이후로 그 신비로움 때문에 수난을 많이 당했다. 특히 고려 말기 왜구에게 그리고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왜적에게 사리를 탈취당하는 일까지 생겼었다고 한다. 이런 수난을 겪는 와중에 금강계단은 중수되는 일이 빈번했다. 자장율사에 의해 초창된 후 금강계단이 중수된 시기로 기록돼 있는 해는 고려 우왕 3년(1377), 조선 선조 36년(1603), 효종 3년(1652), 숙종 31년(1705), 영조 19년(1743), 순조 23년(1823) 그리고 1911년 등이다. 1911년 일제강점기에 일본 기술로 축대를 쌓고 석조 울타리를 두르고 석문을 세운 것을 제외하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금강계단은 숙종 31년에 중수된 18세기 이전의 모습으로 추정된다. 통도사 대웅전과 금강계단은 국보 제290호이다.

 

# 명부전 

 


대웅전과 금강계단 외에 상로전 영역을 이루는 건물로는 명부전과 일로향각.응진전.삼성각 그리고 산령각이 있다. 명부전은 대웅전의 남쪽 마당 왼쪽에 서향하고 있는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집으로, 특이하게도 측면 두 칸을 판벽으로 마감하고 정면의 양쪽 끝칸 하나씩에 창호문이 아닌 판장문을 달아 창고로 이용하고 있다. 건물이 처음 지어진 것은 고려 공민왕 18년(1369)이나 현재 건물은 조선 고종 25년(1888)에 다시 지어졌다. 현재의 건물이 다시 지어진 것은 고종 24년에 일어난 화재 때문으로, 이때 불탄 건물은 영조 36년(1760)에 지어진 것이었다고 한다. 내부에는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을 모시고 있다. 

 

 

# 응진전

 


대웅전의 서쪽 아랫단에 동향해 서 있는 응진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집으로, 숙종 3년(1677)에 창건됐다고 하나 그 당시의 모습은 아니고 이후 조금씩 중수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내부에는 석가여래와 좌우에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상을 봉안하고, 그 주변에 16나한상과 범천 및 제석천을 모시고 있다. 측면 외벽 중앙에 그려진 신장상이 매우 압도적이다. 그 외 일로향각은 상로전을 관리하기 위해 마련된 건물이다.<끝>/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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