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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29]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 순천 '선암사(1)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0-01 21:46:37
  • 수정 2024-04-02 03:2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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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조계산(曹溪山) 동쪽 기슭에 있는 절이다. 현재 한국불교태고종의 유일한 수행 총림이다. 진입로는 경사도 완만하고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아름다운 운치있는 길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 길을 더 좋아하는 방문객들도 있다. 그리고 다른 산속의 절들을 찾아보면 알겠지만 오히려 선암사의 진입로는 다른 절에 비하면 적당한 편이다.


소설가 조정래의 아버지가 이 곳의 스님이었다.


불교를 소재로 한 영화, 드라마에서 촬영지로 등장하기도 했다. 강수연이 출연한 영화 아제 아제 바라아제와 전무송, 안성기가 출연한 영화 만다라의 촬영지가 선암사이다. 또한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경순공주가 삭발하고 출가하는 장면도 선암사에서 촬영했다. 이 때 출연한 엑스트라들은 실제 선암사 승려들이고 경순공주를 연기한 김나우는 이 연기를 위해 실제로 삭발했다. 김나우는 실제로도 불자이기도 했고, 촬영 때 부모님도 찾아와 참관했다고 한다. 비록 촬영은 여기서 했으나 실제 경순공주는 청룡사에 의탁했다. 이곳은 멸망한 고려 왕실 여성들이 기거하던 곳이기도 했다.


순천 선암사 전경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결정하는 세계유산위원회(WHC)는 2018년 6월 30일 바레인 수도 마나마에서 열린 제42차 회의에서 한국이 신청한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 우리나라가 등재 신청한 산사는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이다.


백제 성왕 5년(527) 현재의 비로암지에 초창주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처음 사찰을 창건했고, 산 이름은 청량산(淸凉山), 사찰 이름은 해천사(海川寺)라 했다.


신라 말 이창주인 도선국사가 현 가람 위치에 절을 중창하고 지금까지 쓰이는 이름 선암사로 지었고 1철불 2보탑 3부도를 세웠고, 지금도 이들 중 1철불 2보탑 3부도가 전한다.


고려 중기 삼창주인 대각국사 의천이 대각암에 주석하면서 선암사를 중창했다. 대각국사는 천태종을 널리 전파했고 선암사는 호남의 중심사찰이 됐다. 대각국사 중창건도기에 의하면 당시의 중창은 법당 13, 전각 12, 요사 26, 산암 19개 소등의 방대한 규모로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김극기(1171-1197)는 시에서 "적막하고 고요한 수행의 사찰"이라고 묘사했다.



조선 전기 선암사가 어떠했는지는 모른다. 중종 35년(1540) 일주문을 중수했다는 기록만 남았을 뿐이다. 선암사도 다른 절과 마찬가지로 1597년 정유재란 때 큰 피해를 입었는데 모든 전각이 불에 타고 철불, 보탁, 부도, 문수전, 조계문, 청측만이 남았다고 전한다. 현종 1년(1660) 경준(敬浚), 경잠(敬岑), 문정(文正) 등 세 승려가 대웅전을 세우는 등 8년간 크게 중창했지만 전쟁 이전의 사세를 복구하기에는 무리였다.


선암사의 중창불사를 마무리한 이는 호암약휴(護巖若休) 스님이었다. 호암은 승선교를 비롯해 원통전 불조전 등을 만들었다. 중창 이후 법당 8채, 전사(殿舍) 12차, 중료(中寮) 16채, 산암 13채를 갖추고 선적암(善積菴), 도선암(道詵菴) 등을 부속암자로 뒀다. 그러나 영조 35년(1759) 봄에 선암사는 또다시 화재를 만나 큰 피해를 입었다. 상월새봉(霜月璽封) 스님과 서악(西岳) 스님이 이듬해(1760) 재건불사를 시작했다. 이는 아도화상 이래 도선-의천-경잠-경준-문정-호암의 뒤를 이은 오창(五創)이라 할 수 있다.


상월새봉 스님은 중창불사뿐만 아니라 1734~35년에 두 차례 화엄대법회를 개최했는데 이때 참가한 1287명의 명단이 선암사 해주록(海珠錄)에 전한다. 그리고 상월스님은 화재를 예방키 위해 1761년 산 이름을 청량산, 사찰명을 해천사로 개칭했다.


정조 13년(1789)에 임금이 후사가 없자 눌암스님이 선암사 원통전에서 해붕 스님이 대각암에서 백일기도를 해 1790년 순조 임금이 태어났다. 이후 왕위에 오른 순조 임금은 인천대복전(人天大福田)이라고 쓴 편액과 은향로, 쌍용문가사, 금병풍, 가마 등을 선암사에 하사했다.


와송

순조 22년(1798)에는 승중문음(僧中文音)으로 유명한 해붕전령(海鵬展翎)이 칠전(七殿)을 중창했다. 순조 23년(1823) 3월 30일 실화로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동의 건물이 불에 타자 다음해부터 해붕(海鵬), 눌암(訥庵), 익종(益宗) 스님 등이 6번째 중창불사를 해 현재의 가람 구조를 갖췄다. 그리고 산명과 사명을 다시 복칭(複稱)했다.


조선 말기에는 호남을 대표하는 함명태선(涵溟太先)-경붕익운(景鵬益運)-경운원기(景雲元奇)-금봉기림(錦峯基林) 등 4대 명강백을 배출했다. 


1919년 조선총독부가 본발사법으로 전국사찰을 30본산으로 지정했을 때 선암사는 전남의 4본산 중 하나로 지정돼 순천, 여수, 광주 지역의 사찰을 관장했다.


전성기 시절에는 건물 100여 동이 있었으나 여순사건 당시 40여 동이 불에 타서 사라졌다. 그나마 65동이 남아 있었지만, 6.25 전쟁으로 꽤 많이 소실돼 지금은 20여 동만 남았다. 선암사 일원은 2009년 12월 21일 사적 제507호로 지정됐고, 2018년 6월 30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범종각현재 선암사는 태고종 유일의 총림인 태고총림(太古叢林)으로써 강원과 선원에서 수많은 스님들이 수행정진하는 종합수도도량의 역할을 이어가고 있다.


순천 선암사 공간 구성의 특징은 4개의 영역이 공존하는 다중 구조라는 점이다. 4개 영역은 대웅전 영역(만세루, 심검당, 설선당, 대웅전, 지장전, 응향각), 원통전 영역(원통전, 팔상전, 불조전, 장경각, 노전), 응진당 영역(응진전, 미타전, 진영당, 달마전, 산신각), 각황전 영역(각황전, 무전)이다. 


각 영역은 건물들이 ‘ㅡ’자형, ‘ㄴ’자형, ‘ㄷ’자형, ‘ㅁ자형’을 구성하고 있고, 담장 등으로 공간이 구분돼 있다. 이는 조선 후기 사찰 건축 구조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순천 선암사(사적 제507호)에 소장된 문화재는 불상 429점, 불화 159점, 석조물 72점, 공예 258점 등 총 2,679여 점이다. 이 가운데 국가문화재가 16점이고, 시도문화재가 11점이다. 국가문화재는 보물이 14점, 천연기념물 1점, 국가민속문화재 1점이다. 


시도문화재는 유형문화재 7점, 기념물 1점, 문화재 자료 3점이다. 보물은 순천 선암사 동.서 삼층석탑(보물 제395호), 순천 선암사 승선교(보물 제400호], 순천 선암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보물 제955호), 순천 선암사 대각국사 의천 진영(보물 제1044호), 순천 선암사 대각암 승탑(보물 제1117호), 순천 선암사 북 승탑(보물 제1184호), 순천 선암사 동 승탑(보물 제1185호), 순천 선암사 대웅전(보물 제1311호), 선암사석가모니불괘불탱 및 부속유물일괄(보물 제1419호), 순천 선암사 선각국사 도선 진영관련항목 보기(보물 제1506호), 순천 선암사 서부도암 감로왕도(보물 제1553호), 순천 선암사 33조사도(보물 제1554호), 순천 선암사 동종(보물 제1558호), 순천 선암사 동종(보물 제1561호)이다. 


석가모니/문화재청국가민속문화재로는 18세기에 대각국사 의천을 위해 제작한 삼보명자수가사(三寶名刺繡袈裟).쌍룡문직은가사(雙龍紋織銀袈裟) 2점과 중국 명나라의 유물로 전해지는 용문자수탁의(龍紋刺繡卓衣)가 일괄로 선암사 소장 가사.탁의(국가민속문화재 제244호)로 지정됐다. 


매화로 유명한 순천 선암사 선암매는 천연기념물 제488호로 지정됐다. 시도유형문화재에는 선암사금동향로(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0호), 선암사팔상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60호), 선암사중수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92호), 선암사일주문(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96호), 선암사원통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69호), 순천선암사금동관음보살좌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62호), 순천 선암사 불조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95호)이 있다. 


시도기념물에는 선암사삼인당(전라남도 기념물 제46호)이 있다. 문화재자료에는 선암사각황전(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77호), 순천선암사측간(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14호), 대각암 올라가는 길가에 있는 선암사마애여래입상(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57호)이 있다. 


# 승선교


선암사의 부도(浮屠)를 지나 경내에 이르면 시냇물을 건너야 되는데 그 건널목에 놓인 다리가 승선교이다. 시냇물의 너비가 넓은 편이라서 다리의 규모도 큰 편인데, 커다란 무지개 모양으로 아름답게 놓여있다.


기단부(基壇部)는 자연 암반이 깔려 있어 홍수에도 다리가 급류에 휩쓸릴 염려가 없는 견고한 자연 기초를 이루고 있다. 다리의 아래부분부터는 길게 다듬은 돌을 연결해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를 쌓았다. 그 짜임새가 정교해 밑에서 올려다보면 부드럽게 조각된 둥근 천장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홍예를 중심으로 양쪽 시냇가와의 사이는 자연석을 쌓아 석벽을 이루고 그 윗부분에도 돌을 쌓았다. 모두 주변의 냇돌을 이용했다. 다리 한복판에는 용머리를 조각한 돌이 밑으로 삐죽 나와 있어 장식적 효과를 주고 있는데, 예로부터 이것을 뽑아내면 다리가 무너진다고 전해오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불에 타서 무너진 선암사를 중건할 때 이 다리를 놓은 것으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가 관음보살의 모습을 보기 바라며 백일기도를 했지만 그 기도가 헛되자 낙심해 벼랑에서 몸을 던지려 하는데, 이 때 한 여인이 나타나 대사를 구하고 사라졌다. 대사는 자기를 구해주고 사라진 여인이 관음보살임을 깨닫고 원통전을 세워 관음보살을 모시는 한편, 절 입구에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를 세웠다고 한다.


무지개 모양으로 건설한 양식은 곧 보성 벌교 홍교와 같은데, 2개가 모두 지역적으로 가까운 곳에 있으므로 양식상 공통점이 있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다만 돌을 쓴 방식이나 마무리수법이 오래된 양식이며, 그 구조 또한 보다 웅장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미뤄 영조 때에 만들어진 벌교홍교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 강선루


순천 선암사 강선루(降仙樓)는 다른 사찰과 달리 문루 기능이 큰 2층 누각이다. 강선루는 좁은 지류가 흐르는 다리 위에 지은 문루여서 다른 누각과 구조가 다르다. 강선루 1층은 정면 1칸 측면 1칸이고, 2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맑고 깊은 계곡 옆의 강선루와 보물로 지정된 무지개다리 승선교가 같이 있어 멋진 풍광을 보여준다. ‘선암사(仙巖寺), 강선루(降仙樓), 승선교(昇仙橋)’ 모두 신선과 연관된 이름이다. 온통 신선들의 놀이터다.


우리나라 여러 사찰 가운데 예스러움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 순천 선암사다. 조계산 건너편 삼보사찰 송광사와 함께 ‘조계산 송광사.선암사 일원’이 명승으로 지정됐다. 조계산의 송광사와 선암사는 자연과 역사 문화가 공존하는 곳이다. 



선암사 입구에서 계곡을 따라 걷다보면 일주문 대신 강선루가 먼저 맞아준다. 다른 사찰과 달리 강선루는 문루의 역할을 하고 있다. 강선루와 주위 풍경을 보면 여행의 피로감이 싹 가셔진다. 강선루 우측으로 찻길이 나있어 옛 모습은 아니지만 그래도 좋다. 맑고 깊은 계곡 옆의 강선루와 거기에 보물로 지정된 무지개다리 승선교가 더해진다. 


‘선암사(仙巖寺), 강선루(降仙樓), 승선교(昇仙橋)’. 조계산 자락의 선암사 일대는 모두 신선과 연관된 이름이다. ‘선암사’는 절 서쪽에 있는 평편한 큰 바위에서 신선들이 바둑을 두었다는 유래에서 이름 지어졌고, ‘강선루’는 신선이 내려와서 노니는 누각이고, ‘승선교’는 아침 해 떠오르듯 신선들이 놀다 하늘로 올라가는 다리라는 의미이다. 


강선루는 2층 누각으로 1층은 정면 1칸 측면 1칸이고, 2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2층은 전체가 마루이고 사방에 계자난간을 둘렀다. 1층 기둥 사이가 넓어 2층 누각을 떠받치는 기둥을 4개 세웠다. 강선루는 좁은 지류가 흐르는 다리 위에 지은 문루여서 구조가 다른 누각과 많이 다르다. 강선루가 언제 건립됐는지 확실치 않다. 누각의 정면과 후면에는 서로 필체가 다른 ‘강선루(降仙樓)’ 편액이 처마 가운데 걸려있고, 다른 기문이나 시판은 없다.


# 일주문 


조계산 선암사는 백제 성왕 7년(529)에 아도화상이 처음 짓고 비로암이라 하다가, 신라말 도선국사가 선암사라 했다고 전한다. 선암사 입구에 세워져 속세와 불계의 경계역할을 하는 일주문은 언제 세웠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조선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일주문은 9개의 돌계단을 앞에 두고 있고,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단순한 맞배지붕집이다. 2개의 기둥을 나란히 세우고, 그 앞뒤로 보조 기둥을 세웠으나 위로부터 30㎝ 중간에서 보조 기둥을 잘랐다. 이는 기둥 양 옆으로 설치된 담장 때문인 듯 하며, 다른 일주문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 배치된 다포식 건물이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 배치되는 공간포를 앞면에 3구, 옆면에 1구씩 두어 공포로 꽉 차 있는 듯하다. 기둥 위에는 용 머리를 조각해 위엄을 더했다. 앞면 중앙에 ‘조계산 선암사(曺鷄山 仙巖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선암사 일주문은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의 전화를 입지 않은 유일한 건물로 조선시대 일주문의 양식을 잘 보전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 대웅전 


대웅전은 선암사의 중심법당으로 1824년에 중창됐다. 다포계의 일반적인 수법을 따랐으나 화려한 건축양식과 장식성에서 조선 후기 중건 당시의 면모를 잘 간직하고 있다. 2001년 보물로 지정됐다.


조계산 선암사는 백제 성왕 7년(529)에 아도화상이 비로암이라 했던 것을 통일신라 875년(헌강왕 5) 도선국사가 선암사라 고쳐 불렀다. 이후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이 더욱 크게 해 대가람을 이뤘다고 한다. 그러나 대웅전을 비롯한 대부분의 전각들이 정유재란(1597) 때 불에 타 없어져 1660년(현종 1)에 경잠.경준.문정 등 3대사가 대웅전을 중수했다. 현존 대웅전은 상량문이 발견돼 1766년(영조 42)에 불탄 것을 1824년(순조 24)에 중창된 것으로 밝혀졌다.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은 선암사의 중심 법당으로, 그 앞에 만세루와 주축을 이루고 있고 앞마당에는 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2기가 나란히 서 있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인 대웅전은 자연석 기단 위에 민흘림 기둥을 세워 지어졌다. 기둥머리에는 용머리 장식을 했다.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이다. 공포를 앞뒤 면에는 각 3조, 양 옆면에는 각 2조씩을 배치해 장엄하면서도 화려함을 나타내었다. 특히 건물 안쪽 공포 구조에서는 화려한 연꽃 봉오리 장식으로 마감해 조선 후기의 화려하고 장식적인 수법을 나타내고 있다. 높이 1m로 쌓은 기단 위에 주춧돌을 배열했다. 앞면에는 3단으로 굄을 둔 둥근 주춧돌을, 뒷면.옆면에는 덤벙주춧돌을 놓았다. 문은 모두 빗살을 둔 4분합문(四分閤門)이며 위에 교창(交窓)을 두지 않았다. 


내부는 천장을 井자 모양의 반자로 막은, 이른바 우물천장으로 했고, 고주(高柱) 2개를 세워 그 앞에 불단(佛壇)을 마련하는 한편, 후불벽(後佛璧)을 세워 후불탱화(後佛幀畵)를 걸고 앞에 본존불을 안치했다. 전체적으로 보아 출목수가 많아서 처마 끝이 심하게 휘어 올라갔으나 날렵하기보다는 장중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겹처마 팔작지붕 다포계 건물로 무고주 5량가이고 자연석 기단위에 놓인 초석은 주좌가 있는 초석과 덤벙주초가 혼용됐고 그 위에 세워진 기둥은 민흘림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정면에는 모두 궁창판이 있는 4분합의 빗살문을 달고, 양측면의 남측 협칸에만 출입문을 달아 벽체로 마감했고 후면 중앙에만 2분합의 세살문이 있고 나머지는 벽체로 구성됐다. 건물 내부로는 모두 우물마루가 짜아졌고 어칸의 후면으로 불단을 놓아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모시고 있는데 석가모니불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기둥위에 짜아진 포작은 다포계의 일반적인 수법을 따라 창방과 평방을 놓고 그 위에 전후면에는 각 3조씩, 양측면에는 각 2조씩의 주간포를 배치했고, 첨차는 교두형(翹頭形)이지만 내외살미는 외부에서 앙서형을 이루고 내부에서는 화려한 연봉형장식으로 마감했다. 포작은 외3출목(7포작) 내4출목(9포작)이며 조선 후기 건축에서 보이는 연봉장식 등의 요소가 두드러진다. 


대웅전처마 용두 선암사 대웅전은 다포계의 일반적인 수법을 따랐지만 정면 기둥머리에 용머리 장식의 안초공 수법과 건물 내부에 연봉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기법은 변산반도를 중심으로 하나의 계보를 이룬 부안의 내소사대웅보전(보물, 1963년 지정).개암사 대웅전(보물, 1963년 지정)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고, 화려한 건축양식과 가구의 수법 및 포작의 장식성이 뛰어나며 중건 당시의 면모를 잘 간직하고 있어 역사적, 학술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대웅전 앞마당에서 주목할 만한 또다른 문화재는 괘불지주이다. 괘불을 높이 내걸 수 있도록 괘불대를 세우는 데 필요한 돌기둥인 이 괘불지주의 주인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괘불의 하나로 꼽히는 선암사 괘불(6.82×12.15m)이라 할 수 있다. 선암사 괘불은 석가모니 한 분이 비단 한 면 가득 차게 그려진 그림으로, 대웅전 후불벽화 뒤쪽 나무함에 보관되어 있다. 1753년 제작된 이후 나라 안팎에 우환이 있을 때나 천재지변이 있을 때, 또는 안전을 빌 때 내걸렸다.


# 만세루 


대웅전을 마주하고 자리한 강당건물로 선운사의 만세루 처럼 누각의 형태가 아니고 평지에 자리한 단층건물이다. 만세루는 '선암사정문상량문'에 의하면 1825년 초창됐다. 만세루의 배면에는 '六朝故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六祖古寺'를 달리 표현한 것이라고 하나 다른 이설도 있다고 한다. 



선암사는 일반적인 삼문(三門) 체제 대신 일주문-범종루-만세루의 순서로 이어지는데 누하(樓下)진입한 범종루와는 달리 만세루는 2층 누각이 아니고 지면에 붙은 단층 건물인지라 좌우측으로 돌아 들어가는 방식이다. 만세루는 원래 강당으로 총림에서 많은 학승들에게 강학을 하는 곳이다. 


강당은 금당의 뒤쪽에 있어야 하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대웅전 앞에 위치하게 됐는데 예불시 큰 스님 몇 분만 대웅전에 들어가고 나머지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은 강당에서 예불에 동참하는 형태로 진행되다가 지금은 모두 대웅전에 들어가서 올리게 됐다고 한다. 만세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대웅전쪽이 앞면이며 들어가면서 보는 방향은 뒷면이다. 1824년 대웅전과 함께 지어졌다.


# 설선당


현재의 설선당은 '선암사승당양간록'의 기록에 의하면 1825년에 건립됐다. 대각국사중창건도기에 동일한 자리에 유사한 형태의 건물이 묘사된 것으로 보아 역대 대방터임을  알 수 있다. 설선당은 사찰의 중심축에서 좌측에 위치한다. 중층인 口자형 건물로 심검당과 비슷한 기능과 형태를 하고 있으며 예전에는 스님들이 공양을 하는 공간으로 사용했다. 



낮은 기단에 덤벙주초를 놓아 두리기둥을 세우고 초익공 형식을 한 단촐한 건물로, 맞배지붕이 이어져 口자를 이루고 중앙의 조그마한 마당을 향해 건물이 집중 배치된다. 외부에서는 단층 건물로 보이나 내부에서는 중층건물이다. 


1층에는 스님들이 기거하는 방이고 2층은 수장공간으로 활용한다. 내부는 조그마한 중정을 향하고 있어 개방적이나 외부로는 문이 별로 없고, 창으로 돌려져 다소 폐쇄적인 성향을 갖는다. 대웅전 마당쪽에 면한 대방 옆으로 판장문이 있고 그 문 안쪽에는 커다란 부엌이 있다. 부엌 남측으로 문이 있고 그 문 밖으로는 장독대가 담장을로 둘러져 설치돼 있다. 거물 서측(후면)으로 마각이 설치되고 북측, 남측, 서측이 담장으로 연결돼 외부와 공간을 경계한다.


# 심검당 



대웅전을 바라보아 오른쪽(동쪽)에는 심검당이, 왼쪽(서쪽)에는 설선당이 대칭으로 마주보고 있는데 이 두 건물은 단층 건물로 보이나 사실은 중층(重層, 2층)건물로 1층은 승려들의 수행공간, 또는 생활공간이자 일부는 사무실로 사용하고, 2층은 수장고인데 외부에서는 1층으로 보인다. 건물모양은 서울.경기지역 반가의 안채를 꾸미는 수법과 비슷한데, 내부로는 조그만 마당을 두어 개방적이지만, 바깥쪽으로는 창과 벽을 둘러 ‘ㅁ’자형을 이룬 폐쇄형이다. 기록에 의하면 “1823년 3월 화재로 선암사가 전소됐고, 1825년에 심검당과 설선당을 중건했다”고 한다.


# 지장전



대웅전 오른쪽(동쪽)에 직각으로 대웅전을 바라보고 있는 건물이 지장전이다. 지장보살과 명부의 10대왕이 모셔져 있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인데 1823년 화재로 소실됐던 것을 1년 뒤인 1824년에 중건했다.


# 응향각 



대웅전 왼쪽(서쪽)에 있는 응향각은 대웅전을 관리하는 스님이 기거하는 요사채인데 한 눈에 보아도 살림집처럼 보인다. 


이번회에서는 선암사의 중심법당이자 핵심영역인 대웅전 영역을 살펴봤다. 대웅전과 만세루가 마주보는 가운데 마당에는 석탑 2기가 쌍탑으로 서 있고 동, 서로 심검당과 설선당이 ㅁ자 형태로 모여 있고, 대웅전 동쪽에는 지장전이, 서쪽에는 응향각이 머리를 맞대고 있는 곳이다. 다음 회에서는 대웅전 뒷편으로는 조사전(祖師殿), 불조전(佛祖殿), 팔상전(捌相殿)이 나란히 세워진 가운데 원통전, 첨성각, 장경각이 그 뒤로 감추듯 숨어 있는 곳을 살펴볼 예정이다./다음회에 계속(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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