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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27] 천불천탑 운주사(1)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0-01 12:23:57
  • 수정 2024-04-02 03:2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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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전남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천불산(千佛山 또는 靈龜山) 기슭에 있는 천불천탑 운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운주사의 창건연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신라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풍수지리에 근거해 비보사찰(裨補寺刹)로 세웠다는 설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지형을 배 모양에 비유, 배를 진압할 물(物)이 없으면 침몰하기 쉽기 때문에 그 중심부분에 해당하는 운주곡에 천불천탑(千佛千塔)을 하룻밤 사이에 세워 내실(內實)을 기했다는 것이다.

 

'동국여지지 東國輿地志'에 고려승 혜명(惠明)이 무리 1,000여 명과 함께 천불천탑을 조성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 혜명을 970년(광종 21)에 관촉사 대불을 조성한 혜명(慧明)과 동일한 인물로 본다면 운주사는 고려초에 건립됐을 가능성이 있다. 연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는 절로서 천불천탑과 석불 2구가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 있는 석조감실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또한 1984년 제1차 발굴조사 때 '홍치 8년'(弘治八年)이라고 새겨진 기와편이 발견돼 1495년(연산군 1)에 4번째 중수가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으므로 조선 초기까지는 존속했다. 그뒤 정유재란으로 폐사된 것을 1800년경에 설담자우(雪潭自優)가 땅에 묻힌 불상과 무너진 불탑을 세우고 약사전 등을 중건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84~89년 4차례에 걸친 전남대학교 박물관의 발굴조사 과정에서 금동불입상을 비롯해 순청자, 상감청자, 분청사기의 파편, 기와편 등이 출토됐다. 그 결과 운주사는 늦어도 11세기초에는 건립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운주사의 문화재로는 석조불감(보물 제797호).9층석탑(보물 제796호).원형다층석탑(보물 제798호).와불(臥佛) 등이 대표적이다.


비보裨補사찰이라 함은 ‘돕고 보호한다’는 의미로 강한 곳은 부드럽게하고 허한 곳은 북돋워줌으로서 자연의 흐름에 역행하지 않으면서도 호국과 중생들의 이익을 도모한 도선국사의 지혜가 담긴 사찰을 의미한다.


1481년(조선 성종 12년)에 처음 편찬되고 중종 25년(1530)에 증보된 ‘동국여지승람’의 능성현(綾城縣)조에는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다. 절의 좌우 산마루에 석불과 석탑이 각각 1,000개 있고, 또 석실이 있는데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 있다”(雲住寺在千佛山寺之左右山背石佛塔各一千 又有石室二石佛相背而坐)라는 기록이 있다.



1984 ~ 90년까지 4차례 발굴조사 과정에서 금동불입상을 비롯해 순청자, 상감청자, 분청사기의 파편, 기와편 등 출토된 유물로 볼 때 늦어도 11세기 초인 고려초기에는 건립됐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홍치 8년(弘治八年, 1495, 연산군 1년) 운주사환은(雲住寺丸恩) 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 조각이 발견되면서 4번째 중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사찰의 이름이 '운주사(運舟寺)' 뿐 아니라, '운주사(雲住寺)'로도 불렸음이 확인됐다. 


그 후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왜적에 의해 폐사됐다가 1800년경에 설담 자우(雪潭 自優)스님이 무너진 불상과 불탑을 세우고 약사전 등을 중건했고, 1921년에 발간한 ‘도암면지’에 1918년 불자 16명이 시주해 중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사찰 경내에는 조각수법이 정교하지 않고 투박한 80여기의 석불, 21기의 석탑, 173기의 불재 및 탑재관련 유물이 남아 있다.



조성연대는 일시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 고려초기에서 중기에 걸친 오랜 기간을 두고 계속됐을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017년 3월 ‘화순 운주사 석불석탑군’이란 이름으로 천불천탑 운주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최종 등재됐다.


# 운주사 석탑의 이해


‘다탑봉의 천불천탑’으로 알려진 운주사의 불교유적은 화순군 도암면의 해발 1백여 미터의 야트막한 야산의 남북 방향으로 뻗은 두 산등성이와 계곡사이에 위치한다. 양쪽으로 벌어진 낮은 구릉의 산등성이 사이, 계곡 여기저기에 불상과 탑이 서 있다. 운주사는 후기라는 왕조 말기적 분위기 속에서 풍수지리사상에 입각한 행주론(行舟論) 곧 한반도를 배 형국으로 보고 운세가 일본으로 떠내려가는 것을 막기 위한 풍수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더욱이 운주사의 성격에서 불교사원이라기 보다는 도교사원이었다는 주장, 밀교사원이었다는 주장, 민간 신앙의 기복처라는 이야기까지도 있다. 또한 운주사에는 천탑이 있었다고 하는 데, 과연 운주사에 천 기의 석탑이 있었고 이것들이 일시에 건립된 것일까?


千은 불교에서는 만수(滿數)로서 무량 무수(無量 無數)의 여래를 나타난다. 우리나라에 천불신앙은 중국의 남북조시대 이래 당대까지 각지에 천불이 조성되고 유지됐다. 우리나라에 천불 신앙이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 후기였고 고구려에 처음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경남 의령에서 출토된 고구려 불상의 명문에 천불상의 조성 사실이 보여 주목된다. 실제 천불상의 조성 예는 경덕왕대부터 문헌에 등장하고 운주사와 가까운 지역인 구례 화엄사와 해남 대둔사의 천불전 등에서 찿아 볼 수 있다.


하지만 천탑의 예는 없다. 이는 천이 ‘더 이상 채울 수 없이 가득한’ 개념을 가진 불교의 상징적 의미로만 사용됐음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운주사의 탑의 건립과 사찰의 창건이 비슷한 시기에 이뤄졌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관점이다. 하지만 워낙 신비스러운 사찰이라 석탑의 건립 배경이나 연대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제기돼 왔다. 양식적으로 보면 운주사의 석탑은 대부분 고려 중기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판단된다. 



통일신라시대의 석탑들이 보여준 정형적인 감각은 사라지고 약간은 무계획적이고 거친 듯 한 무작위의 기법이 운주사 석탑들에서 나타났지만, 운주사의 석탑에 대해 조잡하다거나 불심이 부족하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못하고 어떤 특별한 목적과 의지를 가지고 이러한 불사가 이뤄진 것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운주사에는 1941년도의 조사 집계로는 석탑이 22기가 있었다. 1981년도의 조사에는 18기로 줄어들어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석탑형식을 갖춘 것이 18기, 석주형으로 1층탑신만 남아있어 석탑으로 추정되어지는 것이 3기로 모두 21기의 석탑이 현존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① 방형석탑 : 이 석탑형식은 한국의 전형적인 석탑형식으로 탑신과 옥개가 방형을 이룬 것을 말한다. 


이들 방형석탑들은 다시 옥개석의 형태가 '신라계 석탑'의 옥개석처럼 급한 낙수면에 두툼하고 옥개석 폭이 좁은 둔중한 모습과 '백제계 석탑'의 옥개석처럼 완만한 낙수면에 얇고 넓으며 평평한 모습을 한 석탑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형식에 속한 탑은 11기이다.


② 원형석탑 : 이 형식은 전형적인 방형탑에 대해 이형적인 탑으로 탑신이나 옥개석이 원형을 이룬 것을 말한다. 이들 원형석탑들은 다시 원구형과 원판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즉 옥개석이 원구에 비슷한 주판알 혹은 떡시루 형태를 한 탑이 있고 옥개석이 얇고 넓은 원판형태를 한 탑이 있다. 이러한 형식은 한국석탑에서는 중국 송의 영향으로 고려후기에 나타나는 희귀한 유구이다. 이러한 형식에 속한 탑은 4기이다.



③ 모전계열석탑 : 이 형식은 벽돌로 내 쌓기와 들여쌓기 하면서 옥개석을 형성한 분황사모전석탑으로 대표되는 전탑형식을 모방하고 있으나 실제의 모습은 의성탑리석탑과 흡사한 것으로 단일석재를 전탑과 같이 모각한 것이다. 


모전석탑형식은 분황사모전석탑에서 시작돼 의성탑리석탑을 거쳐 통일신라시대이후 경주지방을 중심으로 서악동 3층석탑을 비롯해 남산 용장계폐탑, 남산리동삼층석탑등이 건립됐으나 백제의 고토인 충청. 전라지방에서는 월남사지와 이곳 운주사에서만 그 예를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운주사의 대웅전 앞 중정에 위치한 모전석탑은 벽돌과 같은 조그마한 석재로 옥개석을 형성한 것이 아니라 1매의 석재로 벽돌의 내쌓기와 들여쌓기 한 모습을 모방한 층단을 이룬 것으로 양식적인 조형은 월남사지모전탑에서보다 오히려 신라의 모전탑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형식에 속한 탑은 2기이다.



④ 석주형(石柱形)폐탑 : 이 형식은 두툼한 1매석으로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방형과 원형의 중간에 가까운 거친 석재를 기다란 기둥형식으로 세우고 다시 그 위에 옥개석과 비슷한 석재를 얹은 모습이다. 이 옥개석 위에는 다시 새로운 층을 올려놓을 만한 방형의 공간이 있고 주변에 현재 올려져 있는 옥개석 보다 작은 옥개석이 버려져 있어 3층 정도의 탑이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이 석조물을 석탑으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그 외의 기능을 갖고 있는 건조물인지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없다. 하지만 흔히 석탑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을 한 탑은 4기이다. 또한 도처에 폐탑의 부재들인 옥개석과 탑신석, 상륜 등이 산재돼 있어 천불천탑의 옛 흔적을 짐작케 해주고 있다./다음 회에 계속(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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